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구스의 '솔로몬 그랑디'를 약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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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볼릭. 열 세번째 날.
사모님의 드레스 솔기가 튿어져있어서 에레네드 부인의 의류점에 수선을 맡겼다.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 속에는 천으로 싼 머리핀이 들어있었다.
동생으로부터 온 소중한 생일 선물이다. 작은 쌈지 속에 소중히 보관했다.
저녁 무렵에는 주인님이 보이지 않으셨다. 어딘가로 사냥을 나가신 걸까?
도련님은 오늘도 얼마 드시지 못하고 식사를 물리셨다.
임볼릭. 열 다섯 번째 날.
저녁 무렵 메이드장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어 조금 긴장했는데, 알고보니 별채의 관리인원에 들어갈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였다.
일은 고될지도 모르지만 주어진 규칙만 잘 지킨다면 정식 월급에 웃돈을 얹어줄 수도 있다는 말에 냉큼 지원했다.
하지만 규칙을 어기면 봉급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거라는 엄포를 들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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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에서의 기본 규칙.
[주어진 일에 충실할 것.]
[중간에 일을 함부로 그만두지 않을 것.]
[쓸데없이 파고들지 말 것]
[별채에서 보고 들은 것을 외부에서 말하지 않을 것.]
[이상의 규칙에 의문이나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것.]
=
알반 에일레르. 세번째 날.
별채에서의 근무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저택보다 인원이 적으니 오히려 이쪽이 더 편안한 것 같다.
그나저나 별채에 있는 그 어린 아이는 누구일까?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까만 머리에 검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러고보면 도련님과 나이대도 얼추 비슷하다. 혹시 주인님의 숨겨둔 자식? 사모님은 이걸 알고 계시는걸까?
알반 에일레르. 일곱번째 날.
오늘은 침대 시트를 모조리 빨았다. 딱 하나 있는 남자 견습 집사가 아주 유용했다.
마당에서 한참동안 이불을 밟으며 깔깔대고 있는데 창가 한쪽에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무척이나 심심해보이기에 같이 빨래를 하자고 불렀지만 쭈뼛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진 않았다.
어쩐지 조금 안타까웠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식사도 잠도 전부 따로따로다.
그게 규칙이라지만, 아이를 늘상 홀로 내버려두는건 불쌍하다.
알반 에일레르. 아홉번째 날.
모두에게 얘기를 꺼내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 아이와 함께 밥을 먹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뻣뻣하게 굳어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금새 빵을 먹고 스튜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기뻐했다. 어릴 적의 내 동생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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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인. 열 여섯번째 날.
오늘도 언제나처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재우려 나서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나가보니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 서있었다. 건넨 편지를 읽어보니 사모님의 소개로 아이를 교육시키러 온 사람이라고 한다.
어쩐지 차갑기 그지 없는 인상이다. 조금 망설여졌지만 사모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으로 들였다.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던 아이는 가정교사가 건네는 인사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이며 머리를 숙였다.
벨테인. 열 일곱번째 날.
가정교사에게서 고용인들과 아이가 함께 식사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핀잔을 들었다.
앞으로는 그녀가 함께 식사를 하며 식사예절을 가르킬 거라고 한다. 물론 다른 교육도 함께.
더불어 아이를 함부로 부르지 말고 아가씨라는 호칭을 쓰라는 둥,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아이는 사뭇 거북해하는 눈치였지만 이것이 사모님과 주인님이 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아이는… 주인님의 사생아일까?
벨테인. 스물 세번째 날.
가정교사가 온 뒤로 아이와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확 줄었다.
별채에는 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라서 남는 시간에는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아이는 지금쯤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아가씨라고 부르라지만, 역시 아직은 입에 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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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반 헤루인. 여섯번째 날.
오늘 시장에서 어떤 소문을 들었다. 북쪽 작은 마을에 부모도 없는 아이들이 속속 나타난다는 것이다.
들은 말에 의하면 그런 아이들을 '별에서 온 존재'라는 의미의 '밀레시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왜 그냥 '고아'라고 부르지 않는걸까 싶었는데 그들은 우리와 달라도 한참 다른 존재라나.
일정한 나이에서 계속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죽어도 죽지 않으며 심지어 모습을 바꿀 수도 있다는데… 조금 기분나빴다.
