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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게나조(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나조]또 봅시다 다시 만납시다 당신 이름조차 잊고서

※게게게의 키타로 극장판 게게게의 수수께끼 키타로 탄생

※후세터 글을 약간 손본 버젼입니다
※극장판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즈키 씨,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제국 혈액은행은 기본적으로 공기가 탁하다. 어딘가의 전자기기 관련 회사에서는 늘 깨끗한 공기가 흐른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본 적이 없으니 그냥 그렇다는 소문만 흘러갈 뿐이었다. 은행 접수대에는 사람들의 속삭임과 한숨과 비릿한 냄새와 알코올 향기. 영업부 사무실에는 낮은 불평과 혀를 차는 소리와 회색 천장에서 천천히 뭉글대는 담배 연기가 가득하니 여기선 어딜 가든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미즈키는 이따금 사고에 틈이 생길 때면 입에 물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되뇌인다. 어쩔 수 없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니까. 여긴 도시잖아. 게다가 요즘 같은 계절엔 창문을 열어도 뜨거운 바람만 들어오니 누구도 환기를 하려고 하지 않아….

“정말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은행 건물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탁 트인 건물 앞에 서서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는데. 미즈키는 입술을 열었다가, 무감각한 공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가, 잠깐의 공백을 메울만한 적당한 말을 떠올렸다. 영업사원으로 오래 살아오다보면 싫든 좋든 이런 기술에 도가 트는 법이다.

“아닙니다. 저는… 딱히 감사받을 정도의 일은 하지 않았어요.”

어떤 상황에서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유용한 처세술이 된다. 실제로도 그 말 외에 건넬 수 있는 알맹이가 없었다. 미즈키는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넸던 여성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본다. 제국 혈액은행에서는 여직원들에게 머리를 한데 묶고 다닐 것을 지시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일은 없었다. 더운 여름 바람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마에는 땀에 젖은 앞머리가 붙어있었다. 여름은 해가 느리게 지기에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저무는 빛덩어리가 하늘을 하염없이 물들여가고.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그 모든 걸 바라보는 한 남자가 어떤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건… 그래도, 결국 이렇게 퇴사하시게 되었고….”
“어차피 퇴사하기로 얘기가 끝난 상황이었는걸요.”
“하지만….”
“미즈키 씨 덕분에 여기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머리 어딘가가 부러져 나간다. 이어지는 감각은 비틀린 혈관이 끊어져 피를 쏟아내는 것에 가까웠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지, 정신적 공백을 맞이하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어야 할 미즈키의 입술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날렵하게 움직였다. 파편처럼 조각나있던 정보들이 번뜩번뜩 이어져 대화의 씨줄날줄을 엮어나간다. 빙글빙글 집을 만드는 거미처럼, 뱅글뱅글 같은 자리를 오가는 장난감 기차처럼.

그러고보면 결혼식은 가을에 올릴 예정이시던가요. 네, 가능하다면 좀 더 일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결혼을 준비하다보니 직장을 계속 다닐 수가 없어서요. 하기사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을 무렵에는 새 신부가 되신 모습을 보게 되겠군요. 맞아요, 괜찮으시다면 꼭 자리에 참석해주세요. 물론이죠, 기꺼이, 얼마든지, 바라시는대로.

정신이 들고 보면 하늘이 어둡다. 여기저기 켜진 사무실의 전등불이 너무 가까이 밀어닥쳐버린 별빛처럼 돌바닥 위에 형태를 남겼다. 날벌레 몇 마리가 허공을 날아간다. 날아가다가 가로등에 부딪쳐 퍼득거린다. 어떤 것은 미즈키의 귓가에서 시끄럽게 날개짓 소리를 냈다. 사람이 그걸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즈키는 손을 들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후려친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뺨이었다.

*

근데 왜 그랬어? 누군가가 묻는다. 미즈키는 아직 머리가 개운하지 못해서 뭐가? 라고 되물었다. 상대방은 히죽히죽 웃는다 싶더니 낮게 속삭여왔다. 시치미 떼기는. 영업 3팀 사토 씨 말이야. 미즈키는 그 발음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입으로 한 번 소리 내어 말해본다. 사토 씨.

