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워치는 어릴 적 기묘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거대한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한 꿈 속에서 그는 부모님이나 미쉘라 없이 달랑 혼자였고, 대신 누군지 알 수 없는 키 큰 남자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레오나르도는 거기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름 모를 남자는 어린 레오나르도와 함께 여러가지 놀이기구를 타주는 것은 물론 가게에서 파는 먹거리들을 사주었고, 레오나르도가 피곤하다고 칭얼거리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등에 업어주었기 때문이다. 아침과 밤의 하늘이 뒤섞인 놀이공원의 하늘 아래, 남자는 오로지 레오나르도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꿈을 몇 번이고 꾸었다.
남자는 레오나르도의 작은 몸을 가볍게 들어올려 목마를 태워주었고,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가 하면 자그마한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며 엷게 웃기도 했다. 그때마다 레오나르도는 키득거리며 몸을 빼거나 맞장난을 쳤고,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그에게 부비기도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마치 열병에 걸린 것 마냥 가슴이 두근거리는 때도 있었다.
며칠간 드문드문 이어지던 꿈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본디 깨어나면 연기처럼 흩어지곤 하는 것이었기에 레오나르도는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실의 레오나르도에게는 미쉘라를 돌보아야 한다는 큰 책임감이 있었다. 현실의 책임감 앞에서 꿈 속의 기억은 대개 아침햇살을 받은 눈처럼 녹아내리기 마련이었고...
(날 잊으면 안돼.)
...하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불 꺼진 놀이공원에서 말없이 빛나는 네온 사인같은 흔적들.
(기억해.)
거대한 놀이공원의 잔상과 작은 열기를 품은 말들은 잊혀질 즈음마다 물거품처럼 떠오르며 레오나르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허나 아무리 오랫동안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한들 꿈에서 만났을 뿐인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을 리 없다. 레오나르도는 이따금 그 꿈의 흔적을 더듬어보며 세상에는 참 기묘한 일도 다 있다고 홀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몇 년 뒤, 뉴욕이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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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사렘즈 롯에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난다고들 한다. 레오나르도가 헬사렘즈 롯의 경계도시에서 뜻하지 않게 <신들의 의안>을 얻어버린 일도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기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반년동안 HL에서 살아온 레오나르도가 소닉과의 추격전에서 우연히 재프 렌프로와 마주치게 된 것이나, 고르고 골라 그날 그 시간에 레오나르도와 닮은 외모의 '조니 렌디스'가 라이브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다는 일 또한 넓은 의미에서 기적이라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것 또한 HL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보아야 할까.
레오나르도는 눈 앞에 잔뜩 쌓여있는 서류를 날짜별로 구분하며 건너편 책상을 흘끗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보고서로 추정되는 서류를 유심히 살펴보다 다른 서류를 꺼내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보고, 이내 펜으로 뭔가를 죽죽 그어내린 뒤 메모하는 남자는 레오나르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행여 눈이 마주칠까 재빨리 고개를 돌린 뒤, 레오나르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붕대에 귀가 파묻히다시피해서 잘 알 수 없었다.
두번째로 들었을 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세번째로 들었을 때에는 그 목소리가 맞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벌써 십 년은 넘게 지난 꿈의 기억. 자신을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신신당부하던 그 목소리. 이제는 유년기의 기묘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목소리는 뜻밖에도 라이브라의 상사인 스티븐 A. 스타페이즈의 목소리와 완벽하게 일치했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래 전부터 기억나지 않던 남자의 얼굴도 거짓말처럼 선명해졌다. 그것이 스티븐의 얼굴이었음은 물론이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면 미쉘라에게 보내는 편지에 쓸 이야깃거리가 하나 늘어나는 정도에서 끝났으리라.
문제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온전히 하나로 겹쳐진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 마지막 기억에 있었다.
(날 잊으면 안돼.)
(기억해.)
(사랑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목소리는 마치 연인들 사이의 속삭임처럼 낮고 부드러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쥔 서류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얼굴도 열이 올랐는지 묘하게 뜨겁다. 어쩌면 귀까지 붉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사건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레오나르도는 점퍼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자신이 구겨버린 서류를 꾹꾹 눌러폈다. 어릴 때 꾼 꿈속의 인물이 알고보니 미래의 직장 상사였다는 걸로도 모자라 이미 자신에게 고백까지 했다는 전개라니, 이런건 미쉘라가 즐겨보던 순정만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기억이고 뭐고 간에 그건 전부 꿈 속의 일이다. 모든 것은 그저 놀라운 우연의 일치일 뿐, 현실의 스티븐에게는 자신이 꾼 꿈의 기억 따위는 있지도 않을 테니 얼른 잊어버리고 미쉘라의 눈을 찾는데만 집중해야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놈의 심장은 매번 가만히 있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지. 자기 자신을 향한 불평을 토해내며 서늘한 손등으로 뺨을 식히던 레오나르도는 어느샌가 서류를 처리하던 손을 멈춘 스티븐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조용히 웃고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기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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