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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세포신곡

[논커플링]나도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이소이 하루키는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닫아둔 창 너머로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 더 어렸을 적엔 창문까지 손이 닿지 않았고, 지금은 손이 닿아도 딱히 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탓이다. 자신의 창문은 늘 다른 사람에 의해 열리거나 닫힌다… 그리고 보통은 닫혀있는 경우가 더 잦았다. 지금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하루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야에 옷장이 닿는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가 옷을 사주는 데에 인색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몸이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가냘플 뿐이다. 하루키는 한 손을 들어, 그리 넓지 않은 소매가 헐렁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 피부가 드러난다. 그대로 얼마간 가만히 있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방 한 편에는 책장이 있다. 아주 어릴 적에 본 동화나 낙서를 했던 스케치북, 어머니가 사주신 도감이나 사전들이 가지런하게 꽂혀있는 책장이다. 하루키는 그 책등들을 한 번씩 건드려보다가 책상을 쳐다보지 않고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레이 군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고, 아버지도 외출한 뒤여서 집안은 조용하다. 하얀 벽이 자기들끼리 어깨를 마주대고 우두커니 서있는 가운데, 벽마다 박혀있는 문들은 어떤 수문장을 연상케 했다.

 

도로 안으로 들어가려다, 어떤 것을 발견한다.

하루키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어머니의 방문이 비스듬하게 열려있었다.

 

하루키는 맨발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차닥차닥 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되지 않는 어깨 근육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한다. 다가가서 문을 닫을 뿐이라면 이 정도로 긴장할 필요는 없을 텐데도. 그래서 하루키는 더 긴장한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작은 목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문은 그리 많이 열려있지 않다.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그럼에도 하루키에게는 그 틈이 마치 거대한 동굴 입구처럼 여겨져서.

 

노크를 한다.

돌아오는 답은 없다.

 

이소이 하루키는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린다. 안에서 조금은 낯익은 공기가 번져 나왔다. 그러고보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이 방으로도 자주 놀러왔던 것 같다…. 하루키는 묘한 향수를 느끼며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매끈한 마룻바닥은 삐걱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큼직한 책장이었다. 책장 가장 위의 책 제목은 너무 높아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루키는 적당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키와 비슷한 높이에 있는 책들의 제목을 보았다. 『아이와 소통하는 부모』, 『당신의 아이는 웃고 있나요』 라는 제목들 사이에 『운명의 나무 아래』 라거나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며』 같은 책도 꽂혀있다. 하루키는 그 중 한 권의 책을 뽑아보았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얌전히 책을 돌려놓는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침대는 정말로 새하얘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대로 슬금슬금 이동하던 하루키는 침대 맞은편에 놓인 커다란 서랍장을 발견했다. 책장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하루키에게는 여전히 높은 가구였다. 무심코 가장 끝을 바라보면 심플한 액자에 담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 하고 깨닫는다. 이건 엄마가 예전에 연구소 사람들하고 찍은 사진이구나.

 

서랍장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잠겨있지는 않았다. 고민을 하다 슬쩍 잡아당겨보면 쉽게도 열렸다. 안에는 몇 가지 도구나 생활용품이 들어있다. 잘 살펴보면 자신이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들도 차곡차곡 쌓여있다.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머뭇머뭇 손을 뻗는다.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들어올리면 뜻밖에도 아래에 깔려있던 뭔가가 드러났다. 하루키는 그걸 보고 숨을 멈췄다.

 

「1989년 10월~ 1991년 3월 가족사진」

 

그걸 본 순간 마음 어딘가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꾹 아파온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몸이 어딘가로 깊이 깊이 끌려들어가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대로 그림을 내려놓는다. 열린 서랍을 꽉 밀어 넣는다. 방 안의 다른 부분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비틀비틀 방을 빠져나올 무렵에는 손이 떨렸다. 그걸 꾹 참으며 제 등으로 문을 밀면, 걸림쇠가 단단히 맞물리는 소리가 몸 속에서부터 크게 울려 퍼졌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의식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치 방금 보았던 것은 전부 잊어버리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