하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건 조금 부러웠다.
우리 불쌍한 어머니는 동생을 낳자마자 병에 걸려 돌아가셨으니까.
알반 헤루인. 열 두번째날.
같이 일하던 동료 메이드가 크게 불평을 했다.
아이가 하도 자신의 리본에 호기심을 보이기에 건네주었더니 통 돌려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것일테니 시간을 두고 찬찬히 돌려받으라고 해주었다.
동료는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인데 왜 아이가 써야하냐며 입술을 삐쭉였다.
알반 헤루인. 스물 여섯번째 날.
저택에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 아이를 위한 드레스인 것 같다.
공부가 끝난 오후 시간에 짬을 내어 입혀보니 무척 잘 어울렸다. 아이는 기쁜 표정으로 몇 번이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니 갑자기 고향에서 주점 일을 돕고있을 동생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찍부터 어머니를 여읜데다 하나뿐인 가족과 멀리 떨어져있어 많이 외로울텐데도 의젓하게 자라나는 착한 아이.
생각해보면 얼마 안 있어 곧 동생의 생일이다.
마음 같아선 직접 만나러가고 싶지만 맘대로 휴가를 낼 수는 없는 처지인지라
고민 끝에 저축해둔 월급으로 이제까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물을 전해주기로 했다.
몸은 건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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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사. 열 세번째 날.
동생을 위해 사두었던 오르골을 아이에게 주었다. 아니, 빼앗겼다고 해야하나?
잡화점에서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사온 그것을 발견한 아이가 자기도 갖고 싶다고 떼를 쓴 것이다.
돈이 빠듯하게 남아있는터라 줄 수도 없어서 계속 거절했더니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는 방으로 쿵쿵대며 걸어가버렸다.
나중에 인형이라도 사주자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방을 찾아온 가정교사가 다짜고짜 오르골을 빼앗아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했지만, 문제를 일으켜 잘리고 싶지 않다면 입다무는게 좋다는 경고만 돌아왔다.
내가 얼마나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선물인데!!
교사가 오르골 대신이라며 던져준 주머니 안에는 그 반의 반 값어치도 안되는 큐빅 퍼즐이 들어있었다.
동생은 음악을 듣는걸 더 좋아하는데….
너무 속상하다. 적어도 내일 모레까진 선물을 보내야 하는데 어쩌면 좋지?
일단 내일 아이를 만나보자.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루나사. 열 네번째 날.
당했다.
동생의 오르골은 어느 틈엔가 내가 스스로 선물한게 되어있었다.
선물을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요?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증스런 소리를 할까! 덕분에 나는 동생에게 아무것도 보낼 수가 없게 됐는데!
게다가 그 아이는 말로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느니 하면서도 단 한번도 나에게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자신은 사생아더라도 귀족의 핏줄이고, 나는 아무리 가까웠어도 한낱 메이드에 불과하다 이건가?
화가 나서 그 길로 방을 나왔다.
너무 분하면 눈물도 안 나온다는걸 처음으로 알았다.
루나사. 스물 아홉번째 날.
아가씨는 오늘도 춤 연습에 삼매경이다. 모든 귀족 집안 아이들이 배우는, 소위 우아한 생활을 위한 것.
그 뒤에서 우리들은 그릇을 씻고, 음식을 조리하고, 옷을 빨아 널며 그녀의 생활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간다. 우리의 물품 또한 그렇다.
동생의 오르골 사건 이후, 아가씨는 우리의 물건을 눈독 들인 뒤에 가정교사를 통해 빼앗는 일에 완전히 재미가 들리고 말았다.
견습 집사는 저택에 처음 들어오면서 받은 넥타이핀을 빼앗겼다. 요리를 도맡는 부인은 딸에게 보내려던 찻잔을 고스란히 건네주고 말았다.
자신의 리본이 쓰레기 범벅이 되어있는걸 발견하고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라며 반항하고 불같이 화를 내던 동료 메이드는 어젯밤 심하게 두들겨 맞은 뒤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벌었던 봉급도 전부 몰수된다고 들었다. 함부로 일을 그만둔 댓가라나.
이 별채는 사생아 아가씨의 궁전이다. 우리는 그 궁전을 움직이기 위한 부품.
