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실린더X계약자. 계약자 설정이 글마다 다릅니다.
적는게 생길 때마다 갱신.
"이야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그 질문에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이던 계약자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그렇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이제사 깨달은 것인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럴지도."
정령은 안경을 매만지며 계약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을 잔뜩 먹고 묵직해진 솜을 연상시키는 하늘 아래,
호숫가에서 타오르는 캠프 파이어의 불빛만이 수면에서 일렁이는 밤이었다.
"...무슨 의미죠?"
"......"
계약자는 대답 대신에 손에 쥐여져 있던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가느다란 가지는 메마른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러져갔다.
딱, 따악, 따닥.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같이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서로를 무시하면서?"
"서로를 인지하면서."
퐁, 짧은 물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 물고기가 튀어오르기라도 한걸까.
"하지만 기껏 불러내놓고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실린더 안에 들어있는 것과 뭐가 다르죠?"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돌아가도 상관없어."
허공에 불티가 튀어올랐다. 계약자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모닥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령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
"농담입니다. 그런 표정 마시죠."
"...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어."
토라진 듯 중얼거리면서도 안도한 기색이 완연한 표정을 짓던 계약자는 천천히 두터운 구름이 흘러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어딘가에 숨어있을 라데카의 빛이 구름 사이로 번져나왔다가는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달이 잘 안 보이네."
"잘됐군요."
"어째서?"
"방해됩니다."
"방해?"
"저와 달리 당신의 세계는 넓으니까요."
"......"
이번에는 계약자가 물끄러미 정령을 바라볼 차례였다.
평원을 휩쓸던 바람이 호수 위에서 어지러이 춤췄다.
"그 세계에는 당신도 있어."
"정령의 세계에는 계약자 한 사람뿐입니다."
"나와 함께 세계를 보면 되잖아."
툭, 하고 마지막 장작이 쓰러졌다.
이제 호숫가에는 깜부기불 정도의 빛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흐릿한 달빛.
"그걸 위한 계약자지?"
"...부질없는 짓이군요."
"달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당신이 아니라면 관심없습니다."
정령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계약자가 있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부속물에 불과하다.
"기쁜 말이네."
훅, 하고 불어온 바람에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뒤이은 계약자의 목소리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조금 쓸쓸해.)
정령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팔라라의 빛을 받은 보석이 천연덕스럽게 빛났다.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정령은 아주 약간 고개를 들어 그것을 들고있는 계약자를 바라보았다.
"작군요."
"그렇네."
말마따나, 소녀의 손바닥에서 빛나는 보석은 2~3cm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석은 보석이다. 계약자가 소매로 소금기 어린 바닷물을 닦아내고 건네는 스타 사파이어를 사양않고 받아든 정령은 자신
이 보석을 흡수하기도 전에 또 다시 야금채를 손에 쥐고 모래밭으로 향한 계약자를 바라보았다. 슬슬 너덜너덜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혹사당한 야금채를 손에 쥔 그녀의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붉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반사하는 바다가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아이스 마인의 재료수집, 이라고 했던가.
정령은 천천히 눈을 감고 오늘 들어 3번째로 받는 루비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부의 지식이 서서히 채워져가기 시작했고, 그 충만한 감각을 충분히 즐긴 뒤 눈을 뜬 그는 조금 전보다 부쩍 어두워진 하늘, 그리고 규칙적인 파도소리를 내며 밀려오는 바닷물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아니 눈을 감기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오렌지빛은 보이지 않았다.
감쪽같이. 마치 어딘가로 도망가기라도 한 것 처럼.
"...!!"
그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검푸른 바닷물 속에서 갈색 손이 뻗어나왔다.
그것이 물에 빠진 자신의 계약자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령은 계약자의 이름을 외쳤다. 그에 대답하듯 계약자의 몸이 솟아올랐고, 쓸려내려가는 바닷물에 저항하듯 팔꿈치만으로 해변가로 기어온 그녀의 입술에서 쉴새없는 기침이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바닷물을 들이마신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기침이 진정된 뒤에는 입 안에 고인 모래알갱이를 뱉어대던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곁으로 달려온 정령을 발견하고 발이 미끄러졌다며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어."
"수확?"
계약자는 한쪽 손을 들어올려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그 안에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쥐어져있었다. 크기는 대략 5cm 정도.
정령은............ 어쩐지 할 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계약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정령의 손을 잡아끄는 시늉을 했다. 그 손짓에 이끌리듯 팔을 뻗은 정령은 충동적으로 보석이 놓인 계약자의 손바닥을 움켜쥐려했지만, 애초에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정령의 손이 계약자에게 닿을 리도 없다. 결국 마치 손을 마주잡은 것 같은 형태만을 취한 채 다이아몬드를 흡수하기 시작한 정령은 어느 순간 몸의 감각이 어색해지는 것을 느끼고 짧은 기침을 내뱉었다.
