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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마비노기

[트헌밀레]시간은 황금, 약속은 백금

"밀레시안, 어떤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는 말, 알아?"

"알고 있어요."

"그거, 다른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돼. 그림이라던가, 요리라던가, ...이를테면 이 옷도 그렇지."


시몬의 손에서 자신이 만들어진 천옷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것이 옷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한 손길임을 이미 알고있는 밀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몬씨는 말을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뭐지?


"이 옷, 품질은 좋아. 근데 만든 사람이 중간중간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네. 이 바느질의 상태를 보아... 연인 생각이라도 한건가?"

"헉,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아니, 간본거야."

"...."

"젊은 아가씨가 천옷 만들다 말고 한숨 쉬며 청승 떨 일이 딱히 뭐가 있겠어?"

"....저, 일단은 여신도 구했고 이것저것 많이 한 사람인데요."

"그래서, 내 말이 틀렸다?"

"...정답이십니다."

"것봐."


시몬은 가볍게 웃고는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번에 맡은 물건이 제법 실력을 요구하는 의복이었던 덕분에 손바닥에 전해지는 무게가 묵직했다. 


"연애는 인생의 활력을 주지만, 동시에 위험한 함정이 되기도 하지. 좋아하는건 자유지만 잘못해서 상대방에게 농락만 당하고 끝나지 않도록 조심해." 

"아하하... 새겨들을게요."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가게를 나온 밀레시안은 글리니스의 식료품점에서 몇 종류의 음식을 산 뒤 아직 오후로 기울어지지 않은 태양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약속한 시간은 오후 세 시의 사막 오아시스. 지금 바로 카브 항구로 향한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입은 옷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밀레시안은 서둘러 카브 항구를 향해 달려갔다.


=


"음... 트레저 헌터? 있어?"


약속한 오아시스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산책하듯 한 바퀴 빙 돌아본 밀레시안은 정말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살짝 맥이 풀려 언덕 구석에 주저앉았다. 시간은 이제 막 약속시간에 도달한 참이니 약간 늦으려니 생각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다. 애초에 밀레시안에게는 넘치는게 시간이니까. 하지만 약속 상대가 오늘 이 자리에 아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걱정이었다. 가장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건 내가 일하는 방식이랑은 좀 안 맞는데. 그냥 지금까지처럼 만나도 괜찮지 않아?'라며 난색을 표하던 트레저 헌터가 아니었던가. 


'지금 방식에 불만이 있는건 아냐. 하지만 나는 트레저 헌터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행복을 느끼고 싶어.' 그때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대로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걸로 과연 트레저 헌터가 납득해주었을까. 밀레시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쏟아지는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처음에는 하릴 없이 앉아있기만 하던 밀레시안은 시간이라도 죽일 요량으로 물가를 맨발로 거닐며 연신 사막 너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가 기울도록 보인 것은 물을 마시기 위해 들린 야생마와 타조의 그림자 뿐이었다. 역시 잊어버렸나보네. 노을이 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상대에게 농락만 당하고 끝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시몬의 말이 떠올랐다.


"...그치만 어쩌겠어요. 내가 먼저 좋아하게 되버렸는걸."



지금쯤 트레저 헌터는 어디서 어떤 유적을 조사하고 있을까. 뭔가에 골몰하고 있을 검은 머리와 금안을 떠올리기만 해도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나온다. 그래,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또 어때. 때가 되면 분명 내 곁에 나타나줄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밀레시안은 좀처럼 오아시스를 떠나지 못했다. 노을이 파랗고 검게 물들어 이웨카와 라데카가 뜬 오아시스에 적막이 깔릴 때까지도.


밤의 오아시스에 이웨카와 라데카가 비친다. 캠프 파이어를 피워놓고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그 풍경을 넋놓고 바라보던 밀레시안은 문득 어둠 저 너머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구름이 끼지 않은 달밤, 목 마른 야생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건...


"흐, 흑표범?"


보통 코르 마을이나 사바나에서나 나오는 짐승이 어떻게 여기까지, 라고 생각할 사이도 없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주저앉아버린 밀레시안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흑표범이 금색 눈을 빛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밀레시안이 조용히 숨을 들이쉬는 동안 흑표범은 몇 번 몸을 털더니 한 사람의 인간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놀랍게도 밀레시안이 방금 전까지 상상하고 있던 인물의 모습 그대로였다. 밀레시안이 넋나간 사람처럼 그를 쳐다보는 사이, 방금까지 흑표범의 모습을 하고 있던 트레저 헌터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설명하게 해줘."


이전에 들은 바 없는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


요약하자면 약속을 잊은 게 아니라 전날 저녁에 가벼운 탐색 기분으로 들어간 유적에서 예상 외로 복잡한 수수께끼와 퍼즐과 마주하는 바람에 중간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그걸 모두 뚫고 나오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였다. 실로 트레저 헌터다운 이유라고 생각하며, 밀레시안은 제 곁에 앉은 트레저 헌터의 곁에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에게서 모래와 낯선 수풀의 냄새가 났다.


"그치만 흑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건 몰랐어. 어디서 배운거야?"

"유적 조사하러 다니다 알음알음 익힌거야. 하필 마나 터널도 없는 오지인데다 마땅히 타고 갈만한 생물도 없는 곳이라...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이 이것 뿐이었어."

"멋있다... 난 기껏해야 개나 고양이 정도가 한계인데."


하염없이 상대를 기다린 시간 따위는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감탄하던 밀레시안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헌이 한숨을 쉬는걸 보고 눈을 깜박였다. 


"나한테 화나지도 않았어?"

"화? 내가 왜? 약속 일부러 잊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와줬잖아. 어림짐작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인걸!"

"...정말이지."


트레저 헌터가 슬쩍 웃는가 싶더니 밀레시안의 몸을 껴안는다. 차가운 밤을 질주한 탓인지 살짝 서늘한 피부를 느끼며 키득거리는 밀레시안의 귓가에 트레저 헌터가 나지막히 속삭였다.


"초조했어. 네가 화났으면 어쩌지. 이미 돌아갔으면 뭐라고 말하지. 어쩌면 나한테 실망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오는데, 멀리서 네가 여기 있는걸 봤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행복해졌어. 방금 전까지 초조해했던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자신을 껴안고있는 트레저 헌터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밀레시안은 그 힘에 응답하듯 트레저 헌터를 마주안아주었다. 서로의 고동소리가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뭔가를 한게 아니야."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거지. 스스로 말해놓고도 부끄러워 밀레시안은 그대로 트레저 헌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귓가에 트레저 헌터가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치만 나만 사랑하면 불공평한데."

"어?"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그럼 말해줘. 빨리."


던전 보스를 상대할 때도 이렇게 가슴이 빨리 뛰진 않았다. 갑작스런 요구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대던 밀레시안은 답을 재촉하듯 뺨을 부비는 트레저 헌터의 행동을 이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나도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고 흔해빠진 말이었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어린 아이처럼 한참을 웃다가 한 차례 입을 맞추곤 만나지 못하는 사이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누는 말 사이로 캠프 파이어의 불티가 튀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