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기타

[보르조이 기획/가미]유메닛키, 마지막 페이지(上)

"호러야."

"…한치의 망설임도 없구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호러라고."

"그렇게까지 호러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럼 미로 판타지 호러."

"수식어구가 늘었을 뿐이잖아…."

 

그렇게나 무서운거야? 웃음 섞인 목소리를 부루퉁하게 외면하며, 가미는 근처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렇게 했다간 자는 동안 충분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 건강에 상당히 좋지 않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알 바 아니다. 이불 바깥쪽에서 자신을 부르던 후히키가 마침내 포기한 모양인지 전등의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암흑에 잠겼다. 내일 있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자두는 편이 좋다. 의식을 잠의 세계에 빠뜨리기 위해 온몸의 노곤함을 있는대로 끌어올리던 가미의 머릿속에 한 줄의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거 꿈에 나올 것 같아…."

 

=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었어.

 

눈에 익은 방 한가운데에 선 채, 가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 앞에 있는 침대 위에 앉아있던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꿈이라면 빨리 깨고 싶은데, 아무리 뺨을 꼬집어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눈 앞에 있는 소녀의 시선이 바보를 보는 종류의 시선으로 변하긴 했지만.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가미는 입을 열었다.

 

"나, 뭘 해야하는 거야?"

 

설마하니 NASU를 플레이하라던가 하는건 아니겠지. 소녀는 가미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손잡이를 아무 망설임 없이 돌리는 걸로 보아하니 여기는 역시 마도츠키의 꿈 속인 모양이다. …이건 당연한 건가. 아무튼 마도츠키의 뒤를 따라 현관문을 나선 가미는 바깥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겨울…?!"

 

입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곳은 겨울의 공간이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나온 방문은 어느 사이엔가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거기에 더욱 당황해 앞을 돌아본 가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자전거를 꺼내드는 마도츠키.

 

"어, 저기, 문이 없어졌는데?!"

 

마도츠키는 흥미는 없지만 예의상 반응해준다는 티가 팍팍나는 표정으로 가미의 뒤를 한번 본 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응, 없어졌네. 그런데 그게 뭐?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 신경 안쓰여?"

 

반응없음.

 

"…안 쓰이는 모양이네…."

 

하긴 여긴 꿈이니까 별 상관없나. 슬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려는 가미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마도츠키가 그의 옷소매를 쭉쭉 잡아당기며 가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린 다음 말없이 자전거를 가리켰다.

 

"…나더러 운전하라고?"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끄덕.

 

"하지만 이건 일인용이잖ㅡ"

 

ㅡ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전거의 형태가 일순 흐물흐물해지더니 이윽고 두명이 타도 너끈할 정도의 크기로 바뀌었다. 

나이스 드림 퀼리티.

 

"……."

 

응, 이건 꿈이니까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은 관두자. 수험에서 모든 답안을 한 칸씩 밀려적은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정신이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험생과 비슷한 도피성 사고를 하며, 가미는 자전거에 올라타 힘껏 페달을 밟았다. 뒤쪽에 올라탄 마도츠키가 손가락을 뻗어 대강의 행선지를 가르쳐주었다.

 

=

 

계속 페달을 밟다보니 주위는 어느 사이엔가 눈쌓인 설원이 아니라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모노톤 배경으로 바뀌어있었다. 이쯤되면 상당히 이동했다고 생각되는데도 전혀 숨이 차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꿈은 꿈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페달을 밟는 가미의 뒤에서 방향을 제시해주던 소녀의 손가락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여기서 멈추라는 뜻일까. 자신의 직관에 따라 자전거를 멈춘 가미는 양쪽이 뚫린 작은 동굴과 그 아래에서 서성이고 있는 묘한 생물체를 발견하고 여기가 어디인지를 기억해냈다.