"....라아즈?"
계약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를 향해 자신은 괜찮다고, 레벨이 올라서 그런지 조금 몸의 감각이 재조정된 모양이라고 말하려던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약간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는 계약자의 손이 단단히 붙들린 채, 당황한 것처럼 두근거리는 고동을 전해주고 있었다.
(실체화가)
이해하는 것보다 빠르게, 정령은 자신의 계약자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그대로 껴안았다. 가느다란 팔과, 아직까지는 바닷물의 냄새가 남아있는 몸, 그리고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머리가 자신의 품 안에 안기는 감각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가능해진거야)
허리를 껴안은 두 팔에 좀 더 힘을 준다. 몸과 몸이 서로 짓눌리며,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감각과 자신이 지금 안고있는 존재의 감각이 서로 뒤섞여갔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하고, 그외의 다른 것은 차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해서.
다만, 깊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죠?"
그렇게 묻는 정령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계약을 맺은 이래 이런 말투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그를 사랑하니까."
대답을 들은 뒤의 표정조차 생소하다.
문득 이것이 정말로 나와 함께 해왔던 정령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린더를 낀 팔이 아파오는 건, 기분 탓일까.
"진심입니까?"
"이상한 질문을 하네. 진심이 아니었다면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어."
"……."
이래뵈도 몇 년의 세월을 함께한 정령이다. 어떤 성격인지는 익히 잘 알고있다.
환히 웃으며 축복해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설마 이런 반응이 나올줄이야.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다. 조금 혼란스럽다.
"…왜 그런걸 묻는거야?"
라데카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그 날 그 순간을, 나는 분명히 잊지 못하겠지.
"당신을 사랑하니까."
내 주위의 시간이 그대로 굳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나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정령의 시선이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
"똑바로 나를 봐."
"……."
비스듬하게 보이는 발 아래의 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시야 한 구석에서 반짝거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아닌거지?"
대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언제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건 나잖아! 너에 대한 것이라면 전부 다 알고있는데 어째서!!
…아아, 육체인가? 땅을 발로 디딜 수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그 육체!!! 그것때문에 나를 봐주지 않는건가?
그럼 그 자식의 몸을 갈기갈기 분해해서 나와 다를 바 없는 신세로 만들어주지!"
"그만해…!"
머리는 복잡하다. 말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딱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사람에게 손을 댄다면."
나는.
"당신도 무사하진 못할거야."
정령을 그 사람 이상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눈물이 고여서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정령이 허탈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이윽고 괴로운 숨소리가 되고 울부짖음으로 변할 때까지,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움찔 눈을 뜨니 시야보다도 먼저 콧가로 양초 냄새가 스며들었다.
뒤이어 보이는 것은 서재의 어둠 속에 오도카니 켜져있는 밝은 불빛, 그리고 맞은편에 잡아빼져있는 의자 하나.
원래 거기에 앉아있을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나른한 눈꺼풀을 힘겹게 깜빡였다.
창 밖은 무척이나 어두워서, 딱 보기에도 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늦은 오후의 햇살이 보이고 있었는데.
오후의 햇살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오랫동안 고정된 자세를 취해야 했던 것에 불평을 토로하듯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라면 다른 한쪽으로 주무를 수도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저려오는 것은 양쪽 팔이다.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탁자에 다시금 이마를 박았다.
"일어났군."
"…아."
"아, 라니 뭐야."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 남자는 여자의 맞은편- 조금전 그녀가 처음으로 보았던 그 빈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 것은 남자의 몸짓을 따라 양초의 불빛이 약간 흔들린 다음이었다.
"옷이."
"옷이?"
"없어요."
"당연하지. 너에게 있으니까."
그제사 자신을 돌아본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덮여져있는 남자의 웃옷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굳이 옷 따위로 신분을 증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왕정 연금술사라는걸 인정하는 인물의 옷을 풋내기 왕정인 자신이 걸치고있다는 것이, 어쩐지 황송하게 느껴진 것이다.
허나 남자는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도 않으며-라기보다 책에 시선을 빼앗겨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밀레시안들을 도와줬다지."
"…아, 네."
"이제 슬슬 왕정 감사기간이야. 남을 돕기보단 자신의 연구에 매진하는게 어때?"
"대비는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연구를 실전에 적용해볼 겸 겸사겸사 하는 일이니까요."
"…흐음."
남자의 반응은 그녀의 말에 대한 반응인지 아니면 책에 적힌 내용에 대한 감탄인지 애매모호했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도 책을 읽을 요량으로 팔을 움직였다가,
"으힉."
