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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EWIG(2015)

[시몬아술]214일.... 로그....

아술라는 정전을 겪은 적이 있다. 굵은 빗줄기가 연신 창문을 두드리고 번쩍이는 번개의 잔상이 망막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천둥이 요란하게 으르렁거리던 날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전기는 순식간에 빛을 앗아갔고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있던 아술라는 삽시간에 자신을 둘러싼 암흑에 당혹하며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도착한 창문 바깥도 어두컴컴한 걸 보아하니 자취방 뿐만 아니라 이 일대 전체에 정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쉴 새 없이 유리창을 내리긋는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거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유리창에 한 손을 얹은 채 검은 풍경을 바라보던 아술라는 이내 창가쪽 벽에 등을 돌리고 기대앉았다. 촛불이나 손전등과 같은 단어들이 잠시 머릿 속을 떠돌았지만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 구조에 익숙해지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부를 휘젓고 돌아다닌다는 건 그리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게다가 핸드폰은 방금 전 밧데리가 다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충전기에 꽂아놓은 참이고, 자신이 뭔가 쓸만한 전기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술라는 그냥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정전이 다시 복구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겨우 확인한 손목시계는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열두 시가 지나도록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술라는 그동안 가만히 어둠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후 두 시였다. 오늘 중으로 몇 호 태풍이 상륙한다더라는 이야기가 습기찬 공기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부을 것처럼 찌부둥한 구름이 점점 사위를 어둡게 물들여가던 때의 일이었다. 요란한 천둥 소리와 함께 복도를 비롯한 전등 불이 모조리 꺼지자 비명과 술렁임이 학교를 뒤흔들었고, 수업을 위해 교탁 앞에 서있던 교사는 아이들에게 정숙히 있을 것을 지시한 뒤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정숙하게 있을 아이들이 아니다. 어쩌면 이걸로 일찍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들뜬 목소리가 교실 전체에서 술렁이는 동안 구름 낀 하늘을 쳐다보던 아술라는 벌써 반년은 넘게 지난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습기와 뒤섞인 나무 냄새가 짙었다.

돌아가도 그곳은 비어있겠지.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사실이 오늘따라 다리에 거미줄처럼 휘감겼다. 태풍의 기운을 머금은 공기가 무거운 탓인지도 몰랐다. 교무회의를 통해 결정된 조기 귀가 조치에 아이들이 서둘러 짐을 챙기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가방을 챙기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끌던 아술라는 주번을 맡고있던 아이가 뒷정리를 부탁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종류의 우산이 고리에 걸려있던 책상들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아니, 아니다. 한 자리는 예외였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술라에게서 좀 떨어진 구석 자리에 아직까지 책상 위에 엎드려 깊은 잠을 자고있는 학생이 있었다. 그렇게나 피곤했나 싶어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곤란하게도 전혀 정신을 차릴 기색이 없다. 주번을 맡은 아이가 뒷정리를 부탁한다고 했던건 혹시 이 아이를 가리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술라는 그 자리에 앉아있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사이먼."

유감스럽게도 목소리로 상대를 깨우는 작전은 실패했다. 그나마 태풍의 기세가 잠잠한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돌아가는 길이 고생일텐데. 욕이라도 들을 각오로 조금 세게 어깨를 흔들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보면 사이먼은 수업시간에 늘 잠을 자고 있다는 이유로 선생님들에게 주의를 받곤 했었지.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않는 동급생을 바라보며 난감함을 느끼던 아술라는 멀리서 구름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빗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우산을 챙겨왔으니 그리 문제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엎드려 잠들어있는 사이먼이다. 뭘 어떻게 해도 타인의 손길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동급생을 바라보던 아술라는 그를 억지로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깔린 먹구름은 굵은 빗줄기를 흩뿌리며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사이먼이 깨어났을 무렵에는 바람과 섞여 난폭하게 날뛰는 빗방울이 아예 창문을 문질러 닦아내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여파 때문인지 약간 졸린 눈으로 텅 비고 어두컴컴한 교실을 돌아보던 사이먼이 또 책상 위에 엎드렸다. 아술라는 사이먼을 이대로 또 잠들게 했다간 날짜가 바뀌어도 학교에서 나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쪽을 향하는 눈빛이 약간 서늘했다.

"…정전과 태풍 예고 때문에 다들 돌아갔다. 너도 이만 돌아가는 편이 좋아." 
"아… 그래."

자기를 두고 간 아이들에 대해 딱히 화내거나 서운해하는 기색조차 없이 길게 기지개를 핀 사이먼은 책상 옆 고리에 걸려있던 가방을 들어올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손에 우산은 보이지 않는다. 괜한 참견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술라는 교실 문을 열고 나서는 사이먼을 향해 우산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없어."
"없다니."
"너는 있지?"
"…있지."
"그럼 네가 씌워주면 되겠네."

조금 따라가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교실 문을 잠그는 열쇠를 한 손에 든 아술라의 등 뒤에서 한 차례 번쩍이던 하늘이 낮은 천둥을 토해냈다. 하긴 이때까지 일어나는 걸 기다렸는데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할 것은 또 무언가. 평소보다 약간 느슨해진 생각과 함께 아술라는 교실 문을 잠글 동안만 기다려달라고 입을 열었다. 사이먼은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끝내기나 하라는 얼굴이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빗줄기는 공기 속을 수평으로 가르며 있는 힘껏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우산을 쓰더라도 집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면할 수 없으리라. 다소 난감해하며 우산을 핀 아술라는 학교 교문을 향해 몇 걸음 옮기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자취방 위치를 묻는 사이먼의 질문을 피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대답함으로서 사이먼이 거기서 쉬었다 가겠다고 말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만약 하늘의 일부가 찢어진 듯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는 날씨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예전에 겪은 정전이 아니었더라면 간단하게 다른 이의 침투를 허락하진 않았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두 개의 상황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태풍의 기운을 등에 업은 빗줄기는 밤이 깊도록 잠잠해지지 않았고 결국 사이먼은 그대로 아술라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빈번히 자취방을 찾아오게 된 사이먼을 아술라가 먼저 귀찮게 여기거나 쫓아내는 일은 없었다. 이따금 사이먼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아술라는 어둡고 조용하던 교실에서 푸르게 빛나던 그의 눈을 떠올렸다. 왜 그걸 생각하게 되는지는, 아직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아침 내내 흐리다가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한다. 아술라는 아직까지 일어날 기색이 없는 사이먼의 머리맡에 우산을 내려놓고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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