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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탐정의 왕

어떤 식인탐정의 비망록

 

언제 완성한 초고인지도 모르겠는데, 문득 생각나서 간단하게 다듬어 올립니다.

사랑했다 얘들아...

 

EX루트의 스포일러 들어간 연성입니다. 사실 설정도 좀 가물가물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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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요. 오는 길이 춥지는 않았나요? 점심 무렵부터 난방을 넣어두긴 했는데, 워낙에 시설이 시원찮아서… 대신 이 담요라도 덮고 있으면 나을 거에요. 커피도 한 잔 드릴까요? 맛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몸을 데우기엔 충분해요. 안되면 녹차 티백이라도… 커피면 충분하다구요. 좋아요.

 

이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는 것은 오랫만이네요. 탐정이란건 잘되면 손님이 끊이질 않지만 반대로 기세가 꺽이면 거짓말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직업이니까요. 세상에 범죄자가 별처럼 무수히 흩뿌려진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탐정협회에 정식으로 소속된 탐정은 아직까지 4천명 남짓.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자질구레한 세력을 합친다 해도 범죄자들의 머릿수와 대등해지기는 힘들어요. 영원히 역전될 수 없는 부등식 같은 거죠.

 

아아, 현직 탐정분 앞에서 괜한 말을 했네요. 오랫만에 말동무를 할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자제심을 좀 잃었나봐요. 기분 나쁜 말이었죠? …괜찮다구요? 소문만큼이나 특이한 사람이군요.

 

물론 알고말고요. 지금은 손님 하나 없는 탐정 사무소라 해도 건물관리비 고지서와 탐정 협회 정기 간행물만큼은 꼬박꼬박 날아온답니다. 이래저래 주워 듣는 소문도 있구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이 연락을 취해온 건 꽤 놀라웠어요. 이런 낡은 탐정 사무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것도 이미 오래 전에 실종된 소장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하니, 퍽이나 별난 사람이다 싶었죠.

 

커피는 어때요? 다 마셨나요? 필요하다면 더 따라 마시세요. 설탕도 크림도 맘껏 넣어요. 좋은 보온병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갓 끓인 것처럼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답니다. 화장실은 방금 들어왔던 입구로 나가 오른쪽으로 쭉 가면 나오니 사양말고 이용하세요. 가끔 말을 꺼내지 못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분들이 있었거든요. 거리가 머니까 소음에 대한 걱정도 접어두세요.

 

서론이 길었군요. 미안해요.

 

「악식탐정」 여운결은 이 탐정 사무소를 이끌던 소장님이에요. 악식惡食이란 호칭이 붙은건 그의 별난 추리방식 때문이었죠. 그 사람은 언제나 범행과 관련된 무언가를 「먹는」 것으로 추리를 시작했으니까요. 범행현장의 흙, 피해자의 옷감, 부서진 차량의 파편. 위험하니까 다들 몇 번이고 말렸는데도 기어코 씹어삼키셨어요. 그런 식으로 범행 흔적의 일부를 섭취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건을 추리해내는 사람이었죠. 반대로 그런 섭취가 없으면 사건을 조금도 유추해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범행 현장에 남은 것들은 죄다 증거품이잖아요? 그래서 경찰은 물론이요 같은 탐정들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존재였어요. 더 없이 중요한 증거를 뱃속으로 밀어넣는 꼴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하지만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추리방식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나의 위장은 증거를 보관하고, 나의 혀는 증거를 읽어내고, 나의 머리는 증거를 분석한다."는 말을 언제나 입에 달고 다녔죠. 주변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든지간에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악식」이라는 호칭 때문에 터무니 없는 소문이 나돌 때에도 의연하기만 했죠. "악식 탐정은 필요하다면 피해자의 일부조차 먹어버릴 것이다." 네, 그런 내용이었어요.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죠. 여운결 탐정님은 피해자의 목걸이를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피해자의 손가락을 먹진 않았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소문에 달라붙는 것을 좋아하지요. 소장님은 집안 사정 때문에 화요일에는 반드시 사무실을 쉬었는데, 그걸 두고 본인의 은밀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냥감을 찾는게 아니냐면서 무책임하게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장난삼아 한 번 내뱉는 말이었지만 그 표적이 되는 입장에서는 장난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런데도 소장님은 늘 웃음 한 번으로 그 모든 의혹들을 뿌리쳐버렸습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범죄를 규명하는 것이지 속좁은 인간들의 비위나 맞춰주는 일이 아니다.' 라면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끝도 없는 헛소문에 가려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식인 운운하던 사람들도 조금만 생각을 한다면 자기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바보같은지 알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생각을 가다듬지 않았고… 여운결 탐정님은 어느 날 '멀리 있는 지인이 사건에 휘말려 도와주러 가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탐정이라는 일이 지니는 특성상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일은 다반수였지만 떠나시는 끝까지 목적지를 알려주시지 않은 것은 조금 의외였지요. 하지만 여운결 탐정님이 어딘가에서 쉬고싶어하시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저는 정확한 목적지를 묻지 않고 그냥 보내드렸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해요.

 

벌써 4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소장님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수색을 의뢰한 경찰이나 탐정들도 도저히 흔적을 추적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을 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봐도 전원이 꺼져있다는 메세지만 나옵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한다면 본래의 신분을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계신가보다 하는 생각이라도 할텐데 전원이 꺼져있다고만 하니 조금 오싹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어딘가의 거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후련하게 걸어가는 그 분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 상상에 불현듯 짙은 그림자가 끼기도 해요.

