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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게나조(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나조]우리는 미련 우리는 그림자 우리는 언젠가 끊어질 잔향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게게의 수수께끼 키타로 탄생
※후세터 글을 약간 손본 버젼입니다
※극장판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페로 들어오는 햇살은 밝다. 공기도 선선하다. 미즈키를 이끌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은 사요는 당신을 생각하니 여기까지 오는 것도 눈 깜박할 새였다며 눈을 빛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사요 씨가 먼 걸음을 오시게 하고 말았네요. 그렇게 말하는 미즈키의 머리카락 색깔은 하얀색이고 때로는 은빛으로 보이고 검은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그런 것 쯤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네, 저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선 주문부터 할까요.

이곳의 종업원은 눈치가 빨라서 살짝 눈짓을 보내기만 해도 잽싸게 다가온다. 가죽에 싸인 직사각형 메뉴판을 펼치면 이 세상의 모든 음식이 죄다 실려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이름들이 펼쳐졌다. 하지만 사요는 몇 날 며칠 전부터 마음을 굳게 먹었던 것 마냥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뻗었다. 메뉴판의 두 번째 장에 실린 초록색 디저트.

「크림 소다」

다른 것도 골라보시죠.
우선은 이게 좋아요!

본인의 뜻이 그렇다고 달랑 소다만 드시게 하자니 이쪽의 죄가 있는지라 마음이 편치 않다. 미즈키는 사요에게서 자신에게로 넘어온 메뉴판을 쭉 훑아보며 눈이 가는 메뉴들을 골라냈다. 소다는 상큼하고 달콤하니 그 맛과 식감이 겹치지 않을 화과자나 마카롱, 마들렌을 주문하는 게 좋겠지. 그 외에도 눈에 보이는 것 몇 가지를 추가로 주문하고 보니 맞은편에 앉은 사요가 왠지 무거운 표정이 짓고있다. 너무 과해서 도리어 좋지 않았던 걸까.

미즈키 씨.
네.
저 사실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도 궁금해요!
딸기 케이크, 치즈 케이크 하나씩이랑 커피 한 잔도 추가해주세요.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곤 멀어진다. 가게 내부는 자리마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고 있어 남들에게 이야기가 들릴 염려도 없었다. 다만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끼리는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무슨 얘기부터 꺼내면 좋을지 헤매게 되는 시간이 있다. 덕분에 어색한 침묵이 살짝 감도는 가운데, 미즈키는 무의식적으로 품에 넣으려던 손을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예의가 아니다.

…저, 무척 기뻐요.
저도 사요 씨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서, 기쁩니다.

다행히 (이렇게 말해도 될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요 쪽이었다. 침묵을 깨는 막중한 역할을 상대에게 맡겼으니 이쪽은 성실하게 듣고 답할 의무가 생긴다. 그래서 미즈키는 어떤 대화에든 응할 요량으로 테이블에 팔을 괴고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사요는 기모노를 입고 리본을 맨, 기억 속의 그 모습인 채로.

네, 무엇보다 미즈키 씨가 저를 이렇게 기억해주셔서.
…….
그것이 정말 기뻐요.

시계소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안개 속 형체처럼 뭉개져있어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오고가면 들릴 법한 종소리도 필사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버릴 정도로 작았다. 그래서 그 무엇도 미즈키의 주의를 분산시키지 못한다. 닫혀있던 수문이 열리듯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감정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발치가 젖어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슬프다"고 표현할 감각들.

사요 씨, 저는.

찰랑찰랑, 찰랑찰랑.

저는.

찰랑찰랑….

“죄송합니다.”

미즈키 ■■■■ (이것은 그의 이름 음절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쟁터에서 시체가 아니라 생존자로 분류되어 돌아왔고 그 댓가로 몇 가지 삶의 태도를 취득당했다. 하나는 자신의 감정보다 머리로 인식한 행동을 우선하는 것, 또 하나는 눈 앞의 지옥에 투명한 막을 치고 필사적으로 제 마음의 형태를 지키는 것. 마지막 하나는

"저는 당신을 기만했습니다."

