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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FATE

[fate/zero]body world

 

까놓고 잊어버린 귤.

 

껍질은 바짝 말라서 오그라들고, 부드러운 과육을 감싸고 있던 얇은 표피는 수분을 잃고 질겨진다. 그 안쪽에는 아직 귤 본래의 과즙이 살아남아있겠지만 그걸 입에 넣어봤자 느껴지는 것은 탄력을 잃고 버석이는 표피와 불만족스러운 귤즙 뿐. 애초에 수분을 잃고 전체적으로 쪼그라들어버린 귤만큼이나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없다. 전신의 피부가 벗겨진 인체표본을 본 우류 류노스케의 심정도 이와 같았다.

 

이따금 충격적일 정도로 적나라하게 벌려지고 갈라진 표본들이 그의 시선을 붙잡으며 어두운 욕망에 깜부기불을 피워올리기도 했지만, 다만 그것뿐이었다. 만질 수도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 시체들에게는 우류가 원하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세상의 예술,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에게 딱딱하기 그지 없는 논리과학이 담긴 사전을 들이대고 있는 꼴이라고나 할까. 사실 생각해보면 진짜 인간의 시체를 썼다고는 해도 이것만큼이나 류노스케의 가치관에 반대되는 일도 없다.

 

우류 류노스케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가치를 둔다.

그런데 이 전시장은 어떤가.

 

모두들 "사전의 신청"을 거쳐 "사후에 가공"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비명도 없고, 절규도 없고, 쾌락도 없다. 단지 베어낸 나무를 깍고 다듬어 목재로 만든 뒤 원하는 결과물로 만들어 조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계적인 공정이 뒤따를 뿐이다. 즉 여기서 진열되어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단순한 인체의 지식을 알리는 '표지판'에 불과하다ㅡ라는 확고한 결론을 내린 순간에도, 우류 류노스케는 관람회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바싹 마른 귤 껍질은 입욕제 등등 으로도 쓸 수 있다던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전시회장을 메운 것이 진짜 인간의 시체라는 것은 분명하고 여기에 돈을 내고 들어온 것 또한 그 자신의 의지다. 그렇다면 최소한 두세번은 더 돌아보면서, 인체의 구조나 내부 골격등을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실패에 기죽지 않고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류 류노스케는 스스로의 결정에 만족하며 느긋하게 두번째 관람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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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o d y  w o r l d

우류 in 인체의 신비 전시회

써놓고 보니 앨리스 인 원더랜드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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