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차 창작/기타

[틱택토/헨리알버]한여름밤의 꿈

-틱택토 엔딩까지 봐야 이해되는 내용입니다.


=====================================================


헨리는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한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덜컹거리는 소음. 억눌린 기침과 손가락 사이로 배어나오는 질척한 무언가. 폐병 환자처럼 쿨럭이던 검은 머리의 청년은 순식간에 한 웅큼의 피를 토해냈다. 메이드들이 깨끗하게 빨아놓은 의복 위로 떨어진 핏방울은 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남자는 순간 제 입을 가렸던 손바닥에 가득 고인 피를 보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짧게 웃었다. 이거 꽤나 악질적인 장난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실이 끊어져버린 마리오네트처럼 무너져내렸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하게 변해갔다. 헨리는 미친듯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어딘가로 확실히 멀어져가고있는 그를 불러세우려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붉은 핏줄기가 그의 파리한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안고 있던 그의 몸에서 완전히 생기가 사라진 순간, 헨리는 마음 속 깊이 절규했다.

 

이건.
이건 아냐.
돌아가야 해.
돌아가게 해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

 

"…그래서 제가 한 말 따위 듣지도 않았다 이거군요."
"이건 남작님 잘못도 있는 겁니다! 하필 제가 그런 꿈을 꾼 날에 한해서 그런 장난을 치시다니!"
"반복해서 말하지만, 제가 장난을 친게 아니라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설마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사레 한 번 들리지 않았다고 하진 않겠죠, 헨리?"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조심하셨어야죠! 전 악몽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구요!"
"전 당신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습니다. 옷 앞섶을 토마토 주스로 더럽힌 채 왠 남자에게 들려 시내를 전력질주 당하다니, 유래 없는 창피라고요."

 

자기 혼자 멋대로 폭주한 헨리가 마구잡이로 치고 들어간 곳의 의사 선생님이 더없이 인자하신 분이셨다는 부분이 더더욱 부끄럽다. (허허허, 좋은 옷인데 아깝게 됐구려. 토마토 얼룩을 지우는 데에는 과탄산소다가 좋다고들 하지요. 저 아래 톰슨네 가게에 가면 싸게 팔거요. 그리고 친구를 위하는 그 마음을 소중히 하시게. 허허허.)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바람에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알버트는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남자가 유달리 조용하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헨리씨?"
"진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사레들렸던 것 뿐이라니까요."
"하지만 제 꿈에서 알버트씨는…."

 

헨리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버트는 그 모습을 보다 깍지낀 손을 만지작거렸다. 급한대로 시내에서 수배한 마차는 평탄한 여름 오후의 외곽 길을 달각달각 달려가고 있었다.

 

"언젠가 남작님이 말씀하셨었죠. 제가 죽는 모습을 최소 스무 번은 넘게 지켜보셨다고."
"음…. 그랬었죠."
"그땐 그냥 신기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죠. 그건 신기한게 아니었어요."

 

마차 바닥을 내려다보는 헨리의 목소리는 평소에 비해 상당히 가라앉아있었다. 알버트는 아래로 흘러내린 그의 금발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마차가 달려가는 소리는 시계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와도 닮아있었다. 이따금 섞이는 덜컹거리는 진동만이 여기가 시계의 내부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어요. 꿈에서 있던 그 일이 정말 일어나면 어쩌지? 나는 또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는건가? …무서울 정도로 불안했어요. 심장에 칼이 박히는 기분이었죠. 그래서 남작님을 찾아왔는데…."

 

거기서 알버트가 거하게 기침을 하며 앞섶을 토마토 주스로 더럽히고 있는 광경을 보고 머리가 새하얘졌다는 흐름이다. 알버트는 알버트대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키는 바람에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이 성품 좋은 전 수사관은 상당한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알버트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괜히 흔들리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의 풍경은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남작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처절한 경험을 반복하신 끝에 저를 구해주신 거에요. 그 사실이 지니는 무게를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이제라도 제 수고를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가벼운 농담 투로 던진 말에 헨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가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어째 이야기가 낯간지러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요. 헨리 당신이 본 그건 단순히 질 나쁜 개꿈입니다. 적당히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제 목숨이 위협받을 일도 없으니 그런 비장한 얼굴로 맹세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 진지할 때는 쓸데없이 분위기가 있어서 자칫 휩쓸려 갈 것 같다고.
…하는 건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알버트라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다.

 

"저는 남작님이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봤을 때 나보다 목숨이 위험한건 헨리 아닙니까? 탐정이잖아요."
"그건 명목상 직업이고, 실제로는 시인이죠."

 

뒷말은 듣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목숨을 아껴야 하는건 나보다는 당신입니다. 기껏 구한 당신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당신 장례식장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지도 몰라요." 
"무, 무서운 소릴 태연하게 하시네요."
"그러니까 목숨 조심하라는 얘깁니다."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괜한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는다. 알버트는 풀죽은 대형견같은 모양새의 헨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르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여름 햇살은 모든 대지에 공평하게 쏟아져내리며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