강자를 끝없이 선망하고 선망하고 또 갈망하는 것.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당연하잖아. 전쟁터 한가운데든 어느 나라의 중심이든 결국 세계의 골자는 바뀌지 않아.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이용당해서 버려질 뿐. 조금도 변하지 않아. 꿈쩍도 하지 않아. 그렇다면 나도 힘을 손에 넣겠어.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하겠어. 남에게 내버려지기 전에 먼저 모든 걸 빨아먹어주겠어. 그래야만 진실로 바라는 일을 할 수 있어. 무엇이든 그게 우선이야. 힘이 필요해. 권력이 필요해. 돈이 필요해. 모든 것을 내려다볼 정도의 지위가 필요해. 그걸 위해서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살아남는다는 건 어떤 의미지? 그저 살아서 이 땅에 발을 딛고 숨을 쉰다는 의미만은 아니겠지. 그럼 무엇을 원하는 거야? 가장 높은 자리에서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밟고 올라서고 내다 버린 이들의 시신이 즐비하면 좋겠어? 그 사람들의 피냄새와 눈물 짓는 소리와 울음 소리를 꾹 압축해서 만들어낸 것들을 입고 먹고 즐기면서 벚꽃이라도 구경하듯이 살고 싶은거야?

그렇다면 가끔은 그들이 우리를 위해 기쁘게 죽는 모습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본 당신은 푸른 불꽃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습니다."

다정한 마음으로 용서 받는 꿈을 꾸겠지.

"그런데도 이렇게나 평온한 당신을 보려고 해."

자리 앞에는 사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요의 모습을 하고 있던 자가 없었다.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은 옷도 머리카락 색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새까맣게 불탄 뼈의 형태뿐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윤곽이 부드러운 햇살 아래 굳건했다. 미즈키는 그 모습에서 차마 눈을 돌리지도 못한다. 여전히 주변의 소리는 멀고 빛은 다만 따스하고 죄악감은 가장 끔찍한 형태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당신의 모습을, 마음을, 언어를 멋대로 지어내서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겁니다."

엄정한 칼날이 미즈키의 마음을 베어낸다.

"진짜 당신과는 이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데…."

아마도 그리움과 비슷한 온도로.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건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그 사람이 자신 때문에 깊이 상처 입은 사람이라면 또 얼마나 볼품없어지는가. 수없이 많은 밤을 같은 생각으로 지새운 남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번지고 경계가 흐려진다. 얼마 되지 않는 점막이 부어올라 주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샘솟지만, 사실 그 마음은 이미 흥건하다. 발치를 적시고 모든 걸 삼킬 듯 일렁이는 이 물결처럼.

"미즈키 씨."

그 수면에 유리구슬 같은 목소리가 퐁당.

"그 말씀대로에요."

톡 가라앉아, 물 속에서 데구르르 굴러간다.

"류가 사요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방향으로 한없이.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있는 저는 대체 무엇일까요?"

난데없이 카페에 차오른 물결에 대해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아무도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찾아오지 않는다. 당신들의 일은 당신들만의 일이라는 것처럼, 사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단지 당신의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정교한 거울상일 뿐일까요?"

허면 여기는 지옥인가.
거울과 거울이 마주 놓인 채, 그 누구도 상대의 진정한 마음에는 닿지 못하는 지옥.

"그렇다면 제 앞에 있는 당신도 제 마음을 통해 만들어진 모방일지 몰라요."

이 말이 정답일까. 아니, 정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미즈키는 어렴풋한 감각으로 사요의 말을 주워섬기며 납득했다. 아아, 분명히 그런 거겠지. 나에게는 평온이나 안식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애초에 이기적이고 뻔뻔한 놈이니까. 그러니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어 잠시나마 꿈을 꾼 거겠지. 자기 형편에 알맞은 꿈을, 안식을 맛보기에 적절한 풍경을.

─당신이 평온히 웃는 모습을.

"미즈키 씨."
"네."
"저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
"류가 일족의 일원이 아닌, 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어요."
"……."
"당신은 어땠나요?"
"저는…."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었나요?"


당신을.

당신을.

단 한번도 버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맹세컨데 없었다. 정말로, 그 손을 잡고 터널 끝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터널을 한참 걸어나와 보이는 것이 들어온 방향과 마찬가지로 녹음이 질릴 정도로 우거진 산 속이라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터널을 빠져나오고도 또 한참을 걸은 뒤에야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을 테고 거친 길을 걷느라 땀에 푹 젖고 다리가 뻣뻣해졌을테지. 먼지투성이 기모노와 구겨진 정장을 입고 기차에 몸을 실은 모습은 또 얼마나 이질적이었을까. 그럼에도 도쿄에 도착한 당신의 얼굴에 바람이 닿았을 것이고.

