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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게나조(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어쩌면 내일은 말을 걸어줄지도 모르잖아

※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게게의 수수께끼 키타로 탄생
※후세터 글을 약간 손본 버젼입니다
※류가 일족(히노에, 사요, 토조)에 대한 과거 날조 설정이 있습니다
※극장판 스포일러에 주의해주세요





히노에 이모님은 나를 보면 왼손을 들어 살짝 흔든다. 그리고 작게 죽인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건 내 방 문턱일 때도 있고 류가 저택의 복도일 때도 있고 넓은 정원의 어딘가일 때도 있다. 하여간 장소가 어디던 히노에 이모님은 한 번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 손짓과 부름에 따라 재빨리 다가가면 살짝 무릎을 굽힌 이모님이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지금 한가하니?”

한가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한가하다면 나는 히노에 이모를 따라간다. 한가하지 못하다면 이모님은 못내 아쉽다는 얼굴로 일이 끝나면 자기를 찾아오라며 어깨를 토닥여주시곤 멀어졌다. 처음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될 것 같아 찾아가지 않았었는데, 다음날 이모님에게서 왜 오지 않았냐는 물음과 함께 서운하다는 말을 서른 번쯤 들은 뒤로는 꼭꼭 찾아가게 되었다. 

둘째 이모님의 방에는 잡지가 많다. 요리나 여성 잡지도 적잖이 있지만 역시 제일 많은 것은 패션 잡지였다. 커다란 글씨가 잔뜩 있는 표지를 펼치면 한껏 맵시 있게 꾸민 화려한 사람들이 잔뜩 나오는 그런 잡지. 히노에 이모는 그걸 하나하나 펼쳐 보여주며 나에게 올해의 유행이 어떻고 배색이 어떻다는 이야기를 하시길 좋아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마을에선 이런 잡지를 단 한 권도 팔지 않는다. 한 번은 궁금해져서 이걸 어디서 구한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히노에 이모는 다 방법이 있다며 깔깔 웃으실 뿐이었다. 

그 방에 잡지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살짝 빡빡한 감이 있는 옷장 문을 밀어 열면 그 안에는 정말로 어디서 구해왔을지 알 수 없는 여러가지 옷과 장신구가 가득 늘어서 있었다. 히노에 이모님의 말에 의하면 그건 「오랜 시간 공들여 모아온 컬렉션」이었는데 과연 자신만만한 얼굴로 보여주실 만한 것 뿐이었다.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절과 타이밍에 입을 수 있다는 옷과 장신구, 신발들은 아직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한참은 어른스럽고 우아하고 깨끗했다. 도쿄에 대한 말을 처음 제대로 들은 것도 그 옷장을 통해서였다. 히노에 이모님께서 옷가지나 물건을 보여주시면서 ‘지금 도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래.’라고 몇 번이고 말씀해주셨으니까.

“사요, 이거 예쁘지 않니?”

히노에 이모는 자신이 가진 물건의 출처를 알려주기보다는 그 물건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선 아무리 좋은 옷과 예쁜 장신구를 가지고 있어도 한껏 치장하고 다닐 일이 적었다. 그렇다고 저택에 사람 크기 만한 인형을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히노에 이모의 패션 감각은 자연스레 나를 통해 발휘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머리 모양의 경우 패션 잡지에서 보고 익혔다며 이모님께서 손수 이런저런 새로운 형태를 잡아주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방의 경대 앞에 얌전히 앉아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방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풍겨오는 꽃 냄새, 오래된 시계가 똑딱똑딱 움직이는 소리, 창 밖에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그림자를 감각하면서.

“참 고운 머리카락이야. 꾸미는 보람이 있어.”
“이모님은 머리를 기르지 않으시나요?“
“난 벌써 여러가지 해봤지~. 하지만 지금 스타일이 제일 마음에 들어.”

자, 다 됐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장 거울을 바라본다. 그 속의 나는 땋은 머리를 하고 있거나 아직은 이른 듯한 쪽머리를 하고 있거나 영 어색한 묶음 머리를 하고 있거나 한다. 하지만 그건 낯설고 이상하긴 해도 마음 속 깊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경대 거울 속의 내가 어떤 표정일지를 면밀히 살피는 이모님의 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네.”
“역시 사요는 귀여워서 뭐든 어울린다니까.”

날 실컷 꾸미고 나면 히노에 이모는 정원 산책을 가자고 졸랐다. 기껏 예쁘게 꾸몄는데 방에서만 지내다 풀어버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냐는 이유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류가의 정원을 걸어다녔다. 계절마다 새로 피어난 꽃이나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곤 했다. 이따금 산책길 도중에 집안 사람들을 마주쳤다. 어머니는 엄격한 얼굴로 몇 마디를 건네시고는 (가끔 한숨을 쉰 다음) 조용히 떠나가신다. 토조 삼촌은 우리를 발견하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같이 정원을 걸어주셨다. 아버지와는 잘 마주치지 못했지만 언젠가 딱 한 번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크게 웃으며 내 모습을 칭찬해주신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싫지 않았다.
히노에 이모님과 같이 있는 게 싫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이모님은 사라졌다. 평소처럼 헤어졌는데 저택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고용인들이 소곤거리는 걸 엿들어서 「도피」라는 말을 들을 순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님께서도 명확한 말씀이 없으셨다. 고용인들은 내가 다가가려고 하면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이제 가르쳐줄 사람은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나는 토조 삼촌을 찾아갔다. 평소에 비하면 피곤해보이는 안색이던 삼촌께선 내가 던진 질문에 기꺼이 대답해주셨다.

