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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파판 14

[우라레젠]긴 궤적을 그리는 사람

백마도사 아우라 X 가죽공예가(재봉사) 엘레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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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을 손질하는 것은 서툴렀다.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가죽을 다듬는 칼 끝은 더딘 손가락을 베어내거나 질긴 가죽 한복판에 칼자국을 남겼다. 덕분에 핏물과 살점이 달라붙어 너덜해진 가죽은 누구도 매입하려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내 조악한 손기술과 생명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했으나, 그렇다고 밤새 실력을 기르거나 다른 길드로 자리를 옮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길드의 잡다한 물건을 옮기거나 작업용 도구를 청소하고 물건을 배달하는게 내 일이 되었다. 가끔 짐을 싣고 있노라면 마물 뱃속으로 들어간 어미가 원통해서 가죽칼로 배를 찢고 나오겠다는 비웃음이 들리기도 했다.

이루어지지도 않을 말은 무섭지도 어떻지도 않다. 차라리 배달하던 물건이나 물건을 건네주고 받은 대금을 중도에 잃어버리는 쪽이 훨씬 아찔했다. 뭐라고 변명하기도 녹록찮은데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인데 금전전인 손해까지 이쪽에서 부담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까운 곳으로 배달을 간다 하더라도 늘상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러다보면 유달리 지치는 날이 온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하루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꼭 그런 때에 한해서 괜찮지 않은 꼴을 당하는데도.

바데론의 주점과 채석공방 사이를 잇는 길목은 폭이 좁은데다 인적도 드물어 무법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른 때라면 동부삼림쪽으로 돌아가 맞은편으로 향했겠지만, 그날따라 일감은 상당히 밀려있었고 몸은 고단했다. 게다가 얼핏 지나가는 모험가가 별 일 없이 통과하는 모습이 보여 괜찮겠지 한 것이 화근이었다. 

목덜미를 잡힌 몸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흙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고있자니 묘하게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다섯이나 되는 불량배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계속 버티다가 두들겨맞고 가진 걸 전부 뺏기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항복하고 목숨만은 건지느냐 하는 차이일 뿐.

하지만 내 것도 아닌 돈을 냅다 건네줄 수 있을 리 없다. 거기다 사람을 골라가며 강도짓을 하는 주제에 퍽 으스대는 꼴이 시원찮아 비웃었더니 뺨을 걷어차였다. 입안에서 진한 쇠맛이 나고 코에서 진득한게 흘러내리는 느낌을 보아하니 코피도 터진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엉망이 되서 돌아가면 귀찮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욱씬거리는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는 하얀 뿔이 달린 남자가 있었다. 첫 눈에 보기에도 에오르제아 출신이 아닌걸 알 수 있는 외형이었다. 지팡이를 들고 묘한 기술로 무법자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걸로도 모자라 내 상처까지 치료해준 그는 대략적인 사정을 듣더니 자기도 그쪽에 볼일이 있다며 동행을 권유했다. 빼앗긴 짐이나 금전까지 돌려준 뒤였는데도.

"...당신, 모험가지? 그래봤자 내가 줄 건 없는데."
"혼자 다니면 심심한걸요. 말동무만 해주셔도 충분해요."

별난 모험가도 다 있다 싶어 수락하니 하얀 뿔의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보다 키도 크도 덩치도 있는데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그날은 덕분에 편하게 물건을 배달했고, 무사히 그리다니아까지 돌아왔다. 이후로도 남자는 종종 도시나 삼림에서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머나먼 땅에서 찾아왔다는, 하얀 뿔과 꼬리가 달린 남자. 한없이 상냥한 그가 환술사 길드에서 '뿔의 아이'만큼이나 비범한 백마법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인물임을 아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쑥쓰럽네요. 실제론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답니다."

환술사 길드의 유망주가 가진 겸손함은 둘째쳐도, 왜 자신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배달 일에 동행하겠다는 말에 바쁘지 않아? 라고 되물어보면 웃으며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마음이야 고맙지만 당신과 자꾸 같이 다니면 모험가가 일을 대신해준다는 오해를 살거라고 하니 아예 청소시간이나 하루 일과를 마친 때에 찾아왔다. 그러고선 자주 말을 걸어주며, 너덜한 손에 남은 상처를 하나하나 짚어주고, 실패의 무게를 지고 굽어져버린 등을 도닥여주는 사람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온기가 느껴졌던 건 그가 가진 백마법의 힘이었을까?

