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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듀라라라!!

[이자미카♀]죽은 그대를 위한 파반느(下)

…그날, 류가미네 미카코는 길을 잃은 상태였다.

아주 잠깐 한 눈을 팔았을 뿐이었는데 두 친구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앞으로 30분 후면 식이 시작할텐데 도저히 강당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는 근처에 보이는 남학생을 발견하고 길을 물어볼 요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저어… 실례지만 강당이 어딘가요?" 

"…강당?"

 

남학생은, 오리하라 이자야는 질문을 곱씹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학생이었다.

잠시 가만히 서있던 이자야는 손가락을 들어 강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가리켰다.

소녀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을 향했다.

 

"저기로 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와."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소녀는 짧은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자야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른한 봄 오후였다. 햇살이 졸음을 불러일으켜,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은 날이었다.

더불어 피로에 취해있던 이자야는 그 아이의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만났었다는 사실조차 세 걸음만에 망각해버렸다.

정말로 피곤해서 아무런 정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한 순간이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때 그 아이를 만났던 걸까.

운명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어긋났더라도ㅡ

 

 

"너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어두워지는 거리. 나무와 풀과 덩쿨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이자야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옷에 튄 핏자국은 이제 거뭇거뭇하게 말라붙어 흡사 원래부터 존재했던 무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자들의 피가 묻은 옷을 입고다닐 생각은 없다. 이자야는 문득 옷을 전부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렇게하는 대신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꽉 악물린 이빨이 서로 맞물리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낙엽과 수풀이 무성히 깔려있는 땅은 삽으로 마구 파헤쳐져 내부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ㅡ거기에는 살점 하나 없이 새하얀 유골이.

 

 

이자야는 조용히 입술을 악물었다.

 

=

 

이자야의 보고를 들은 미카코의 반응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길을 잃은 미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냈을 때의 순간같은 환한 미소를 짓고있는 미카코에게서 자신을 죽인 자들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혹은 죽은 자가 느낄 법한 마이너스적 감정들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이자야가 느낀 감정은 부처를 마주한 신자의 감격이라기보다 주인의 죽음과 함께 산 채로 무덤에 갇힌 약혼녀의 주검을 본 남자의 분노와 비슷했다. 신발에 들러붙은 진흙을 바닥 여기저기에 찍어둔 이자야는 검게 굳어가는 흙덩어리를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걸로 좋은거야? 녀석들은 너를 모욕하고 죽였어."

'…괜찮아요.'

 

한 명은 미카코의 육체를 범하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그것을 질투하여 그녀를 죽였다.

두명은 힘을 합쳐 미카코의 시신을 땅 속에 몰래 묻어버렸다.

 

류가미네 미카코는, 그걸로 두 번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들을 죽이려는 이자야를 말렸다. 이성이 날아간 이자야가 때마침 돌아온 나스지마를 찔러 죽이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을 때, 미카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던 것이다. 유령이니까, 유령이기에 가능할 수 밖에 없는 의사소통에서 이자야는 그 요구를 무시하고 니에카와와 나스지마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을 부여잡은 채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미카도는 쉽사리 물러나 주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 제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그런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웅웅 울려퍼질 뿐이었다.

 

결국 이자야는 나스지마를 죽이지 못했다. 니에카와 하루나도 죽이지 못했다.

 

그가 한 일은 맛이 간 목소리로 자신에게 덤벼드는 니에카와를 죽도록 후려패 기절시키고 공포에 질린 나스지마를 말그대로 살떨리도록 추궁해 유해를 숨긴 장소를 알아낸 뒤 턱뼈가 빠지도록 걷어차버리고 미카코의 소원대로 유해를 땅 속에서 파헤쳐내어 인근 경찰서로 신고를 넣은 것 뿐이었다. 미카코의 하얀 뼈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반사해서 아름답게 빛났고 이자야는 검은 땅을 꾹꾹 짓밟으며 진흙이 엉겨붙는 물웅덩이를 지나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몸의 기력은 어디론가 빠져나가 있었다. 마음 속에 응어리지고 앙금처럼 가라앉은 단어들은 입으로 내뱉기에는 너무 깊이 가라앉아있었다. 소파에 주저앉은 채 한참동안이나 입을 다물고있던 이자야는… 머릿 속이 너무 뒤섞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미카코는 반투명한 윤곽을 지닌 채 그 자리에 떠올라 있었다.

"…너는."

 

툭 내뱉은 말은 충동에 가까웠다.

 

"자랐더라면, 지금쯤 스무살이 되었겠지."

 

외모는 어땠을까. 아마도 젖살이 빠져서 제법 어른스러워졌을 것이다. 대학을 들어갔다면 이제 2학년쯤 되었으려나. 학과 친구들과 평범하게 수다도 떨고 멋진 선배의 모습에 꺅꺅거리기도 하고 동아리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보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에도 도전해보겠지. 이따금 고등학교때부터의 친구와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교수의 과제나 리포트에 울상을 짓기도 하면서 캠퍼스를 거닐었으리라. 만약 대학을 가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또 어땠을까. 미카코는 성실한 성격이니까 어떤 직장에서라도 환영받는 인재가 되었을 것이다. 애인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짝사랑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너는 좋은 아이니까 분명히 멋진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을거야.