꿈은 항상 그 즈음에서 깨졌다.
감히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없었던 탓이다.

"…저는 그저 살고 싶었습니다."

거친 한숨은 회한을 짙게 머금어서 늘 숨통에 무겁게 고이곤 했다. 그 숨결이 언어의 형태를 얻어 흘러나왔다. 우습게도 그럴 때마다 눈 앞의 습기 찬 막이 조금씩 걷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른 손끝을 들어 눈을 비빈다. 뭉툭해져있던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힘과 권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얻으셨나요?"
"아뇨, 그걸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는지 알아버렸으니까요." 
"……."
"하지만 저는 그걸 잊어버렸습니다."

연못에 던져진 돌 하나가 잊혀지는 것처럼 쉽게.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이루지 못한 일을 꿈꾸기만 했을 뿐입니다."
"매정하시네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를 이렇게 데려와주신 건 깨끗이 무시하는 건가요?"

미즈키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검은 머리카락을 잘 빗어올리고 리본으로 묶은 사요가 있다.

"제가 미즈키님을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미즈키님이 저를 기억해주신 덕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이건."

편리한 망상. 마지막으로 꾸는 어리광일지도 모르는 풍경.


"그렇다면 하다못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사요 씨."
"저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는 거겠죠?"

그 한 마디에 세계가 당연하다는 듯이 온기를 되찾는다. 미즈키는 사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감정의 형태를 목격하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던 자유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면 거절하고 자리를 떠나버릴 수 있는 것.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나아가는 것. 때로는 울고 시무룩해져도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간다.

자신의 마음이 바라는대로.

"그렇다면 이게 꿈이라 해도 좋고, 서로가 환상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작은 아가씨의 갈색 눈이 슬픔을 머금은 채 반짝반짝 빛난다.
오래도록 강 속을 헤매이다 기슭으로 굴러온 둥근 자갈같았다.

"저희, 이번에야말로 하고싶었던 일을 잔뜩 하기로 해요!"

자리에 크림 소다가 놓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

어느 비오는 날엔 사요가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즈키는 그걸 뜯어말리는 대신 함께 나구라 마을을 찾아갔다. 차마 남은 이들과 얼굴을 마주할 체면은 없는지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노라면 짙은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내려왔다. 이 빛은 저 어두운 수직동굴을 타고 지하로 똑바로 내려가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아래의 그들도 이 빛을 받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하얗고 눈부시고, 무엇이든 비춰내며 지켜볼 이 햇빛을.

"미즈키 아저씨다!"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미즈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가벼운 충격, 무게감. 흥분이 섞인 웃음소리. 그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이미 이 정도 키를 가진 아이를 안아본 경험이 있는 덕이다.

"오랫만이구나, 토키야."
"응! 혹시 사요 누나랑 같이 날 기다려준 거에요?"
"그래."

옛날 그대로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작은 눈동자가 어리둥절하게 깜박였다.

"토키야에게도 도쿄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거든."
"도쿄!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어떤 곳이에요?"
"크림 소다가 엄청 맛있어!"

곁으로 다가온 사요가 장난스레 속삭인다. 크리무 소다? 라고 되묻는 토키야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가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같이 갈래?"
"응!"

토키야가 환하게 웃는다. 사요가 그럼 어서 가자며 작은 손을 잡고 무작정 앞으로 이끌었다. 너무 서둘러서 가면 넘어져요. 미즈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른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 마지막 원한도 자취를 감춘 섬에서 불우하게 스러진 두 아이가 미끄러지듯 풀밭 위를 달려갔다.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휘날리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새처럼.

그 모습이 결국은 하나의 대답으로 이어진다.

─보여, 게게로.

전부 보여. 전부 보이고 있어.
이 두 눈으로도 벅차게 느껴질 정도야.

앞서 가던 두 사람이 저 끝에서 누군가를 만나 뒤를 돌아보곤 손짓한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훤칠한 키의 청년이 두 사람의 뒤편에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보였다. 안경을 쓴 모습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코조 씨도 여기에 계셨군요. 남아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미즈키는 그를 마주하며 건넬 말을 떠올리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안배된 피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지 않아 적당하고 그림자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