차라리 저택에 있을 때가 더 평온했다. 적어도 거기선 우리의 물건을 억지로 뺏아가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늘따라 도련님이 생각난다. 연약하고 가엾으신 분. 몸은 좋아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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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반 엘베드. 두 번째 날.
당장 마을로 돌아가고싶다!
지난 달부터 우리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있다니!! 난 어떻게 그런 것도 새까맣게 몰랐을까?
마을에서 우연히 여행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동생이 숨을 거둔 뒤에나 알았을 것이다. 아니, 어쩜 무덤에 들어간 후에도 몰랐겠지!
그 말을 듣자마자 너무 놀라서 들고있던 바구니를 통째로 떨어뜨렸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열에 들떠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이제는 별채의 총 지배인이나 다름없는 교사에게 울며 불며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럼 의사를 보내드리죠. 하지만 당신을 고향 마을로 보낼 순 없습니다. 전염병이나 세균이라도 옮아오면 아가씨에게 안 좋으니까."
그 놈의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왜 나를 보내주지 않는거야! 동생이 나를 애타게 기다릴텐데!
의사를 보내준다는 말도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돌팔이는 커녕 약재도 보내지 않겠지?
초조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자.
이딴 사생아의 저택에는 일분 일초도 있기 싫다.
알반 엘베드. 세 번째 날.
어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자마자 몰래 짐을 챙겨 나오는데 뒷문 근처에서 사생아와 마주쳤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교사에게서 얘길 들었는지 저택에 내가 없어도 괜찮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게 아닌가!
맹랑한 꼬맹이같으니! 나같은건 얼마든지 대용품을 찾을 수 있다 이거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 뺨을 후려치고 거세게 몸을 밀쳐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턱에 뒤통수를 박은 사생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사생아의 코끝에 대보니 숨을 쉬고있지 않았다.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은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생아가, 숨을 몰아 쉬는게 아닌가!!
너무 놀라서 그대로 달아났다. 고향에 돌아온 지금도 손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 와중에 짐은 챙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이제 더 이상 그 저택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알반 엘베드. 일곱 번째 날.
동생의 병세는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일을 돕고있긴 하지만 일손이 턱없이 모자르다.
간신히 마을로 들어온 외부의 힐러가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해봤지만 전부 헛수고였다. 너무나도 절망적이다.
알반 엘베드. 열 한번째 날.
동생의 옆 침대를 쓰던 아이가 죽었다.
이걸로 아이들 사이에서만 벌써 4명째 사망자가 나왔다.
내일은 내 동생이 저렇게 차갑게 식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서 참을 수 없다.
알반 엘베드. 열 여섯번째 날.
라이미라크시여. 제발 저희를 도와주소서.
당신의 불쌍한 어린 양들을 지켜 주소서.
이 게으름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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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인.
겨우 알았다.
어째서 좀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던걸까?
서두르자.
덧없이 숨을 거든 착한 동생과 불쌍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어차피 되살아나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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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볼릭에 이 세상에 갓 내려온 밀레시안을 구해 정성껏 키운 뒤 삼하인에 피를 뽑아 마시면 불로불사를 얻는다.