“마지막 회식이라고 부장이 실컷 만져보려 하던걸 훼방놨잖아.”
“그건… 어쩌다보니 실수했을 뿐이야.”
“정말로?“
“다음날 부장님에게 죽도록 사죄드려야 했다고. 못 봤어?”
“그치만 너, 부장님이 기분 상해서 돌아가신 뒤에 살짝 안도한 표정이었다던데.”

….

“혹시 좋아했어?”

…….

“그랬다면 아쉽네,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었잖아. 언제부터 좋아한거야?”

…….

*

당연히 그런 적은 없다.

*

미즈키는 꿈을 꾼다. 그야 당연하지. 미즈키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다 보면 꿈을 꾸는 법이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바다에선 맥락과 정합을 보란 듯이 따돌린 풍경들이 쉴 새 없이 파도쳤다. 어느 물결에선 남방의 습기 찬 공기가 덮쳐온다. 어느 바람에선 화약과 피와 고름 냄새가 떠돌았다. 어떤 방향에선 불탄 나무와 울음소리와 황량한 풍경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이 모든 결들은 어느 방향에서 오는 것이건 간에 낯설지가 않다. 낯익은 촉감으로 다가와, 심장을 찢는 추억들. (추억이라) 헌데 어떤 향은 매우 낯설었다. 그 향은 서늘하다. 서늘하고 습하고, 녹슬었고, 아프고, 슬프고, 무력하고, 희끄무레하고.

─숨쉬기가 힘들다.

목을 졸리고 있다. 아마도 그런 탓이다. 헌데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남방에서 우리를 지휘했던 지휘관? 포탄에 맞아 죽어가던 걸 금방 편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던 동료? 우리의 공격에 상처입고 죽었던 사람들? 어머니를 속여 남은 돈을 갈취해간 친척? 손톱조각이라도 좋으니 제발 먹을 걸 달라고 매달리던 어린 아이? 나에게 징병에 대해 언급했던? 마지막 약속조차 지켜주지 못했던? 내가 배신한? 잊어버린? 어쩌면 잊어선 안되었던? 이제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는? 끝나버린?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이 이상 할 말은 없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건 미즈키는 자신이 이 손길을 (그렇다, 맨손이다)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작은 손인데, 가늘고 하얀 팔인데. 자신에 비하면 너무나 연약하고 힘없는 자일텐데.

하지만, 분명.
저항해서는 안된다.

그런거지?

얄궂게도 꿈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꿈결의 바다에서 난폭하게 밀려나와 이불 속으로 내던져진 미즈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어떤 결말을 납득했던 심장이 느닷없이 달라붙은 생의 감촉에 질겁하듯 고동쳤다. 숨을 들이쉬어본다. 부드럽게 잘 들어온다. 기침을 해본다. 목은 살짝 건조했지만 제 생각대로 움직였다. 어릿한 꿈의 감각은 이제 질렸다는 듯 훌쩍 물러나서 멀어져간다. 미즈키는 그걸 뒤쫓으려 하는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에 깔아둔 이불 속의 어린 아이는 깊이 잠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어서 밖으로 나온다. 바깥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둔하게 움직이는 머리로 미즈키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걸 떠올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괜시리 일찍 깨어났군. 담배라도 피우다 들어갈까... 하지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왜일까. 미즈키는 손을 움직여 제 뺨과 턱을 쓰다듬어 보았다. 생각한다. 미지근한 여름 새벽 속에서 누가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부지런한 상인 아니면 야밤을 틈타 움직이는 도둑이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담배 연기가 방에 들어갈지도 몰라.

미즈키는 그걸로 납득하기로 한다. 순간 익숙한 감각이 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순간에 불과했다. 도심지에 가깝기에 좀처럼 별이 보이지 않고 한때는 석양빛으로 가득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 두터운 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

“오래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배웅 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살펴들어가십시오.”
“네, 그럼 안녕히さよなら.”
“…또 뵙지요またいつか.”

*

비가 오려나.
기왕이면 불길을 꺼뜨릴듯이 세차게 내려주면 좋겠군.


미즈키는 아무런 불길도 피우지 않은 채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물론, 아무런 속죄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