팔뚝에 개미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에 절로 몸이 굳는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린 그녀가 어쩔 도리도 없이 마른 침만 삼키고있자니 아까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뭐야?"
"아, 팔에, 쥐가."
"쥐?"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린 남자는 책의 표지를 덮어버리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그가 서재를 나가는 건 아닐까 싶어 잠시 몸을 움츠린 그녀였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의자를 끌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의아한 일이거늘, 그는 한술 더 떠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 자신의 손으로 거침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팔뚝에서, 팔꿈치를 거쳐, 손바닥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부드러운 힘으로.
무언가에 압도된 듯한 기분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도 한쪽 팔의 마사지를 끝낸 남자가 이제 괜찮나? 하고 물었을 때 어떻게 반대쪽도 저리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인지.
결국 남자는 그녀의 양쪽 팔을 한참 동안이나 주무른 뒤에야 손을 쉬게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껴야할지 몰라 헤메던 그녀는 애꿎은 골렘의 결정만을 쉼없이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감사합니다."
"아아."
"……"
"……"
아까와는 달리 침묵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새삼스레 남자와 둘이서만 어두운 서재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이 너무 늦었음을 알았기 때문인지.
…혹은 얼굴이 이상하게 달아올라있기 때문, 일까.
상념을 떨쳐내듯,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 기. 안 주무시나요?"
"흥미로운게 있어서."
"그렇군요…"
감히 무엇이 흥미로운지까지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듣는다고 해서 자신이 제대로 이해할지도 의문이고.
그렇다면 남은 길은 자신도 독서에 매진하는 길 뿐이다. 조금 전에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단념해야했던 책을 조심스레 끌어당긴 그녀는
아직까지도 남자의 옷이 자신을 덮고있음을 알고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조심스레 벗으려다가.
"걸치고 있어."
그대로 제지 당했다. 하긴 노동 뒤에 다시 책을 잡았는데 옷을 입기 위해 또 책을 손에서 놓는 것도 성가신 일일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자신이 이걸 벗으려고 한 걸 알아챈걸까.
까마득한 선배의 능력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책을 펼친 그녀는 이내 그 내용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의 선배가 어느 순간부터 책 대신 촛불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고있음을 깨닫지도 못 할 정도로.
"어차피 죽을텐데 굳이 손을 잡아준 이유가 뭐죠?"
벨바스트의 정원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정령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계약자는 걸음을 멈췄다.
분수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짐을 옮기는 일꾼들의 목소리,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한낮의 태양 아래 어수선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매끄러운 마감재가 깔린 바닥에는 느슨하게 몸을 빼는 자신의 그림자가 하나.
이윽고 그 그림자는 몇 시간 전의 자신이 되어 바닥에 쓰러진 시녀를 응시했다.
피투성이의 몸. 가느다란 목소리. 조용히 내밀어 잡은 손은 한겨울의 눈만큼이나 싸늘했다.
이어진 눈물, 짧은 한숨, 그리고 죽음.
"…쓸쓸해보여서."
"흐음, 밀레시안들은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줄 알았는데요. 특히나 당신은."
그랬다. 그랬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밀레시안.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밀레시안.
아아, 하지만.
-그대의 숨결을 마지막으로-
붉은 하늘 아래 피부를 따갑게 때리던 빗줄기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육신들.
그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자신의 몸과 그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던 칼날.
피가 흘러나가고 몸이 굳어가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종말을 무엇보다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것이 단순히 생생한 악몽이 아니라 언제쯤 자기 차례가 올 지 입맛을 다시고 있는 운명이라는 것도.
셰익스피어는 '당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자면, 바꾸지 못하면 그 운명대로 흘러가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죽어버리 "무슨 상상을 하고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죽으면 제가 연성해서라도 되살릴테니 안심하시죠."
………….
그녀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정령은 언제나와 같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안경을 슬쩍 밀어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런. 너무 멋있습니까? 혹시 반한건가요?"
대꾸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황망히 머리를 쓸어넘기다 눈가를 매만지고, 이리저리 시선을 헤메이다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자신에게는 정령이 있다. 설령 죽어버리더라도 당신을 다시 데려오겠노라고 말하는 정령이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서늘하게 식어있던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까놓고 말해, 바뀐 것은 없었다. 에레원을 내쫓은 루 라바다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고 벨라의 진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오언은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 예지몽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버린다면, 정령이 인체를 연성할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소울 스트림이 봉인당한 시점에서 밀레시안인 그녀가 에린으로 귀환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지겠지.
그렇지만 세상에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도 있는 법이다.
"고마워."
배어나온 미소는 극히 자연스러웠다.
정령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녀는 오언 제독이 있을 관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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