이것이 과거에 유행했던 '밀레시안 그랑디'의 주된 골자다. 밀레시안이 처음 이 세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늙지 않는 육체. 죽음을 모르는 삶,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외모 등으로 우리 투아하 데 다난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경외나 두려움 뿐만 아니라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진 귀족들의 어두운 탐욕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탐욕심이 불타오르며 만들어낸 것이 이 괴소문 '밀레시안 그랑디'이다.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불사를 얻는다던가, 희귀생물의 뿔을 갈아먹으면 불로불사를 얻는다는 이야기와 얼추 비슷해보이는 이 이야기의 가장 추악한 점은 그 대상이 되는 '밀레시안'이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점 뿐만 아니라 투아하 데 다난이 밀레시안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이 철저히 악용되고있다는 사실이다. '밀레시안 그랑디'가 끝난 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밀레시안은 너무나 극심한 충격과 배신감에 시달렸지만 실제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기에 투아하 데 다난 귀족들의 죄를 제대로 증명할 수 없었다. 상처자국이 나아버리기에 객관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변변한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해도 귀족들의 교묘한 화술에 휘말려 광인狂人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내게 이 일기장을 전해준 것은 그들에게 버려진 이후로 마음믜 상처를 안고 살아온 밀레시안이었다. ‘그랑디’ 사건 이후 극심한 충격으로 소울 스트림에서 몇 년 가까이 나올 수 없었던 그녀는 탄광마을의 한 구석에서 오래 전 알고지내던 메이드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자신이 귀족에게 불려왔던 이유, 가정교사가 완고하게 메이드와의 교류를 막은 이유, 고용인들이 점차 자신에게 차가워졌던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기장의 주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던 가정교사가 직후 자신을 잔혹하게 처리했던 이유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이런 오해가 빚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무렵 상류층 사이에선 행여나 밀레시안과 친해진 고용인이 그들을 두둔하는걸 막기 위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시키는 것이 일종의 놀이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경우엔 어느날 저택을 찾아왔다는 '가정교사'가 주된 역할을 도맡았을 것이다. 갑자기 쳐들어와 물건을 뺏고는 밀레시안에게는 그들이 스스로 양보했다며 부드럽게 건네주고, 행여 그들이 항의하면 모든 것은 밀레시안이 원하기 때문이라며 일갈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완전히 농락하는 이 만행은 어느 사이엔가 뛰어난 관찰력과 임기응변을 보일 수 있는 두뇌 게임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이 행위를 '그랑디 게임'이라고 부르며 불로불사와는 별개로 밀레시안의 고립을 즐기는 이들도 속출했다. 그들에게 있어 밀레시안은 강대한 힘을 가진 이방인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 투아하 데 다난과 같이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아하 데 다난이 마냥 밀레시안의 우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삼하인에 한번 죽음을 맞이하고 버려진 밀레시안이 복수심을 품은 채 성장해 자신을 '양육'했던 투아하 데 다난에게 칼을 겨눈 사례도 적지 않았다. 밀레시안과 같은 불사성을 지니지 못한 투아하 데 다난 귀족들은 운 좋으면 중상으로 끝나거나 때로는 목숨을 빼앗겼고, 그제사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귀족들은 왕성에 단체 청원을 넣으며 [죄없는 투아하 데 다난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밀레시안의 격리를 요구했다. 현재 두갈드 아일, 센마이 평원 등지에 개설된 밀레시안들의 거주지에는 그런 뒷배경이 숨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귀족들이 밀레시안을 비방하는 동안에도 '그랑디의 보복'은 이어졌다. 투아하 데 다난은 밀레시안을 죽일 수 있지만 투아하 데 다난은 밀레시안을 죽일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 아래 죽어도 죽지 않으며 오히려 끝없이 성장해가는 밀레시안. 과거 투아하 데 다난들의 잔혹한 행위를 증명할 수 없었던 그들의 불사성이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들의 목을 빈틈없이 조르는 올가미가 되었던 것이다. 귀족들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이따금 밀레시안을 붙잡는데에 성공하더라도 홀연히 나타난 다른 밀레시안이 귀족을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완전히 뒤바뀐 힘의 역학구도는 또 다른 귀족들의 발광 혹은 자살을 야기했고, '밀레시안 그랑디'라는 끔찍한 우화愚話는 그렇게 서서히 부식되어 사라졌다.
허나 투아하 데 다난과 달리 영원을 살아가는 그들은 언제까지고 당사자였던 그때의 기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설령 칼을 들어 복수를 완성한 이들이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 또한 과거 '밀레시안 그랑디'를 실행했던 가문의 생존자로써 희생자들이 도저히 잊지 못하는 귀족들의 무자비한 행동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록이 과연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을까? 애초에 서점에서 제대로 팔리기는 커녕 귀족들의 손에 의해 빠짐없이 몰수되어 불태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하녀의 일기장 뒤에 이 이야기를 적고 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묻어버리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건 견딜 수가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글이 단순한 흥밋거리나 불쏘시개로 전락하기보다는 잔인했던 과거의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자물쇠가 되기를 비는 것 뿐이다.
원컨대, 이후로 또 다른 '밀레시안 그랑디'가 태어나는 일이 없기를.
이것을 읽는 당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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