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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내가 아직 그대를 버릴 수 없는데

-새끼 레지가 6인조 아이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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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즈브라우 본가의 장남, 즉 그룬왈드의 첫째 형이 사망한 것은 약 반년 전이었다. 그때 레지멘트의 숙사 앞은 불행한 소식에 연류된 재벌가 후손의 얼굴을 어떻게든 프레임에 담아보려는 기자들과 그를 모시러 온 경호원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룬왈드가 공개적으로 장례식장을 향해 떠나는 퍼포먼스를 보인 다음에야 간신히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던 멤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룬왈드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답변은 없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걸까, 아니면 혈육이 죽은 상황에서 차마 폰을 확인할 경황이 없는 걸까. 그제사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따라가야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 레온이었지만 사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었다. 조문을 가고 싶다는 부탁조차 엄숙한 장례식장에 딴따라를 들일 수 없다며 차갑게 거절당한 그들이 할 수 있던 일이라곤 평소와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룬왈드는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바싹 마른 백합 같은 몰골로 돌아왔다.

 

이제 론즈브라우의 차남이 사고사한지는 이주일 하고도 삼 일이 지났다.

그룬왈드는 바싹 뒤틀려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하냐, 레온.”

“그룬왈드 생각.”

“…….”

 

평소에 본인이 잔소리하던 것처럼 침대에 똑바로 눕기는커녕 떡하니 가로질러 누워 고개를 휘꺼덕 꺽고 있는 레온에게 한 마디 해줄 법도 하건만, 아벨은 아무 말 없이 레온의 근처에 앉아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야, 제대로 닦고 나와야지. 시트에 물 튀잖아. 평소에 비해 한 두 단계 힘이 빠져있는 레온의 잔소리가 무뎠다.

 

“하긴 이번엔 많이 늦는군.”

“내 말이. 오늘 사장님에게 그룬왈드는 언제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이건 정계의 사정이 얽힌 일이니까 그쪽에서 다 정리 끝날 때까지 기다리래. 그게 말이 되냐!!”

“…네가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구는 건 처음 본다, 레온.”

“나도 이렇게 무력한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야.”

 

지금도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인형을 껴안은 채 침대에 파묻혀있는 그룬왈드가 있을 것만 같은데 정작 문 너머에선 브레이즈 혼자만 우두커니 방을 지키고 있다. 늘상 그룬왈드가 맡았던 파트는 에바리스트와 브레이즈가 나눠 부르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통용될 진 알 수 없었다. 소식을 들은 팬들은 쉴 새 없이 그룬왈드의 복귀날짜를 물었고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은 레온은 고작해야 발을 동동 구르는 팬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문구 밖에 쥐어짜내지 못했다. 그룬왈드와 한 페어를 이루었던 브레이즈 같은 경우엔 아예 SNS에 접속하는 것 자체를 그만둔 상태였다.

 

“그 자식, 대체 언제쯤 돌아올 생각인거야?”

 

아마 그건 본인도 모르리라. 의미 없이 론즈브라우 가의 장례식 뉴스만 죽죽 훑어보던 레온은 복도 끝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손가락을 뚝 멈췄다. 멤버들과 매니저 이외에는 아무도 번호를 알지 못하는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비트적 현관으로 들어서는 인기척.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레온은 과연 제 상상처럼 추위에 발갛게 물든 볼을 하고 멀거니 서있는 그룬왈드를 발견하고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있는 힘껏 그를 껴안았다. 옷깃 사이사이에 스민 겨울 바람내에 코 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레온의 뒤를 따라 나온 아벨에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브레이즈도 돌아온 그룬왈드를 보고 적잖은 놀람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을 짓는다. 그룬왈드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법 조차 잊어버린 것 마냥 그들을 응시하다 기침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와 네 번째 기침은 그를 꽉 안아주던 레온이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설 정도로 세게.

 

“너 감기 걸렸어?”

 

코트에 목도리를 둘둘 감은 그룬왈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게 식은 몸게 추위에 질려 하얗고 빨갛게 물든 볼, 그르렁거리는 호흡 정도면 대딥은 충분했다. 그룬왈드는 당장에 방으로 호송되었고 브레이즈와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 비싼 초콜릿 하나가 보상으로 걸린 다음에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약을 먹었다. 초콜릿이 사탕이라도 되는 것마냥 입에서 도록도록 굴리던 그룬왈드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잠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동안 그룬왈드를 쭉 지켜보고 있던 브레이즈는 싸하게 식어있던 볼에 따스한 온기를 적신 채 깊이 잠든 그룬왈드의 뺨을 매만지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이불 너머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이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빠르게도 적중했다.

 

“그룹 해체라니 무슨 소리에요?”

“말이 해체지 실상은 이때까지 해온 거랑 똑같아. 6인 그룹 채제에서 2인 그룹으로 나뉘어지면 훨씬 유동성이 있잖아? 가끔 통합 콘서트도 열거고.”

“아니,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요! 왜 굳이 해체하겠다는 거에요? 우리는 뭉쳐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했잖아요!!”

