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질문이지만, 당신은 ‘정령 무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계약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계약자에게 무한한 충성을 바치는 그들에게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친구, 가족, 혹은 애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진정 두터운 신뢰관계를 쌓지만, 반대로 그들을 단순한 여흥거리로만 여기거나 정령들이 가진 특수한 축복의 힘을 받아내기 위해 무기를 개조하는 정도의 개념으로 계약을 맺는 이들도 존재한다.
D는 대표적인 후자에 속했다. 타고난 천성이 깃털처럼 가볍기 그지 없었던 그는 매사에 진지한 법이 없었고, 진득한 끈기나 성실함은 이성에게 접근할 때를 제외하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질리기는 또 얼마나 쉽게 질리는지. 이때까지 D가 이것저것 집적거렸다가 결국에는 관둬버린 도구나 무기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티르코네일의 힐러집에서부터 케안 항구까지 거뜬히 이을 수 있으리라. 그 천성은 정령무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을 교역하며 살아가던 내가 우연히 D와 마주쳤을 때 D는 전에 맺은 정령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또 다시 새로운 정령을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다. 의례적인 회화 뒤에 교역소에서 물건을 거래하다 왠지 미심쩍은 기분을 느끼고 득달같이 시드스넷타로 돌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사실도 몰랐겠지. 심지어 나중에 들어보니 그게 통산 일곱 번째였다고 하니, 이쯤 되면 계약남용으로 잡혀 들어가도 할 말이 없다. 타르라크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내가 새하얀 눈에 부츠를 반쯤 파묻어가면서 제단에 도착했을 무렵 D는 혼자서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왜 거부한다는거야? 정령석도, 무기도 가져왔잖아?”
“당신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의미하게 계약을 맺고 파기하길 반복했죠. 이이상은 정령에 대한 모욕입니다.”
“모욕이라니! 난 그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정령을 고르고 싶을 뿐인데! 게다가…”
“계약자는 자아를 가진 무기를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며 소중히 해야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은 부모가 우수한 아이를 고르고 싶으니 자식을 시험 삼아 여러 명 낳아본 뒤 제일 나아보이는 아이만 고르고 나머지는 버리겠다고 말하는거나 다름없어요!!”
드루이드의 분노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극단적인 예시의 내용에 놀란 것인지, D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드롭킥을 날리기에 충분한 빈틈이었다. 이윽고 눈보라를 일으키며 제단 근처의 절벽에 머리부터 처박힌 D의 손에서 떨어진 갈색 주머니가 제단 위를 나뒹굴었다.
뭉개진 눈사람 꼴이 된 D의 만행과 나의 갑작스런 난입은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D에게 추가타를 먹이고 난 뒤에야 겨우 그 생각을 한 나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타르라크에게 사과하려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시선은 나나 D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타르라크는 제단 위에서 구르고 있는 낡은 실린더를 주워들어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시죠?”
“이 실린더… 이미 정령계약이 되어있습니다.”
“네? 하지만….”
정령이 깃든 무기와 다른 무기들과는 다른 점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기 자체에 깃드는 빛이다. 인위적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빛은 정령의 성장에 따라 점차 색이 변하며 계약자가 정령과의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군데군데 낡은 기색이 보이는 실린더는 이웨카의 빛을 받은 눈밭의 흰색과 제단에 걸린 불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 거기에 정령이 깃들었다는 증거는 무엇 하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저도 믿기 힘들지만… 분명 희미하게나마 정령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대체 이건 어디서 구하신거죠?”
마지막 말은 내가 아니라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일어서려 애쓰고 있는 D를 향한 것이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니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거기에 엉겨붙은 눈덩이를 익살맞게 덜렁거리며 반쯤 몸을 일으킨 D가 미간을 찌푸렸다.
“던바튼 개인 상점을 돌다가 제법 사람 손을 탄 것 처럼 보이는 걸로 산거야.”
“남의 물건을 슬쩍한건 아니고?”
