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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라스트 위시(2017)

About DEAD.


그의 부모님은 눈 앞에서 죽었다. 연구가 바빠 매번 유모에게 아이를 맡기긴 했어도 그럭저럭 합격점인 부모였으나, 해적에게는 그런 점은 상관없었으리라. 피는 바닥을 흘렀고 짐가방이 놓인 침대 아래에 허술하게 숨겨진 아이는 그대로 발목을 잡혀 끌려나갔다. 옷장 벽 속에 숨어있던 쌍둥이 누나가 발견되지 않았던 건 행운이라고 말했어야 했을까?

해적들은 이런저런 노예사업엔 관심이 없었고 대신 유흥을 즐기고 싶어했다. 마구잡이로 납치된 아이들이 터득한 것은 배가 아니면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어둑한 동굴에서 짐승처럼 물어뜯고 그르렁거리는 법이었다. 사람이 아닌 짐승. 짐승보다 못한 무언가. 그것들이 서로 날뛰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해적들은 웃고 떠들며 성치 못한 음식들을 내던졌다. 그것이라도 먹은 자는 오래 살아남았다. 잠들 때에도 한쪽 눈만은 감지 않은 자가 살아남았다. 죽이는 자는 살아남았다. 죽이지 않는 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흑와단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 살아있던 것은 딱 한 명이었다.


*

그 후로도 죽음은 종종 그와 인사를 나누고 스쳐지나갔다. 울다하에서 그들을 맡았던 어느 노인, 노인이 죽은 이후로 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을 맡아 주었던 흑와단의 중위 카넬리안, 누나 앰버와 약혼관계를 맺었던 어느 미코테 달의 수호자, 태어날 때부터 같은 외모로 함께 태어났던 쌍둥이 누나 앰버, 그 뱃속에 심겨져있던 아이.

코랄은 살아남았다.

그 안엔 죽인 자도 있고, 죽이지 않은 자도 있다. 다만 전자의 비율이 높았다. 살아있을 때야 어땠든 한 번 죽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니까, 누군가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면 죽이는게 상책이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게 조심했다. 사회적 가치라는 것에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삐죽이 튀어나온 이들은 늦든 빠르든 꼬리를 잡혀 처단당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뱀이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듯 가만히 살아남아, 때로는 죽이고 지배하는 것.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온 이후 코랄의 행동 원리는 늘 그랬다.

...앰버가 사하긴의 영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뒤로는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어떤 죽음이 있기도 했으나  딱히 기억할 필요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지배를 위한 지식은 눈처럼 쌓여 단단하고 차갑게 굳어갔고 다른 인간들과 섞여드는 행세를 하는 데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마음으로는 한 줌의 신뢰도 주지 않으면서 행동을 파악하는 법도 자연스레 배었다.

그리고 어느 야만신의 공간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을 때, 죽음은 새하얀 지식의 땅에 검은 발자국을 꾹꾹 남기며 그를 찾아왔다.

헤어짐은 빨랐다. 판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죽음에서 눈을 뜬 코랄은 제 목숨을 불태운 자에게 곧장 죽음의 에테르를 퍼부었다. 양심의 가책도 후회도 미련도 망설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배하는 사람이며, 누군가를 죽이는 자이자,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것이 진리임을 몸으로 체득한 존재였으므로.

오랫만에 보는구나.
이별이 너무나 빠른걸.

또 검은 발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진다.

약간은 익숙한 에테라이트의 공간 속에서 눈을 뜬 코랄은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떨어져나간 단안경을 깨끗하게 닦아 다시금 착용했다. 단정한 행동 사이에는 극단에 가까운 한 가지 생각만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죽여놓지 못했다면 전부 죽여버리겠어.

그 위로 익숙한 이성의 막이 내려앉는다. 코랄은 부드럽게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