 

팀 레지멘트만 전속으로 맡고 있는 매니저는 평소의 시원시원한 태도와는 다르게 연신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 미적지근한 태도에 울분을 느낀 레온이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것을 손짓으로 멈춰 세운 에바리스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그룬왈드 때문입니까?”

“그룬왈드가, 왜? 뭐가 문젠데? 그 녀석은 스캔들도 실력 논란도 없잖아!”

“문제는 다른 쪽이야. 연이은 불행한 사고로 론즈브라우 가문의 후계자는 셋에서 하나로 줄었어. 정계 진출을 노리는 인사들과 그룹 내에서 제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에겐 놓칠 수 없는 히든 카드지. 어쩌면 정계의 흐름을 뒤바꿔 버릴지도 모를 존재를 연예계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내버려 둘 이유가 없어.”

“그래서 지금 그룬왈드를 버리겠다는 거야?”

“버리는 게 아냐. 보낼 수 밖에 없는 거지. 그쪽은 맘만 먹으면 연예인 소속사쯤은 가볍게 짓누를 수 있는 대기업이야.”

“……사실이에요?”

 

매니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맞아. 론즈브라우의 차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이야기는 나와있었어.”

“그렇다고…!!”

“에바리스트가 말한 그대로야. 아무리 우리에게 팬이 많아도 대기업이 한번 찍어 누르기 시작하면 밥줄이 끊기는 건 순식간이지. 사장님도 어떻게든 힘써보려고 했는데 무리였어.”

“말도 안 돼.”

“이게 현실이야. 레온. 그나마 사장님이 우기고 우겨서 연말 콘서트까진 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겠데. 하지만 그 공연이 끝나면, 팀 레지멘트도 끝이야.”

“왜, 왜 굳이 해체하겠다는 거에요?”

“6명에서 한 명이 빠진 그룹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만큼 썰렁한 일도 없으니까.”

“그럼 그룬왈드가 돌아올 자리가….”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돼. 누가 녀석을 다시 연예계로 돌려보내주겠어?”

“……그룬왈드는 알고 있습니까.”

 

아직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제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는 그룬왈드를 재워두고 나온 참인 브레이즈가 강물 위에 얹혀 두껍게 얼어붙어가는 얼음같은 목소리로 묻는다. 매니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본인인데 당연히 알지. 잔혹한 소리긴 하다만… 남은 시간만이라도 사이좋게 지내라. 헤어지면 더 이상 연락도 못하게 될 테니까. 알겠지?”

 

마지막 말은 물 위의 기름처럼 떠돌았다.

 

=

 

연말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팀 레지멘트가 해체된다는 이야기가 대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 하리라. 뜬구름 같은 소문을 들은 팬이나 몇몇 기자들이 소란스럽게 들썩이기 시작하자 소속사에서는 SNS 활동과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제하라는 통보를 내렸다. 그걸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평소와 똑같은 나날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가요무대에 섰고 화보를 찍었으며 주말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고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고 촬영장에서 웃었으며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흐름이 본격적으로 고이기 시작한 것은 소속사에서 연말콘서트 티켓팅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그룬왈드의 탈퇴와 팀 레지멘트의 해체 소식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발표가 나자마자 제일 먼저 각 팬 싸이트가 폭탄 맞은 전쟁터처럼 뒤집어졌다. 연예기자들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대형 떡밥을 두고 자기들 입맛대로 기사를 주무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격한 사생 팬 몇 명은 욕설을 하며 숙소 문을 두드려대다가 끌려갔다. 대형 포탈 사이트의 아고라에는 레지멘트의 해체를 반대한다는 청원 글이 몇 개씩 올라와 절망에 빠진 투표자들을 긁어모아댔다. 우리 오빠들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티끌 모아 태산,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하지만 그(녀)들이 티끌이라면 그들이 상대하는 상대는 깊고 깊은 물이었다. 형체도 없고, 애매모호하고, 모든 것을 너무나 손쉽게 집어삼켜버리는 심해. 그리고 그룬왈드는 벌써부터 그 심해에 끌려 들어가 버린 듯 침묵을 지켰다. 말수가 줄어든 것은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말 콘서트를 위해 소속사가 통째로 대절한 연습장에서는 팀 레지멘트의 음악소리와 박자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여섯 명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 비해 콘서트 준비는 흠잡을 데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안무였다. 그동안 팀 레지멘트의 안무를 담당해온 안무가는 그들의 연습장면을 쭉 지켜보다 노호와 같은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마지막 콘서트에 보일 안무 치고는 너무 무기질적인데다 특히 브레이즈와 그룬왈드가 춤을 추면서 단 한 번도 서로의 동작을 쫓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동작 외워서 몸 흔드는 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어. 아이돌들에게 필요한건 무대 위에서 자연스런 흐름을 만드는 거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서로의 동작을 유념하면서 다시!”