"당신은 생명을 무척 존경하는군요. 그래서 그만 두려워하고 마는 거에요."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온기가 절실했다. 정말로 절실했지만, 바라지는 않았다. 제 아무리 바쁘지 않은 척해도 그 사람을 원하는 곳이 많다는 건 그리다니아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 하얀 뿔의 남자가 어느 던전을 공략했다지, 수많은 몬스터떼를 다른 이들과 함께 순식간에 물리쳐버렸대, 동부삼림 깊은 곳의 야만신까지 쓰러뜨렸다면서? 속삭임이 메아리치는 동안 내 앞에는 볼품없이 손질된 가죽이 놓여있었다.

"최근 이슈가르드를 가본 적이 있어요. 하얀 눈밭 위로 보이는 밤하늘이 정말로 예쁜 곳이에요. …다음에 당신도 같이 보면 좋을텐데." 

그 말을 평소처럼 흘려듣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뻔한 날, 나는 그리다니아를 떠났다. 어디서 마물에게라도 물려죽을 셈이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 냄새 가득한 도시였다.

어릴 적부터 이런 악운만은 좋았으나,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모래와 먼지 섞인 바람이 어서오라며 온 몸에 휘감겼다. 얼마간은 돈을 뺏기거나, 얻어맞거나, 영문 모를 약을 마시고 경과를 말해주거나, 갑작스런 열병에 구토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황혼족이라, 이름이야 그럴 듯 해도 결국 좋은 시절 다 지나간 놈들이지." 

어느 불량배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그대로다. 하지만 이따금, 황혼도 지난 밤하늘의 별빛 같은 것들이 섬뜩하게 번뜩이기도 했다. 몸을 아무리 험하게 굴려도 떨어져나가지 않는 빛이었다.

술은 그리다니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늘었다. 이따금 주점이 아닌 뒷골목 길바닥에서 욱씬거리는 몸으로 일어날 때도 있었지만 어차피 하루 벌고 하루 살다시피하는 삶이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내리는 빗물을 죄 얻어맞고 눈을 뜨는 날은 아무리 나라도 기분 좋진 않았지만.

"........" 

하얀 뿔의 남자는 빗 속에 선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 드디어 미쳐서 환각을 보나 싶어 둔한 주먹으로 이마를 퍽퍽 쳐보니 현실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당신하고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데. 대체 뭐지? 멍한 머리로 생각하는 동안 팔 아래를 붙잡혀, 쑥 들어올려졌다.

새삼스럽지만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가 푹 젖은 나를 품에 안고 어딘가로 향하는 동안 미지근한 온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멍하니 그걸 느끼는 사이 여관으로 옮겨졌고, 강제로 씻겨졌고(그렇게 힘이 센 줄 처음 알았다), 말끔히 닦여 침대에 눕혀졌다. 과한 호사에 몸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동안 나를 꽤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왜 울다하에 온건지, 여기에 아는 사람은 있는지, 있다면 당신을 왜 그런 곳에 내버려둔건지 묻는 목소리는 꽤나 격양되어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얼굴을 숙이곤 미안하다 사과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사과할 필요 없어. 그냥 떠나고 싶었을 뿐이야. 태어나서 줄곧 그리다니아에서만 살았지만 의외로 여기도 지낼 만 하던걸. 실력이 없어 검투장에는 못 가지만." 

그런 식으로 대답하고 있자니 고요한 시선과 마주쳐, 입을 다물어버렸다. 

알아, 나도 알아. 그냥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어. 미안해. 그치만 너무 과분해서 죽을 것 같았다고. 난 가죽 손질도 못하는 반푼이지만 서로 외로운 처지라고 함부로 부대낄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 당신은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걸 넘어 어머니 하이델린에게 선택받았지. 내가 아니어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별처럼 많고. 많고. 많잖아.

같이 있자면 내가 하찮아지는 기분이야.

그 순간 잠시 현기증이 오는 듯 약간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제법 슬퍼보이는 눈을 하고 있어, 잘은 모르지만 내 생각을 전부 들켜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떠나버려도 상관없었건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 그만 자라는 듯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퍽 굳은 살이 많은 손이었고, 그런데도 부드러웠다.

잠에서 퍼뜩 깨어보니 이미 저녁이었다. 근처 테이블에는 모험가 길드의 주인에게 얼마간 돈을 맡겼으니 식사는 거르지 말란 말과 함께 작은 심부름을 부탁하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재봉 길드에 물건을 전달하는 정도의 사소한 일인데도 일부러 나에게 넘긴 건 아마 그 나름의 배려겠지.