 

미카코는 웃으면서, 때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가도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자야는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무력한 밤은 무서울 정도로 무정하게 흘러갔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오리하라 이자야는 꽃다발을 손에 쥔 채 공동묘지를 방문했다. 손님이 제법 왔다간 모양인지 【류가미네 미카코】라고 쓰여진 묘비에는 꽃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그 꽃다발 속에 자신이 가져온 붉은 장미를 내려놓고, 이자야는 향을 피운 뒤 조용히 합장했다. 묘지의 정적 사이로 바람이 사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합장을 끝낸 이자야는 거리낌없이 비석의 정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카코."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이룬 그녀는 이자야가 뼈를 찾아낸 다음날 새벽에 사라지듯 모습을 감추었다.

…틀림없이 극락이나 천국으로 갔겠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이자야지만 미카코에게 한해서만큼은 분명히 그럴거라고 강력하게 믿고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동일한 시각에 가스폭발로 죽어버린 나스지마나 니에카와도 지옥에 떨어져야만 한다. 미카코가 들으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겠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이자야는 그들을 향해 차가운 비웃음을 날리고는 재차 미카코의 비석을 눈부신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꽃내음과 향의 냄새가 어우러진 미카코의 묘비는 어쩐지 숭고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생각났는데."

 

"미카코, 나랑 입학식때 만났었지."

 

"…잊어버리고 있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이자야는 고개를 숙였다. 만약에 그때 그녀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무언가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비단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그 사건이 일어났었던 그 순간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미카코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유골을 찾아내여 미카코의 생가에 전해준 이후로 이자야의 머릿속을 계속 메우고 있었던 것은 온통 그런 종류의 생각뿐이었다. 후회라고 부르는 편이 더 옳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자야는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그녀가 죽은 사후에 뼈를 되찾아 돌려주었을 뿐이다.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앉아있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리게 묘지의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 끝에는 두 명의 청년이 서있었다. 금발에 노란 스카프를 두른 청년과 흑색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청년. 그들이 미카코가 말했던 키다와 소노하라이리라. 본능적으로 파악한 이자야의 눈 앞까지 다가온 그들은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미카코의 묘비에 꽃을 바치고 나란히 합장했다. 이자야도 딱히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향의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라 깨끗한 하늘을 향해 사라져갔다.

 

"…당신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미카코가 말해주었습니다."

 

목소리를 낸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그래도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지간에, 내뱉어지는 말에 담겨있는 감정은 똑같을 것이다.

 

"우리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준 당신에게는 고마워해야 합니다만…."

 

침묵.

이자야는 약간 눈을 내리깔고 제단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았다.

긴 공백을 깨고 먼저 뒤를 돌아본 것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청년쪽이었다.

 

"오리하라 이자야씨."

"뭐지?"

"저랑 소노하라가 당신을 한대씩 패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그럼 사양않고. 라고 말하자마자 키다의 주먹이 이자야의 배에 꽂혔다. 몸에서 산소가 단숨에 밀려나가는 감각에 이자야가 비틀거리며 약간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뒤돌아있던 소노하라가 빙글 몸을 돌리며 그의 다리를 빠르게 걷어찼다. 무게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이자야가 쿨럭쿨럭 기침을 뱉어내는 동안 키다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이자야씨, 꼴사납네요."

"…………."

"당신에겐 우리가 더 꼴사납게 보이겠죠."

 

청년들은, 첫사랑이었던 소녀를 잃어버리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소년들은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약간의 관심만 있었더라면 소녀를 구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는 남자는 어깨를 떨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미카코는 그렇게 생각 안할걸."

 

이자야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묘비의 꽃들이 서로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

 

햇빛이 하늘하늘 춤추는 꽃밭이었다.

소녀는 그곳을 산들바람처럼 걷고있었다.

뒷편 강가의 모래가 반짝이고 물이 고요히 흘러나갔다.

소녀가 향하는 방향에는 작은 배가 묶인 나룻터가 있었다.

 

너무 늦게 왔다고, 소녀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도착했으니까 다행이라고, 남자가 말했다.

 

소녀는 생긋 웃었다.

남자도 웃었지만 소녀의 그것만큼 밝지는 못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그만큼 명백했다.

 

소녀는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남자도 같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눈물만이 흘러넘쳤다.

하고싶은 말들은 전부 거기에 녹아있었다.

그 눈물에 부딪친 꽃잎들이 흔들리며 속살거렸다.

꽃내음 섞인 속삭임을 들은 소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남자를 끌어안았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남자는 그 말을 의심하는 대신에 믿었다.

의심하기에는 이제 남은 시간이 없었다.

안고있던 팔을 푼 소녀가 서서히 나룻터쪽으로 사라져간다.

남자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어서 제자리에서 소녀의 잔상만을 뒤쫓았다.

 

강 건너편으로 소녀가 탄 배가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졌다.

 

남자는 어느사이엔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라지기 전부터,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재회를 약속하는 손짓은 점점 그 의미를 잃고 허무하게 바뀌어간다.

건너편의 빛이 너무 강해져서, 남자는 눈을 감아버렸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자신은 침대에 누운 채 길게 허공으로 손을 뻗고있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없다.

 

그래도.

 

"…또 보자, 미카코."

 

닿지 않더라도 닿으리라고 믿으며, 오리하라 이자야는 작별을 고했다.

어딘가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