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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Chaser(2015)

Joshua-Ending

처음으로 만난 어머니는 사진에서만 볼 수 있던 어머니와 놀랄 정도로 닮아있었다. 부드럽게 굽이치며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다정해보이는 푸른 눈. 아마 사진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목소리였겠지, 싶을 정도로 맑은 목소리. 그래서 그녀가 소년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소년은 드디어 자신에게도 다른 아이들과 같은 어머니가 생긴다는 사실에 가슴 설레어하며, 자신만의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첫만남으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처음 만났던 날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눈빛과 경멸어린 목소리를 남기고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다시금 소년을 맡게 된 친척들은 집을 나간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속삭이며 혀를 찼다.

"만약 저 아이가 죽은 샬럿을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마르틴도 저렇게 냉정하게 굴지는 못할텐데…. 제 어미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몸이 허약한 점 뿐이니."
"그렇다고 이렇게 자기 자식이 아닌 것처럼 구는건 또 뭐에요? 우리가 돌봐주는 동안 한 마디 말도 없이 있다가 재혼했다고 덜렁 가져가더니, 3년도 안되서 자기 이혼 도장 찍었다고 아예 맡겨버리고."
"너무 그렇게 신경질 내지마. 그래도 병원비나 양육비는 딱딱 보내주고 있잖아? 애도 아직 어리고. 좀 클 때 까지만 돌봐준다고 생각해."
"좀이 언제인데요? 중학생? 고등학생?"
"글쎄, 대충 자기 앞가림 한다 싶으면 그때 아버지에게 보내도 되겠지…."

문틈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스며들었다. 조슈아는 제 머리카락을 잠깐 잡아당겼다가, 족쇄라도 찬 듯 느린 걸음걸이로 제 방을 향해 돌아갔다. 밤새 열이 오르고 기침이 터져나왔지만 누구에게 말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시트를 덮은 채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조슈아는 직감적으로 목이 부어오른 것을 알고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벽에 매달린 하얀 가림막 너머에서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이 나누는 대화가 조곤조곤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던 조슈아는 침대 시트에 찍혀있는 병원의 마크를 보고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그 병원으로 실려왔음을 알아차렸다. 예전부터 자주 신세를 진 병원이기도 하거니와, 여기에는 '그 아이'가 있다. 아직 오전을 가리키는 시계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온 조슈아는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천천히 중환자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입원 환자 안내]

[1번 침대 : 정희원]
[2번 침대 : 유엘 세이무라]
.
.
.
[5번 침대 : 마리아 실링]

"……."

아직.
있구나.

이제 열 살이 되었을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빳빳한 팻말을 만져보던 조슈아는 이제 곧 오전 면회시작 시간임을 알리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나마 컨디션이 괜찮은 상태라면 모를까, 이렇게 목이 부어올라 시도 때도 없이 기침이 터져 나오는 상태에서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로 가득한 중환자실에 들어간다는 건 명백한 민폐였다. 간호사가 밀고나온 수레에 실린 일회용 위생용품을 착용하느라 분주해진 사람들을 등진 조슈아는 복도에 마련된 빈 의자에 길게 기대앉았다. 아직 피로가 남은 머릿 속에 체이서가 된 이후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깨진 거울 파편처럼 번뜩였다.

자신의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조슈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많고 많은 부활동 중에 굳이 체이서 활동을 선택한 것은, 최소한 여기라면 자신이 무언가를 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난히 몸이 약했던 초등학교 때에는 이틀 걸러 하루 조퇴하는 형편이라 뭘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중학교 시절에 가입했던 독서부는 책을 읽거나 독서 감상문을 쓰는 걸 제외하면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하다못해 고등학교에서라도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테고.

조슈아의 생각에 맞춰 환자를 눕힌 침대가 간호사들의 인도를 받으며 긴 복도를 지나간다. 높이 세워진 거치대에 연결된 링거가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덜렁거렸다. 조슈아는 제 손목에 연결된 벤디를 만지작거리다 시선을 떨궜다. 어느 누가 대놓고 말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아마 20살을 넘기는 게 고작일 거라는 예감은 마치 내일 아침 해가 밝아올 거라는 믿음처럼 굳건하게 조슈아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죽는 것은 정말 싫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만약 그 순간이 닥쳤을 때 고작 독서 감상문을 남긴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은 싫다. 약간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내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품은 것이 2년 전의 일이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은 조금 더웠다. 언젠가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동네를 무작정 찾아갔던 조슈아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마중 나온 어머니를 발견했을 때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날씨였다. 놀라울 정도로 어머니를 닮은 소녀는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추운 바람도 아랑곳 않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고, 제 품의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 어머니는 예의 그 맑은 목소리로 아이와 수다를 떨며 조슈아가 있는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 모습만으로도 명백했다. 애초에 자신은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식도 아니지 않았던가.

그날 차가운 바람을 몸에 맞으며 꼬박 한 시간을 걸어 돌아온 조슈아는 심한 몸살감기에 걸려 일주일을 꼼짝도 하지 못했고, 열이 올라 흐릿한 머리로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이대로 자신이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될 지를 상상했다. 어쨌든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할 사람은 없을 터였고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는 그를 그닥 아끼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왔다는 흔적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쌓은 먼지 위에 남은 바람자국마냥 희미했다. 우울한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잊혀질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텐데.

하지만 공교롭게도 조슈아라는 한 인간은 이 자리에 멀쩡히 살아있었고 스스로 죽을 생각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 하다못해 자신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을 수 있는 일을 하자. 고등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체이서 활동을 고른 데에는 그런 계산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하나의 사건이 끝났다.

감정만 말하자면 무참히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부어오른 목으로 콜록거리는 상태만 아니라면 중환자실에 있을 마리아를 만나 제 이야기를 마구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봤자 화재 사고로 실려 온 이후 줄곧 의식불명 상태인 그 아이가 무엇을 알아들을 리는 없을 테니 그냥 자기 안에 쌓인 감정을 혼자 토해내는 짓이 될 테지만. 

"…바보같아…."

한때 형이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일까 상상했던 사람은 사라졌다. 부모님이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여동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여자아이에게는 영원히 닿지 않을 말을 건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마음만 앞섰지 그때 이후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라며, 소년은 깊이 한숨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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