“거참 너무하네! 그런 짓을 뭐하러 해? 애초에 정령무기가 개인상점에서 팔리고 있는게 이상하잖아?”
맞는 말이다. 그리고 D는 도둑질을 할 만큼 손재주가 좋지 않다. 그렇다면 그 개인상점을 연 사람은 남의 정령무기를 훔쳐 팔았다는 건가?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령무기는 분명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것을 쓰는 자가 정당한 계약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정령과 계약할 정도의 모험가라면 그만큼 손에 익은 자신의 무기가 남의 손을 타고 팔려나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겠지.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애꿎은 눈을 꾹꾹 눌러밟으며 마냥 침묵하는 실린더를 노려보았다. 잠시 실린더를 살펴본 타르라크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곤란하군요. 정령과의 계약자와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는지 자의식마저 희미한 상태입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감정도 매우 싸늘하고 날카롭군요. 때문에 무기 자체에도 안 좋은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만약 이걸로 한번이나마 연금술을 썼다면 십중팔구 전부 실패하거나 혹은 폭발을 일으켜서 시전자가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젠장, 그 상점주인은 그런걸 판거야? 한번이라도 썼으면 죽을뻔했군!”
D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개인상점에서 적당히 숙련된 무기를 구입해 정령과 계약하고 또한 계약을 파기하기를 반복한 자신의 업보는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이 자식은 자기가 쓸 실린더를 사고 난 다음 연금술의 연자도 해보지 않고 실린더 정령과 계약할 생각이었나? 새삼 D의 어처구니없음에 머리가 아파졌지만, 지금 중요한건 녀석이 아니었다.
“그럼 그 실린더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건가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말을 걸어봐도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니…. 주인이 찾고있을텐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버린건 아니고?”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떠다닐 D의 빌어먹을 천성이여. 타르라크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져가고, D는 뭐가 잘못이냐는 표정으로 로브에 들러붙은 눈을 털어냈다. 눈은 떨어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정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뭐 그런 이유 아닐까?”
“정령무기는…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버려진 물건이 있잖아? 설마 생활고에 시달려서 내다팔았을리는 없겠지.”
“…적어도 제가 여기 있는 동안 정령무기를 임의로 내다버린 사람이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아예 정령무기 자체에 학을 뗀게 아닐까- D는 신기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고, 나는 D의 정강이를 후려치면 안될 그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뼈아픈 소리와 함께 자세가 흐트러져버린 D가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노려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별 박력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롱조로 말했다.
“것참 대단한 예언자 나셨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아야야, 저게 계약자의 손으로 버려진게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잖아. 내기 해도 좋아. 저 정도로 낡은데다 정령이 반쯤 맛이 가 있다는건 틀림없이 원 계약자가 싫증이 나서 버린거야.”
“그럼 나는 계약자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무기를 잃어버렸다는데 건다. 지는 쪽이 이긴 사람의 명령을 뭐든지 듣는다는 조건, 콜?”
연신 숨을 들이마시며 정강이를 쓰다듬는 D의 발언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자, D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콜!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자신이 틀렸다거나 남이 맞았음을 쉬이 인정할 줄 모르는 성품 때문에 험한 꼴 당할 뻔한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아직도 이 모양인가. 나는 일견 기세등등한 D를 내버려두고 타르라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됐으니 이 실린더는 저희가 책임지고 주인을 찾아주겠습니다.”
“…수고를 끼쳐드리게 되는군요. 염치 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르라크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나에게 실린더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아까, 살펴보는 동안 몸체에서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니셜을 발견했습니다. 한 글자뿐이긴 하지만…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그 말대로 실린더에는 몸체에는 ‘L’이라는 글씨가 생채기처럼 남아있었다. 슬며시 손가락으로 더듬자 예상 외로 싸늘한 한기가 손끝으로 전해져왔다. 실린더를 가득히 메우고있는 정령의 분노가 스며나오기라도 한걸까. …하지만 이 정령의 분노는 대체 무엇을 향한거지?
그 이상 깊이 생각하는 대신 나는 D를 끌고 시드 스넷타를 등졌다.
