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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신(2015)

그녀가 수녀에서 탐정에 이르기까지

푸른 바닷가.

당신은 그곳에 쓰러져있었습니다. 검은 머리덮개를 쓴 수녀는 차분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 속이 진흙이 꽉 들어찬 것 처럼 무거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습기 하나 없이 메말라 벌어진 입술에 수녀가 물잔을 기울여 주었다.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무튼 푹 쉬시고 기력을 회복하세요. 용건이 있으면 머리맡의 종을 울리시구요."

그녀는 힘겹게 눈을 돌려 제 머리맡에 놓인 종을 본다. 매끈한 곡선을 가진 종은, 도저히 제 손이 가 닿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너무나 피곤했다.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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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현.

몇날 며칠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가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세 글자 뿐이었다. 나머지는 찐득한 진흙 속에 파묻혀 버린 것 마냥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물컵 한 잔으로 그녀의 입술을 축여주고 마른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는 수녀의 손길은 꼼꼼하고 담담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으신 모양이군요. 경찰에 연락을 넣어놓았습니다. 그쪽에서 어떤 연락이 오거나 기억이 돌아오실 때까지는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세요." 

그녀는 어미로부터 모이를 전달받는 아기새처럼 목을 꼴깍였다. 

=

경찰로부터의 연락.

"말씀하신 유가현이라는 이름의 20대 여성에 대한 실종신고는 들어와있지 않습니다." 

수녀원으로부터의 답변.

"알겠습니다."

=

좀 더 치열하게,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기억을 찾으려 노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기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 탓이었다. 자신의 부모, 출신, 그 모든 것이 포함된 20년분의 기억이 몽땅 사라진 사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때문인지, 수녀원에서는 알음알음 그녀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걸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라. 그녀는 아무 상처도 없는 손목을 쓸어내리며 되뇌었다.

나는 스스로 죽고싶었던거야.
그래서 바다로 뛰어내렸지만, 실패해버린거지.

꽤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자살하려던 사람이 수녀가 된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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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교리와 전례와 성경과 예절과 성가를 공부했고 다른 수녀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차근차근 친해졌다. 그 중에는 화란이라는 이름의 소녀도 있었는데, 자신도 나이가 되면 수녀가 될 거라며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르곤 했다. 이윽고 수련수녀가 된 그녀는 이제까지와 비슷하지만 좀 더 엄격한 일상을 보냈다. 

틈틈이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일부러 입 밖에 내어 말하는 것이 번거로운 정도의 소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수녀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을 때, 그때만큼은 조용하기만 하던 수녀원도 술렁일 수 밖에 없었다.

두 가지 파벌이 갈렸다. 하나는 사건해결에 중요한 단서를 발견해낸 그녀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고 바깥세계에 발을 뻗으려 하는 그녀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수녀원장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자매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이 수녀원에 소속된 수녀, 유스티나입니다."

유스티나, 라는 것은 그녀의 세례명으로 훈족의 침략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성 아우레우스의 누이의 이름이다. 처음으로 세례명을 받은 이래, 그녀는 자신이 기억해낸 유가현이라는 이름보다 유스티나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수녀원장은 말없이 주름진 손가락 마디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요즘 자매님은 자신을 "가유다"로 부르는 데에 더욱 신경이 쏠려있지 않으신가요?"

가유다, 라는 이름은 그녀가 이른바 "탐정"일을 할 때 쓰는 가명이다. 유래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열 세번째 제자이자 배신자인 '가롯 유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굳이 그런 이름을 지은 이유는, 그것이 "수녀에게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름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녀의 장난기가 다소 섞여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슬며시 어깨를 움츠렸다.

"범죄를 해결하는 것. 그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분은 범죄를 밝히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할 일은 이 세상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라 한들 여기는 섣불리 어떤 말을 꺼낼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자매님. 수녀가 될 것인지, 아니면 탐정이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니게 될 테니까."
"...저는,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건가요?"

그녀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수녀원장은 오랫동안 침묵하다 한숨처럼 말했다.

"유스티나 자매님의 그것은 오만입니다."

낡은 문은 삐걱이며 닫혔다. 그녀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수녀이자 탐정이면 안되는걸까? 범죄를 해결하고, 범죄자의 죄를 용서하고, 피해자의 마음을 보듬는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어느 한 쪽을 버려야 하는걸까?

그녀는 이후로도 몇 건의 사건을 해결했다. 얼굴없는 수녀 "가유다"의 이름이 서서히 유명해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수녀원장은 이따금 그녀를 보고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고 종신서약을 맺은 그녀는 정식으로 수녀가 되었다. 

그리고 수녀원이 불길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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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나무와 신앙이 불에 타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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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것"을 떠올렸을 때 그녀는 잠들어있었고, 이내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것"은 참으로 지독한 악몽이어서 그녀는 다시 한번 잠들기 위해 몇 번이고 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때마다 "그것"은 어김없이 되살아났다.

평범한 부모님과 여동생.
누군가에게 반했던 16살의 여름.
사랑을 따라 무작정 집을 나갔던 가을.
그와 함께 저질렀던 무수한 범죄의 계절들.
이윽고 그가 자신의 손을 붙잡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너를 사랑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고싶어. 해줄 수 있지?"

그녀는 기꺼이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깨어났을 때는 공포에 질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그의 시신을 시멘트 사이에 발라넣으며 울었던 밤이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어느 일원들의 제안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환한 낮이었다. 이어지는 악행과 범죄의 나날은 밤낮과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않고 뒤섞여, 그녀의 공백을 빈틈없이 차곡차곡 메꾸어갔다. 그리하여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 조각이 한데 맞추어져 거대한 그림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는  '크리미널'이라는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범죄자.
아니, 살인자.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 공포는 이윽고 분노가 되어 과거의 자신을 향했다. 왜 그런 짓을 한거야, 어째서 그런 마음을 먹은 거야. 그러나 답은 언제나 확고하게 나와있었다.

즐거우니까. 그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사랑했으니까.

이미 지나간 과거를 향해 손톱을 세우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녀는 이제 현실을 응시해야 했다. 어쩌면 이 화재는 그녀를 향한 크리미널의 무언의 신호인지도 몰랐다. [대체 언제까지 늑장을 부릴거냐. 어서 범죄를 저질러라.]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고 싶었다. 그런 범죄자 따위 내가 아니야!!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홀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귀가 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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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녀에게는 "가유다"라는 이름이 있었다. 세례명 "유스티나"를 대는 그녀에게 본명이 무엇이냐고 캐묻는 수녀들도 없었다. 그녀는 탐정회에 정식으로 자신을 등록했고 등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녀탐정"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렇다. 자신은 "수녀"이자 "탐정".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탐정으로서 사건을 추리하여 밝혀낸 뒤, 수녀로서 범죄자의 죄를 용서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감싸안는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과거의 자신이 꿈 속에서 키득거렸다.

"그건 전부 위선이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매님."
"가장 추악한 범죄자인 주제에, 선의의 가면을 쓰고 남을 용서하느니 마니 하는 꼬락서니라니."
"순진한 척 하지 말라고. 속으로는 이러면 자기 죄가 좀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계산하고 있으면서."
"나는 너야. 사랑에 눈이 멀어 인륜을 저버린 구제할 길 없는 범죄자.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고."

깨어나고보면 항상 새벽이었고 그녀는 울부짖고 싶은 심정으로 기도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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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원 대신 초대장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