 

이런, 우울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저를 위해 일부러 손수건을 내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군요. 언젠가 소장님도 저에게 이렇게 손수건을 건네주셨던 일이 있었어요. 당시 사귀고있던 애인에게 호되게 차이고 펑펑 울었을 때라 창피해서 기억에서 지워버렸었는데 당신을 마주하고 있자니 갑자기 떠오르네요.

 

……저기, 오늘 처음 보는 사이에 다소 터무니 없는 소리 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당신을 보자니, 어쩐지 소장님이 그 자리에 앉아계신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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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방랑탐정」이라고 해도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 결혼식을 세 달 남긴 시점에서 갑자기 실종이라니! 그게 너무 너무 분해서 마주치면 반드시 뺨을 날려주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사이 벌써 2년은 지나버렸어. 그나마 봐줄만한건 얼굴뿐인 사람이었는데 이래서야 얼굴은 커녕 목소리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라니까. 유달리 사진 찍히는걸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제대로 남은 사진도 한 장 없는데…. 그거 때문에 결혼식 때에는 몸을 줄로 묶어서라도 기념사진을 찍을거라고 으름장을 놨었는데, 설마하니 그것 때문에 도망간 건 아닐거 아냐! …아니, 차라리 그걸로 도망간 거라면 사진촬영이고 뭐고 다 취소할테니까 그냥 돌아오라고만 말하고 싶어. 둘이서 소꿉놀이마냥 반지를 교환하기만 해도 좋으니까 제발 좀 돌아와줬으면….

 

…위로해줘서 고마워. 좀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 사람도 당신처럼 누굴 위로하는걸 엄청나게 못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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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라는 말에 점 하나를 찍으면 궁지가 되지요.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완벽주의를 고수하던 「무결탐정」 스승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오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라지셨을 때는 놀라긴 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마음이었지요. 너무 올곧은 나무는 비바람이 불 때 뚝 꺾여버리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머지 않아 마음을 추스리시고 돌아오리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상처가 깊으셨던 모양입니다. 공공연히 골칫덩이 수제자라고 칭하던 저에게조차 장장 3년간 아무 연락도 주시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 일을 2년 동안 기억할 사람은 없을테고, 사실 그냥 웃어 넘겨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당최 뵐 수가 없으니….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분을 믿고 있어요.

 

이건 좀 딴 얘기지만, 당신도 스승님처럼 대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일까요? 당신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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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탐정」이라 불리던 동생은 언제 어느때라도 신중하게 행동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사건 해결을 위해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 거기서 연락이 잘 닿을지 어떨지 알 수 없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적잖이 당황했죠. 평소의 동생다운 행동이 아니었으니까요. 하다못해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말해달라고 하니 동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배를 타고 떠난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럼 국내의 섬이나 해외로 가는 걸까 싶어 캐물으려 했지만 시간이 없다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이것도 평소의 동생의 태도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의 단서였습니다. 그때 직장이고 뭐고 바로 뛰쳐나와 동생의 곁으로 달려갔었어야 했는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동생의 머리카락 한 올 찾지 못했습니다. 이쯤되니 경찰이니 탐정이니 하는 작자들에게 깊은 불신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그쪽 인간들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지가 몇 년 됐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을 만난 이유가 뭐냐구요? 뭐,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말씀드리죠.

 

당신의 말투, 약간이지만 동생이랑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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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런 제자가 어디있겠느냔 말이야! 제 스승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고 쏠랑 사라져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꼬락서니라니! 나 젊었을 때 같았으면 아주 상상도 못할 일이야!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실수니 헛걸음질에 일일이 끙끙 앓는 「소심탐정」이란 놈이 무슨 베짱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딴에는 이래저래 시간이 지나면 언제 돌아가더라도 내가 반겨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주 잘못 짚었어! 돌아오기만 하면 아주 머리털이 쭈뼛 서다 못해 줄행랑을 칠 정도로 혼쭐을 내줄게야!

 

자네도 말야! 약간 소심한 얼굴을 하고있는게 딱 그놈하고 판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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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이죠, 절대 탐정이 되지 말라는 게 입버릇이었어요. 차라리 공무원이 되는 편에 백배 천배 낫다고 하셨죠. 그런데도 탐정일을 그만두지 못하셨어요. 괴로운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으셨던 거에요. 과거에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쌓은 경험들을 그렇게 활용하셨어요. 특히나 저희 집은 아버지가 불행한 사고로 돌아가셔서, 범인도 잡지 못했거든요. 언젠가는 진범을 찾아내서 사과를 듣고싶다. 그것 또한 엄마의 입버릇이었어요.

 

네, 사라지신 지는 반 년째에요. 친구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주고 올게. 새벽녘에 도착한 그 메세지가 마지막이었어요. 부재중 통화는 3건 정도 남아있었죠. 그때 깨어있었더라면 엄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엄마도, 그런 말을 자주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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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 탐정님."

"뭐냐."

"「당신은 당신이 먹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You are what you eat」고 하죠."

"착각하지 마라."

"네?"

 

"인간의 세포는 평균 35일 정도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 지금의 너는 한 달 전의 너와는 구성 성분이 달라."

"구성 성분이라니, 사람을 무슨 통조림 마냥…."

"그 고성에서, 너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해서, 너만의 답을 얻었지. 틀린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

"네가 먹은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거다."

 

"알아들었으면, 점심 앞에 놓고 청승 떠는 짓은 적당히 그만두도록."

 

테이블에 놓인 음식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른다.

서태혁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음식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