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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EWIG(2015)

......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없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친구는 없습니다.
타죽었습니다.

은인은 있었습니다.
죽었습니다.

또 다른 은인이 있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입니다.
짐승은 왜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정답은, 그 짐승이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르고 날뛰던 짐승이 그날 약간의 용기만 냈더라면 친구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친구를 구하지 못했더라도 그 죄를 스스로 지고갈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때가 짐승의 나이 열 네살. 아직 어렸기 때문이라 하고 넘어가볼까요?

3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짐승은 있을 곳을 잃고, 다시 얻었습니다. 그때 짐승은 이번 은인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왜냐면 이 사람은  절대로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요.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명령에도 따르겠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목숨이라도 버릴수 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포장한 겁니다.

말이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앞서 말했었지요. 그 짐승은 겁쟁이입니다. 
포장해봤자 본질이 그렇습니다.

고아원의 원장이 죽었을 때, 남은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겁부터 먹은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마음가짐이 그 모양이었으니 새로운 은인이  나타났을 때 쇼크와 동시에 다른 누구보다 깊이 안도한 겁니다. 또한 다른 누구보다 겁쟁이였기에 그 남자에게 제일 먼저 복종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버림받을 일은 없을 뿐더러, 남에게 충성함으로써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없앨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자신을 그럴 듯하게 포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가 열 일곱이니, 이래서야 어리다고 말해줄 수도 없지요.

십 년 지났습니다. 짐승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신뢰하기까지 했습니다. 짐승도 자신이 실은 겁쟁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은 평범한 사람인양 체술을 배우고 단검을 익히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사람을 돌봐주고 숨을 들이쉬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두 번째 은인인 그 사람의 말을 한결같이 따르며 살아온 것입니다. 

짐승에게 있어 한 가지 유리했던 점은, 그에게 호불호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충성한다해도 타인은 결국 타인.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면 누군가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어느 지점에선가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마음의 마찰이 생겨나고야 맙니다. 하지만 짐승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은인에게 복종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복종하기 위해서라도, 이 호불호의 부재는 중요했습니다.

이것만큼은 계속 유지해야합니다.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도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겁쟁이는 두 사람 이상의 타인 사이에서 줄을 타는 짓 따위 차마 두려워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간 반드시 균형을 잃고 떨어집니다. 자신의 본질이 어느 무엇도 아닌 겁쟁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제야 가까스로 자신의 껍질을 형성한 짐승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날도 밝아오고 있으니 슬슬 간단하게 정리할까요.

그러니 당신은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술라.

균형이 깨집니다. 우선사항이 비틀립니다.
호불호의 법칙이 무너집니다.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게 당신이 가장 두려워 하던 것 아닙니까?

그 사람도 말했잖습니까.
대답 따위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그냥 무시하라고. 
그 말 그대로 모든 걸 묻어버리면 누구도 알지 못하고 지나갈테죠.

아니면.

우리들은 모조리 태워죽였지만 이번에는 잘 할 수 있다는 거야?

응?

아술라.

=

새벽은 언제나 차갑다. 비를 머금으면 특히 그렇다.

아술라는 몸을 웅크린 채 조용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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