“그건 ‘멀리 떠났다’는 뜻이란다.”
“히노에 이모께서요? 어째서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토조 삼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만약 하더라도 얼굴에 금방 티가 나는 분이다. 그러니까 그게 거짓말이 아니란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히노에 이모는, 이모는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사요.”

고개를 드니 토조 삼촌이 책장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고 계셨다. 

“사실 요전번에 히노에에게서 부탁받았던 책인데….”

(나는 이때서야 그 많던 잡지들이 누구의 협조품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네게 줘야할 것 같구나.”
“…고맙습니다.”

토조 삼촌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잡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지금 이 계절에 도시에서 어떤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마시는 지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히노에 이모는 여길 떠나 수없이 많다는 도시 중 한 곳으로 간 걸까? 그래서 이런 잡지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걸까?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짧은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의자에 앉아 밝게 웃는 사진이 나왔다. 옆에 무언가 적혀있었지만 너무 어려운 발음이라 읽기 어려웠다. 대신 그 사람의 모습을 히노에 이모로 상상해보자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졌다. 금방이라도 종이를 구겨버릴 듯 했다. 나는 잡지를 덮고 옷장 깊숙이 밀어넣었다.

히노에 이모님이 사라지기 얼마 전 우리는 또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류가 정원에는 계절에 맞춰 꽃이 피어나곤 했는데 마침 여름이라 지지대를 타고 열심히 덩굴을 뻗는 나팔꽃이 있었다. 이 중에 덩굴을 하나씩 골라서 어느 쪽 나팔꽃이 먼저 피어나는지 내기할래? 히노에 이모는 무척이나 장난스러운 말투였고 나는 그에 응했다. 오랜 탐색 끝에 정해진 두 줄기가 헷갈리지 않도록 뿌리 부근에 각자의 손수건을 묶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할까? 나는 일말의 불안과 설레임을 느끼며 이모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서로 약속이라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하지만 좀처럼 나팔꽃은 피지 않았다. 분명 봉오리는 맺혀있는데 갈 때마다 꽃이 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왜 피지 않는거지. 이러면 승부가 나지 않는데. 그러는 사이에 이모님은 사라졌고 나팔꽃은 계속해서 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정원에 머무르는 나를 발견한 코조 삼촌께서 살짝 귀띔해주었다. 나팔꽃은 이른 아침에만 피고 그 뒤에는 시들어버린다는 모양이다.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팔꽃이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숨 가쁘게 달려가보니 덩굴을 휘감은 나팔꽃이 아침 공기 속에 확실히 피어있었다. 게다가 내가 고른 줄기가 이모님의 것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순간 기쁜 마음이 치솟았지만 곧바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분명 제대로 땅을 디디고 서있는데도 모든 것이 내 곁에서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기분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멀리 멀리.

이모, 어딨어?

나팔꽃은 머잖아 시들어었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히노에 이모가 돌아왔다. 내가 잠든 사이 저택으로 다시 돌아오셨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무척 기뻐서 어머니가 계신 것도 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릴 뻔 했다. 얼른 이모님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계셨는지는 물론 이모님이 안 계신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빠짐없이 얘기하고 싶었다.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일찌감치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모님은 여독이 풀리지 않아 금방은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만 돌아올 뿐이었다.

“히노에 이모. 사요예요.”

그래서 히노에 이모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넓고 긴 류가 저택의 복도도 미끄러지듯 나아갈 수 있었다. 히노에 이모, 사요예요. 닫힌 장지문 너머에서 그렇게 말을 걸고 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살짝 들떠있었다. 하지만 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자리를 비우신걸까? 하지만 히노에 이모님은 어디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누구야?”
“저에요, 사요예요.”
“아…….”

…….

“…저기.”
“…….”
“어디… 아프신가요?”

장지문 너머의 이모는 아무 말도 없다. 어떡하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 걸까. 지금이라도 고용인을 불러서 이모님을 간병해달라고 알려야 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무언가가 직, 직 끌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다다미 문이 밀어젖혀졌다. 언젠가 느꼈던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듯이 훅 파고들어왔다.

“아프냐구?”

히노에 이모가 있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얼굴에는 붓고 긁힌 흔적이 가득했다. 그걸 가리려고 화장을 한 것 같은데 어느 것도 정돈되어있지 않아서 오싹했다. 입술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도 탁하다. 자세히 보면 방 안의 물건들도 두서없이 파헤쳐지고 엎어져서 엉망진창이라 마치 누군가가 습격한 것 같았는데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는게 기이했다. 이모의 어깨가 아래위로 움직인다. 숨소리가 들린다. 이모님이 웃고있다. 어째서 웃으시는거죠? 웃을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나는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때보이는데?”

이 사람은 누구죠?

“나팔꽃….”
“뭐?”
“나팔꽃… 제 것이 먼저 피었어요….”
“나팔꽃……?”

내가 기다리던 히노에 이모는 어디에 있죠?

“기억 안 나세요?”

우리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거니?”
“…죄송해요. 실례했습니다. 쉬세요.”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히노에 이모의 방문을 떠났다. 최대한 천천히 그 앞을 떠나며 나를 불러세우는 목소리를 기대했다. 왜냐면 나에게는 히노에 이모에게서 받은 리본이 있었고 오늘은 히노에 이모가 어울린다고 해준 머리모양을 했고 (고용인을 불러서 부탁했다) 이 리본은 이모가 특별히 아끼는걸 선물받은 거였으니까….

불러세우는 목소리는 없다.
장지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