이웨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
예상대로 던바튼 광장에는 개인상점을 지키는 브라우니가 한가득했다. 때문에 보나마나 자기는 쏙 빠지려고 들 D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 지가 고민이었는데, 녀석은 예상 외로 별다른 불만없이 조사에 착수했다. 자기한테 까딱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실린더를 판매한 상점 주인을 직접 찾아내서 한 마디 해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나. 덕분에 D를 회유할 수고를 덜어낸 나는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광장에 발을 내딛었다. 발품과 끈기는 상인의 기본 덕목이다.
“실린더를 찾으시나요? 그건 없지만 주인님께서 멋진 완드를 팔고 계시답니다! 구겅하고 가세요!”
“정령무기를 판 적이 있냐구요? 아뇨, 하지만 주인님이 멋진 파이어 엘레멘탈을 파시니 구경하고 가세요!”
“주변에서 낡은 실린더를 파는 아이를 보지 못했느냐구요? 저희 주인님께서는 훨씬 성능좋고 저렴한 타워 실린더를 준비해 놓으셨답니다! 지금 사시면 정말 이득이에요!”
…기타 등등.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는 없었다. 브라우니를 상대로 탐문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D를 닮은 손님을 본 적이 없냐고 물었을 때 그런 사람은 기억에 없다고 한 브라우니가 그나마 정상적인 대답을 해준 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D는 뭘하고 있나 살펴보니….
“에반씨는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관청의 에반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당장에 뒷목을 잡고 끌어내자 튜닉 칼라에 목이 볼려 켁켁 대는 꼴이 일품이었다.
“뭐하는 지거리야!”
“너야말로 뭘하고 있는거냐.”
“단서를 찾은 자의 당연한 휴식이다!”
“퍽이나.”
“진짜거든!”
이후 D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브라우니들은 어차피 자신의 주인과 팔아야할 물건, 매상 관리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주변의 어떤 일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무리. 그보다 실린더의 정령이라면 원 계약자가 연금술사였을 확률이 높으니 연금술사의 도시인 탈틴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끝인데?”
“…….”
대쉬 펀치는 참 유용한 기술이다.
하지만 D의 생각 자체는 쓸만했다. 정령은 오랫동안 숙련된 무기에 깃들며 한 사람 당 하나의 정령만이 계약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로 자기자신이 오래 써온 무기에 정령을 계약시켰다. 이따금 D와 같은 예외분자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로 예외적인 경우이므로 제외. 따라서 탈틴으로 달려가기 위해 오래 전부터 나의 발이 되어주고 있는 서러브래드를 소환한 나는 아무것도 소환하지 않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D를 발견하고 순간 당황했다.
“뭐하냐?”
“뭐가?
“탈틴으로 가자며.”
“잘 갔다와. 난 여기서 나한테 물건을 판 브라우니를 찾아보지.”
…그렇게나 책임감 없는 상점 주인을 찾아내고 싶은건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분노도 슬슬 귀찮음에 희석되어 흐지부지되고 있는건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녀석 같으니. 하지만 만의 하나 정말로 그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런 녀석을 억지로 탈틴으로 끌고 가봤자 별 도움도 안될 것 같았으므로, 나는 D를 던바튼에 내버려둔 채 아브네아로 향했다.
네아 호수를 지나 언제 봐도 튼튼해보이는 탈틴의 석벽을 통과하면 저 멀리 언덕 쪽에서 여러 갈래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한때 왕실의 4대 연금술사였다는 도렌 여사의 집이다. 던바튼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말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고기조각을 먹여준 뒤 여러 개의 화덕이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마당을 기웃거리던 나는 내 바로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꼬마를 발견했다. 왠지 모르게 밤톨을 닮은 소년이었다.
“…안녕, 뭐 좀 물어봐도 될까?”