식사는 뒤로 미루고 재봉사 길드에 가 물건을 전달하니, 잘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약간의 길과 재봉도구를 받았다. 수련생들이 흔히 쓰는 물건이나 연습 삼아 해보라는 말도 함께였다. 순간 빙긋 웃으면서도 할 일은 다 하는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거기서 더 캐묻는 것도 어쩐지 진이 빠져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손길을 거쳤을 물건이 모래와 쓰레기 사이에 묻히거나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하면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마냥 들고다니자니 짐이 되어, 길드장이 없는 틈을 타 재봉 길드 직원에게 보관을 부탁했다. 그 이후로는 평소와 다름없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술을 마시고 약물의 부작용에 바닥을 뒹굴며 지내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또 비가 왔다. 덕분에 오후에 예정되어있던 공사 업무가 내일로 미뤄져, 딱히 할 것 없는 시간이 생겨버렸다. 평소라면 연금술 길드를 기웃거리거나 술집으로 갔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같이 술을 마시곤 하던 공사장 동료가 어제 죽어버린 바람에 뭘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폭력 없이 교류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는데. 짐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그가 사나운 마물과 마주친 건 나에게도 그에게도 큰 불운이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이 나라를 떠나 그리다니아에 가서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했다. 거기도 어차피 사람사는 데라 똑같다고 말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초목 가득한 나라의 사람이라면 모래 같은 나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줄거야. 대체 어디서 들어왔을지 모를 믿음이 왠만한 덩쿨보다 단단히 얽혀있어, 나도 그의 속내를 파고드는 짓은 그만두었다. 그래, 언젠가 그리다니아에 갈 수 있으면 좋겠네. 예의상 건넨 말에 그는 몹시도 환하게 웃으며 내가 원하는 것도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내 소원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빗줄기는 계속 내리고있다. 벽에 기대 비를 피하던 나는 건너편에서 어슬렁대는 불량배 무리를 발견하고 안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비와 먼지 냄새를 맡으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조금 눈에 익은 입구가 보였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 탓에 되려 눈에 익숙해져버린 재봉사 길드의 입구. 그대로 지나치려는 찰나,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길드의 카운터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이 도시에서 황혼 엘레젠을 보기는 드문 일인지라 기억에 남았다고 하지만, 아마 남루한 내 차림도 퍽 인상적이었을테지.


"맡겨두신 물건은 언제쯤 찾아가실 건가요? 친구분이 가끔 오셔서 소식을 물어보시고 가거든요. 은근히 솜씨를 자랑하고픈 눈치시던데, 저희한테도 좀 보여주세요!"


친구가 누구냐고 되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헛웃음소리를 내다 천이고 바늘이고 제대로 잡아본 적 없다고 대답했다. 고작해야 가죽공예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재봉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내 앞에서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겸손하시긴! 전에 친구분 장갑을 꿰매주셨다면서요? 다 봤어요. 성실하게 잘만 하셨던걸! 기술은 차차 배워나가면 되는 법이에요."


아.


그러고보면 그리다니아에서 배달 일을 하던 무렵 누가 찢어진 장갑을 버리고 갔길래, 이런 물건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서 찢어진 부분을 꿰매 썼던 적이 있다. 어디의 누가 썼을지도 모를 물건. 차라리 가게에서 하나 사는 편이 나을 품질. 그런게 나랑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는데 남자는 그 얘기를 들은 며칠 뒤에 자기 손장갑도 찢어먹고 와선 꿰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그냥 모험가도 고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찢어진 것에 비해 손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실이 끊어진 부분도 묘하게 깨끗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완성된 장갑을 보고 남자가 이상할 정도로 기뻐했던 기억도 생생한데.


그걸, 왜 아직까지.


직원은 이번 기회에 한 번 시작해보라며 나를 길드 안쪽자리까지 데려갔지만,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바늘을 놀린 결과는 당연히 처참했다. 뭐, 처음엔 다 이런 법이죠! 직원은 별 것도 아니란 투로 말해주곤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과 바늘을 이어, 천을 꿰매나가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도면을 따라 천을 자르고 정확한 지점을 꿰매는 건은 무거운 짐을 배달하는 것 이상으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다. 실과 바늘에서 피가 스며나오지도 않았고(가끔 손가락을 찔리면 그렇게 됐지만) 어떤 생명의 무게를 느끼는 일도 없기 때문인지 실력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갑류를 만드는 솜씨가 손에 붙어, 이 정도면 장갑가게를 차려도 되겠다는 말을 여러번 듣게 되었다.


얼굴 모를 이의 의뢰를 받아 대신 물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그럭저럭 익숙해졌을 무렵, 평소처럼 재봉사 길드의 한쪽 자리에서 바늘에 실을 꿰매려는데 이상하게 실 끝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집중해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드니,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이 어쩐지 울 것 같은 미소를 띄고 서있었다.


…그가 낀 장갑이 수선되지도 못할 만큼 헤져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