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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탐정의 왕

[도희태혁]흩어진 연기처럼 붙잡을 수 없는 것

-본편 챕터2 네타 및 EX네타 포함.

-DLC네타 미포함(왜냐면 아이폰에 아직도 DLC가 안 들어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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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좋아해요.“

 

아무도 없는 방. 소년이 붉은 뺨으로 조심스레 고백해왔을 때 공도희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봐 권씨, 조정을 이따위로 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아니면 설마 이러는 것도 당신 설계 안에 있었어?

 

“도희 형…?”

 

순진하고 유약하고, 남의 말에 휘둘리기만 하는 소년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한다. 이번 회차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남이 무슨 말만 하면 깜짝 놀라 허둥거리는 주제에 자신의 곁에서만큼은 떠나려 하지 않는게 뭔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공도희는 일단 내키는 대로 실컷 웃은 뒤 소년의 얼굴에 비수를 던졌다.

 

“더럽네.”

“네…?”

“더럽다고. 나 좋아한다며? 친한 형으로서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닐테고, 그럼 나랑 여기서 자고 싶다는 거 아냐.”

“…저, 저는, 그런 건…”

“그런 거 아니라고? 야, 이거 내숭 부리는 게 보통이 아니네. 그럼 나에게 고백해서 뭐 어쩔 셈이었는데? 마음을 전한 걸로도 만족해요, 앞으로는 만나지 않을게요. 뭐 이런 거냐?”

“아니에요! 저는, 전… 앞으로도 도희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허허, 꿈이 크시네. 아니면 머리가 모자란 건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비수를 피하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년의 턱을 잡아올린다. 긴장한 탓인지 땀이 배어있는 피부는 차갑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갈색 눈동자에는 슬슬 물기가 차오르려하고 있었다. 여기서 단번에 끊어두지 않으면 상대가 울면서 매달리는 귀찮게 짝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공도희는 오직 그 상황을 피할 요량으로 마지막 비수를 뽑아들었다.

 

“난 남자랑 사귀는 취미 없어. 병신아.”

“…….”

“인심 써서 형이라고 부르게 해줬더니… 넌 동정이랑 애정도 분간 못하냐? 아, 하긴 기억이 없으니 분간할 수 있을 리가 없지.”

“…….”

“그래도 적당히 해라. 이제까진 불쌍해서 봐줬지만 앞으론 내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기분이 굉장히 더러워질 테니까. 난 너랑 달리 기분이 나빠지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위험한 남자거든?”

“…도희 형….”

“아, 그리고 그 호칭도 금지. 앞으론 공도희 탐정님, 이라고 공손하게, 아니지. 아예 나 부르지도 마라. 기분 더러우니까.”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있을 리도 없다. 공도희가 문을 닫으려던 순간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가 하나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건 공도희의 관심을 완전히 벗어난 소리였다. 소년이 자신에게 고백을 한 바로 그 순간부터 공도희의 관심은 D나 권세일이 이걸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에 쏠려있었으니까. 같잖지도 않은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각 탐정의 방에 설치된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관찰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지금 소년의 방에서 있었던 일은 자신과 소년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걸 D의 앞에서, 혹은 그 잘난 권세일에게 폭로해준다면 그 잘나신 양반들은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 이거… 짜릿짜릿하구만.”

 

답답한 작업복을 벗고 한 차례 샤워를 한 뒤, 고고하신 분들의 허를 찌를 대사를 머릿 속으로 이리저리 굴려보며 물기를 닦아내던 공도희는 문득 옆방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치 의자를 벽에 내던지는 듯한 소리였다. 평소에는 얌전하니 남 눈치 보기 바쁘더니 실연의 충격에 빡 돌아버릴 정도의 깡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어디 험악한 고함이라도 지르려나 싶어 기다려보던 공도희였지만, 맞은편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근성이 없는 놈 같으니. 가볍게 혀를 차며 자기 일에 집중하려던 공도희는 문득 한쪽 벽에 치워놓은 밧줄을 발견하고 생각을 멈췄다. 강도는, 꽤나 튼튼할 것이다.

 

“설마.”

 

벽 건너편의 침묵은 불온한 침묵이 되었다. 급한 대로 제 손에 잡히는 몽키 스패너 하나를 쥐고 밖으로 나간 공도희가 소년의 방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문 너머는 묵묵부답이었다. 안지아를 불러와야할까 싶어 주변을 돌아보다 급한 대로 문 손잡이를 돌려보던 공도희는 순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리는 손잡이의 감촉에 당혹하여 멈춰섰다. 어쩌면 자신의 예상은 공연한 것이고, 소년은 벽에 의자를 내동댕이친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이 쇠해 늘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에 공연히 자신이 또 끼어들어간다면 일이 성가셔질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안지아를 따로 불러와서….

 

…끄윽.

 

…공도희는 사기꾼 탐정이라 자처하는 몸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람이 숨이 넘어가도록 우는 소리와 정말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방 안에서 들려온 소리로 판단한다면 지금은 안지아를 찾으러 갈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공도희는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텅 빈 방을 눈으로 훑으며 반쯤 열려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샤워 시트를 걸어두기 위해 설치한 천장의 고리에 용케도 밧줄을 건 소년은 그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자기 목을 긁어대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오…. 이 어이없는 새끼가 진짜!”