 

아침 무렵에 찾아온 안무가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떠나갔다. 번뜩이며 눈을 빛내던 안무가가 오케이 사인을 할 때까지 격렬하게 춤 연습을 반복한 멤버들은 거의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드러누워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투박한 시계가 째깍거린다. 저 초침의 움직임에 따라 그룬왈드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줄어간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레온의 머리를 찔렀을 무렵, 갑자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브레이즈가 양반다리를 한 채 숨을 고르고 있던 그룬왈드의 배를 걷어찼다. 단단한 푸댓자루가 몽둥이로 얻어맞는 듯한 투박한 소리. 순간적으로 내장이 짓눌린 그룬왈드가 한 박자 늦게 토해내는 숨소리. 브레이즈는 걷어찬 발을 거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움츠러든 그룬왈드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넌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

“대체, 뭘, 생각하고 있냐고!”

 

주먹 쥔 손이 이번에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룬왈드의 얼굴을 향한다. 그 얼굴에 선명한 멍 자국이 남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몸을 던져가며 브레이즈를 뜯어말린 멤버들 덕분이었다. 그래도 좀처럼 분을 삭이지 못하고 상대를 부숴버릴 듯한 시선을 쏘아 보내던 브레이즈는 꽉 다문 잇새를 벌려 잔뜩 구겨진 언어를 내던졌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씨발!”

 

브레이즈를 뜯어말리고 있는 세 명을 대신해 그룬왈드의 몸을 부축해주려던 에바리스트는 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앑아차렸다. 설마, 그 그룬왈드가 브레이즈에게 걷어차이고 매도당한 걸로 눈물을 흘린다고? 제 눈을 믿을 수 없어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려던 에바리스트는 파리한 안색의 그룬왈드가 연신 파르르 몸을 떠는 것을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룬왈드는 브레이즈가 체 진정하기도 전에 내장이 다 뒤집어지는 소리를 내며 거품 섞인 토사물로 반들반들하게 닦인 연습실 바닥을 뚝뚝 더럽혔다.

 

한참을 토하던 그룬왈드는 마지막으로 고통스런 헛구역질 소리를 게워내곤 연신 숨을 헐떡이며 멤버들에게 붙들려있는 브레이즈를 응시했다. 문득, 에바리스트는 제가 옛날에 키웠던 어린 개를 떠올렸다. 어느 날 뭘 잘못 먹었는지 사료와 뒤섞인 노란 물 같은 것을 잔뜩 토하소 에바리스트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아래로 도망간 채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검은 개. 지금의 그룬왈드는 그때의 개를 닮아있었다. 절박하게, 겁먹은 얼굴로, 그래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호소하는 눈.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군. 일단 좀 쉬는게 좋겠다.”

 

좀처럼 하지 않던 짓을 한 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에바리스트의 결정을 들은 아이자크는 두 말 없이 달려와 반쯤 쓰러진 그룬왈드의 몸을 붙잡아 일으켰다. 평소 같았으면 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자존심이라도 세웠으련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끌려올라오는 그룬왈드는 확실히 지쳐보였다. 에바리스트는 마지막으로 방에 남은 세 명을 곁눈질하고는 방을 나갔다. 토사물은 여전히 얼룩으로 남아있었다.

 

“…일단 좀 치울까.”

“어어.”

 

그룬왈드가 방을 나간 이상 무리하게 브레이즈를 잡아둘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물러나는 아벨과 레온 사이에서 브레이즈가 닻처럼 가라앉아 풀썩 주저앉았다. 시계 초침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간다. 뒷정리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던 브레이즈는 눈 앞에 레온의 그림자가 졌을 때에야 지독히도 지친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런 짓을 했어?”

“…….”

“됐어, 레온. 어차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 못하고 있을걸.”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룬왈드가….”

“딱히 그것 때문은 아닐걸? 이 자식이 모슨 보디빌더나 근육맨도 아닌데 한 대 맞았다고 토하겠냐. 그것보단 에바리스트가 말한 대로 스트레스가 쌓인 탓이 클 거야. 누구씨는 눈치 채지도 못한 것 같다만.”

“그만둬.”

 

이제 와서 그런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번개를 맞아 찢기고 타들어간 나무등걸처럼 주저앉아있는 브레이즈를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발걸음을 돌린다. 곁에서 아벨이 저대로 내버려둬도 되냐고 속삭였지만 지금은 레온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멤버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 브레이즈가 머리를 식히고, 감정을 제대로 정리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브레이즈는 거의 자정이 넘어갈 무렵에야 돌아왔다.

그때까지 잠들지도 않고 침대에 모로 누워있던 그룬왈드가 지친 눈을 깜박였다.

 

“…….”

“……….”

“……………미안하다.”

“그래.”

 

그룬왈드의 목소리는 해가 떠오르는 숲에 깔린 안개같았다. 브레이즈는 문득 갈증을 느끼고 입을 벌려 숨을 들이쉬었지만 당연히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풀리지 않을런지도 몰랐다. 브레이즈는 그룬왈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룬왈드는 이제 충분하다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걸로 좋은거냐, 그룬왈드.”

 

말라붙은 목소리가 죽은 자의 미련처럼 흉측하게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