 

마도츠키는 이미 자전거에서 내려 그 이상한 생물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둔탁하게 빛나는 식칼. 그 다음에 이어질 상황을 예감한 가미가 눈을 질끈 감는 것과 동시에 기묘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윽고 가미가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마도츠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동굴의 한쪽입구로 걸어가고 있었고, 서둘러 그 뒤를 쫓으려하던 가미는 자신이 그냥 동굴의 반대편으로 쑥 빠져나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마도츠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 하긴 찌른건 내가 아니라 마도츠키니까…."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대충 근처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가미는 마도츠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어느샌가 되살아난 기이한 생물체가 또 다시 동굴 근처에서 어슬렁 거렸다. 정말로 학습능력없는 녀석이로구만. 기다리고 기다리다 질린 가미가 이대로 녀석을 자전거로 한대 치고 지나간 뒤 마도츠키를 쫓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세번쯤 고려해봤을 무렵, 동굴의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뭐하다 온거야?"

 

가미의 질문에 마도츠키는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능숙한 동작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는건 기분 탓이려나. 살짝 고개를 기울인 뒤, 가미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눈 앞에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동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도츠키의 손가락이 똑바로 앞을 가르켰기 때문에, 가미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소녀가 있었다.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은 가미가 후진을 할 생각으로 고개를 뒤로 돌린 순간, 그는 신호등이 되어있는 마도츠키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모노톤의 소녀,

동굴 속의 좁은 외길,

마도츠키의 신호등.

 

"…어, 저기. 잠깐만요 마도츠키씨ㅡ? 우왁 하지마하지마하지마하지마 나에게는아직마음의준비가되어있지않ㅡ"

 

마도츠키는 자비심 없이 붉은 등을 켰다.

 

…이후의 상황은 상상에 맡깁니다.

 

=

 

그리고 설원.

 

"다음은 역시 여기인가-"

 

한껏 소리를 지른 탓에 약간 칼칼해진 목으로 중얼거리며, 가미는 거세게 페달을 밟았다. 방금 전에 보인 추태 덕분에 힘이 빡 들어가 있어서 주위풍경이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나 달리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은걸 보면 역시 이건 유메닛키 퀼리티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마도츠키를 흘끗 돌아본 뒤, 가미는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풍선에게로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인디언풍의 천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미는 집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고, 마도츠키는 여지껏 그래왔듯이 가볍게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홀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펙트 대신에 마도츠키의 '친구'를 모으는게 주목적인 모양이다. 가미가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모노코'때 목격한 일 때문인데, 그때 신호등의 붉은 색이 켜짐과 동시에 이상한 형태가 됐을 '모노코'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나지않아 가미가 필사적으로 뒤를 보려고만 하고있었을 때, 마도츠키가 앞으로 넘어가면서 강제로 가미의 얼굴을 앞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때 본 바에 의하면 어디를 보는 건지 잘 알 수 없는 눈으로 마도츠키의 붉은 빛을 바라보던 모노코가 다섯개의 팔중 두개의 팔을 움직여 하나의 팔로 마도츠키를 살짝 건드린 순간.

 

모노코는 그대로 희미하게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

 

갑작스런 소멸에 가미가 당황하는 사이 신호등에서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 마도츠키가 다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가미는 영문을 알 지 못한채 반사적으로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가미는 조금 전 자신이 들렀던 장소에서도 '모노에'라고 불리던 존재가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거기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일까. 뒤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도츠키의 두갈래 머리카락 뿐이었다. 아마 물어보더라도 대답해주지 않겠지. 스스로 추측하고, 가미는 그저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장소에 도착했다.

 

"이 안에 있던 아이가… 분명 포니코, 였지?"

 

금발 포니테일 소녀와 아기자기한 방을 떠올리고, 가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히키의 제의대로 방을 몇번이나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을 때 소녀가 알 수 없는 괴물로 돌변했을 때의 순간이 겹쳐 떠오른 탓이다. 후히키 이 나쁜 놈. 여기서 깨면 반드시 한대 때려주고 말테다. 입 속에서 불만을 웅얼거리는 사이, 마도츠키가 천막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 이제 다 끝났어?"

 

마도츠키는 한동안 가미를 쳐다봄으로써 가미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다음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탔다. 아직도 남아있는 거야? 좀 심하게 절망적인 상황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가미는 또 다시 페달을 밟았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었더라면 근육통이 장난아니었겠다는 생각으로 도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