 

벽 째로 부숴진 고리가 추락하는 것과 소년의 몸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욕조에 등을 기댄 채 밧줄에 휘감긴 철제 파이프를 꼬리처럼 매달고 콜록거리는 소년의 뺨을 몇 번 후려치는 것으로 그의 의식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공도희는 나직한 욕지거리를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뜻밖의 운동으로 몸에 들어찬 열기가 불쾌했다.

 

“야.”

 

경황 중에 벗지도 않고 들어온 신발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건드린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울어댄 건지 눈가가 부을대로 부어오른 소년이 개처럼 숨을 헐떡이며 이쪽을 응시했다.

 

“차였다고 목매달 정도로 내가 좋냐?”

 

소년은 먼저 눈물로 대답했다.

뒤를 이은 것은 밧줄에 목이 졸린 탓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였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요.

죄송해요 도희 형….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되는, 그러나 허약하고 처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타일 벽에 부딪쳐 웅웅거린다. 발갛게 부은 눈을 하고 널부러진 소년은 이대로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가늘고, 연약하고….

 

아, 빌어먹을.

 

속에서 열기와 뒤섞인 뭔가가 소용돌이친다. 공연히 턱을 매만지던 공도희는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소년을 목에 걸린 밧줄 째로 붙잡아 끌어올리며 물었다.

 

“너,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냐?”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던 눈이 신을 마주한 광신도처럼 반짝이고 창백하던 뺨에 혈색이 돈다. 그 권세일도 사랑에 빠지면 이런 얼굴을 하는 건가. 이거 진짜 기분 더럽구만. 고통에 일그러져있던 입술을 기쁨으로 덧그린 소년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뭐든지 하겠노라고 맹세하는 동안 공도희가 생각한 것은 그것 뿐 이었다.

 

=

 

“익센트릭. 이건 예상 외였어요.”

“우리 대단한 인축씨가 예상 못하는 것도 있었나?”

“너무 과신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하찮은 인축인걸요. 설마 공도희 탐정님과 사랑에 빠져 이런 몰살을 이끌어내는 인격이 탄생하리라곤 예상치 못했어요.”

 

양 손끝을 마주 댄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권세일이 무대를 응시한다. 중도에 권세일의 계획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공도희를 끝까지 옹호하며 다른 누군가가 범인일거라고 닥치는 대로 몰아세우던 소년이 탐정 포인트가 전부 소모된 것을 알고 자신의 목걸이가 터지기 직전까지 마구잡이로 남들의 목걸이를 뜯어댄 현장이었다. 그 공격으로 그나마 쓸 만하던 탐정이 두 명 사망했고, 그 시점에서 권세일의 계획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D는 남은 이들의 목걸이도 마저 폭발시켜 인축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목걸이가 폭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어버린 소년이 권세일로 돌아온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의존하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 시뮬레이션 덕분에 다음에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잡혔어요.”

“또 하겠다는 거야?”

“익센트릭. 당연하죠.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저는 ‘인간’이 될 수 있어요. 물론 보수는 이제까지의 금액에 2배를 붙여 확실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도희 탐정님 덕분에 특수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으니 거기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별도 보수를 지불해드릴게요.”

 

공도희의 입에서 높은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드디어 맘에 드는 얘길 하는구만. 다음번에 네 인격이 또 나한테 반하면 이것도 2배로 붙나?”

“일어난다면요. 하지만 이번에는 백지 상태의 인격이 좀 더 확실하게 따를 법한 ‘동경의 대상‘을 중점으로 탐정을 선별할 생각이니 확률은 줄어들 겁니다. 공도희 탐정님은 이제까지처럼 사건을 만드는 역할에 집중해주세요.”

 

자신의 할 말을 끝낸 권세일은 공도희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는 자신을 찾아온 안지아를 따라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또 어디서 D와 소곤거리려는 거겠지. 공도희는 뻐근한 목을 가볍게 풀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피우지 않은 담배는 달다기보다 여전히 쓴 맛으로 혀에 달라붙었다.

 

사기꾼에게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속이기 위한 자금이 든다. 때문에 계획에 얌전히 가담해주기만 하면 거액의 돈을 척척 얹어주는 권세일의 ‘여정’ -사기훈은 참 고풍스럽게도 그렇게 표현했다- 은 좋은 돈줄이었다. 그 사이에 속세로 나갈 수 없다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오히려 사기꾼 탐정에 대한 소문을 무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한 곳에서 은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빌어먹을 폭탄이란 것도 사기훈이 거의 해체한 상태니 기회만 잘 본다면 이 성을 저따위 인축이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무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 앞으로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도희… 형.

저… 잘, 한… 거죠….

제 이름…… 한 번만…….

 

담배연기가 허공에서 흩어진다. 공도희는 그걸 오랫동안 응시하다 또 다른 한 줌의 연기를 짧게 뱉어냈다. 서로 맞부딪치며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는 연기 속으로 이제는 누구도 반응하지 않을 이름이 파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권세일의 껍데기가 소년의 이름을 대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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