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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1기(2017)

신은 되지 못한다

힘든 길이 될 거다. 가시밭길을 걷는다는 비유조차 부족하겠지. 가시덩굴을 맨발에 두르고, 기댈 곳 없는 길을 걸어가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도 저는 그 길을 가고 싶어요."

그 마음은 분명 중요해.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비비, 사교와 외교는 엄연히 다른 법이야. 만약 네가 이종족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면,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거다.

"아뇨, 충분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말해주지 않겠니. 어째서 이종족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왕궁으로까지 걸음하려 하는지.

"...그들은 사라질거에요."

그 이야기는 유감이다. 이 나라는 오랫동안 이종족들에게 둘러싸여있었어. ...그야말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네가 우리에게 말해준 대로 그들이 머잖아 사라지게 된다면, 나라의 정세는 싫어도 혼란스러워질거다. 왕궁에 적을 두기로 한 이상 너도 휘말리겠지. 그건 어차피 사라질 존재와 함께한 댓가라 하기엔 너무나 어렵고 버거워. 

"나는 그들을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종족이 사라지는 것은 해가 떴을 때 젖은 땅이 마르고 구름이 끼어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 한낱 인간이 마력을 어찌어찌하는 방법을 알아낸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해.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너는 신이 아니야.
이 가문의 모든 이가 그렇듯.

"......"

…옛 겨울 바람이 불어온다. 비보라는 설핏 웃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빛 도는 작은 스푼이 둥글게 회전하며,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찻잔 바닥을 긁고있었다. 

"네, 저는 신이 아니에요. 신이 될 수도 없지요."

속으로는 그토록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거늘 그것을 혀나 입술을 거쳐 말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전할 수 없다. 서로 마주보고 있어도 알 수 없다. 분명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간단하게도 흔들려 뒤집힌다. 간절히도 믿었던 것을 스스로 짓밟는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믿을 수 없는가.

"인간이니까요."

따라서 거부하고 있었다. 

순진하고 어린 마음 따위 무슨 소용인가. 아무 의미도 없는 감정은 단단히 묶어 봉하고 겉으로는 어른스럽고 기품있는 태도를 갑옷처럼 두른다. 그러면서도 한 켠으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이종족의 자리를 동경했다.

처음부터 달리 돌아갈 곳이 있는 존재라면, 마음을 죽여가며 비참한 심정으로 인간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될텐데. 나는 본래 이들과는 다르다며,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텐데.

"그리고 세상은 인간이 어쩔 도리 없는 일 투성이죠."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세계를 바꿀 수도 없다.
마음은 비참한 채로, 파탄을 맞이했다.

이제는 이도저도 싫다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아도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막으려던 숨은 매번 둑처럼 터져나왔다. 피와 근육과 살점으로 이루어진 몸은 이래야 하지 않겠냐고 눈치를 보듯 슬금슬금 의식을 깨웠다.

현실은 담담히 이어진다.
세계는 천천히 몸을 뒤척인다.
부서진 마음의 파편은, 끝없이 덜걱였다.

그래, 인간은 별 수 없어. 그래서 기껏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건만. 그런 울림이 찻잔 속에 붉게 고인다. 스푼은 이제 빈 찻잔 바닥 대신 부드러운 찻물을 저으며 침묵했다. 거기서 가볍게 고개를 들면, 퍽 익숙한 얼굴이 있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어릴 적의 모습이 그대로 스며들어있는 그녀는 가만히 눈을 좁혔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게 되어있어. 그런 말이 시선 속에 넘칠 정도로 담겨, 머리 속을 적신다. 비보라는 거기서 한 발 물러서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또, 사라지게 두고 싶지도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연히, 나는 신이 아니지요. 사라져갈 이들을 내가 붙잡는건 불가능해요."

타고난 머리색을 바꿀 수 없듯이.
시간을 뒤로 돌려버릴 수 없듯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듯이.

"하지만 그들을 만나고,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함께하고, 믿을 순 있어요."

어설픈 허세는 접어두고 진심으로 마주한다. 고작 그 정도만 했어도 충분했을텐데. 제 풀에 상처받아 지쳐버린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오랫동안.
죽음이 스스로 찾아올 때까지.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늦게 알았다고 하여 눈을 돌릴 순 없어요. …이제부터라도  기억을 오래도록 남길거에요. 제 머릿 속 뿐만 아니라 왕궁에, 온 나라 전체에 흔적을 새기겠어요. 여기에 그들이 웃고 울고 때로는 분노하며, 전설이 아닌 실재로서 우리와 함께 했노라고. "

그런거라면 딱히 외교관이 아니었어도 좋았을텐데.

"권력은 있는 편이 좋으니까요."

속물.

웃음소리가 조용히 번진다. 스푼은 회전을 멈췄다. 어두운 창밖이 서서히 푸른 빛을 머금으며 밝아진다. 비보라는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 말아요. 잘 할 수 있어요."

네 걱정 따위 안 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비보라는 가만히 웃고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아침은 조용하다. 

딱 자신의 몸만큼 패여 온기를 담고있는 침대 바깥으로 나온다. 지난 밤에 닫아두었던 창문을 열자 흙냄새가 진하게 배인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제는 비가 내려도 한기 대신 온기가 올라오는 시기가 된 모양이다.

…하긴 봄이 올 때도 되었지. 
끝나지 않는 겨울 같은 건 없으니까.

멀리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든다.
비보라는 그 고요한 소리를 오랫동안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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