“너무 어려운 질문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고마워. 이 실린더의 주인을 찾고있는데 말야….”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펼쳐 문제의 실린더를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이 안에 정령계약이 되어있다는 말은 일단 보류했다.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실린더를 살펴보던 소년은 몸체에 생채기처럼 남아있는 'L'자 사인을 발견하고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이거 혹시 저주받은 실린더 아니에요?”
“저주받은… 뭐?”
“저주받은 실린더요. 연금술을 쓰려고 하면 워터 캐논을 쓰려고 해도 폭발이 일어나고, 연금술을 쓰지 않고 그냥 들고만 있어도 소지품이 하나 둘 없어지는 이상한 일이 생긴데요. 좀 낡아있고 몸체 쪽에 뒤집힌 낫 모양 표식이 있으면 틀림없댔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L자의 밑부분이 둥그스레하게 올라와있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연금술의 실패나 아이템의 소실같은 일들은… 아마도 안에 들어있던 정령이 한 짓이겠지. 날카롭고 공격적인 상태라 한번이라도 연금술을 썼으면 사정없이 폭발했으리라던 타르라크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이템은 아마도 흡수당한 거겠지. 하지만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실린더가 귀신들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거 참….
하지만 반대로 그런 소문이 남았다는 건 이 실린더를 실제로 써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개인 상점을 둘러보는 것보단 성과가 있었군. 나는 지금쯤 던바튼에서 늘어지고 있을 D에게 감탄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는 법이다.
“혹시 실제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알고 있어?”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게 말이지….”
나는 숨길 것도 없다 싶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안에는 정령이 깃들어있는데 주인과 오랫동안 헤어져있었던 탓인지 제법 성이 나 있다. 저주받았다는 일들도 그래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을 찾아 되돌려주려는데 단서가 없다….
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이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인을 잃은 정령무기라구요?”
“정령무기를 누가 잃어버리냐 싶지?”
“아뇨, 그게 아니라… 소문이 되게 오래됐거든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만약에 정말로 주인이 잃어버린 거라면, 훨씬 예전에 그게 자기 물건이라는걸 알고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오래됐는데?”
“잘 모르겠어요. 여하튼 예전부터 있었던건 확실해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사실은 진즉에 원 주인이 찾아갔을 가능성은… 없군. 저주받았다는 타이틀을 얻은 실린더는 지금 분명히 내 손아귀에 있으니까. 문득 D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치는 것 같았다. (거봐, 주인이 정령한테 질려서 내다버린거라니까?) …아니,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상상 속 D의 목소리를 몰아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실제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소년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화덕 앞에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마름 침을 한번 삼킨 뒤,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저어….”
“결정구매는 아이바한테.”
“아뇨, 그게 아니라.”
“합성은 도렌씨에게 배워.”
“저주받은 실린더를 쓴 적이 있으시죠?”
기본적으로 남의 대화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냅다 본론을 들이미는게 최고다. 과연 효과는 명확했다. 로브의 여성은 당장에 화덕을 살피던 눈을 거두고 나를 쏘아본 것이다.
“뭐하러 그런걸 묻지?”
“그게… 그 무기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시나 해서.”
“윈드 블래스트도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실린더였어. 주인이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최초의 주인은 있을텐데요.”
“있었겠지. 그리고 실린더가 하도 개같아서 버렸을거야. 내가 그랬거든.”
내가 다음 할 말을 찾아 헤메는 사이 로브녀는 작업이 끝났는지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이거 난관이로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의 그 소년이 호기심과 걱정이 반반 섞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일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참담했다. 마치 D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 이후로도 몇 명인가의 연금술사와 이야기를 해봤지만 쓸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라이벌의 비겁한 술수에 의해 왕정 연금술사가 되지 못한 자의 저주라느니, 원래 주인은 사막지대의 망령이라느니, 그걸 가지게 된 사람은 전부 하루 아침에 늙어버린다는 식의 뜬 구름 잡는 소문만 잔뜩 들었을 뿐이다. D의 부엉이가 찾아온 것은 탈틴 주민에게서 연금술사에게 괴담을 묻는 것 만큼이나 괴상한 짓이 어딨느냐는 핀잔을 들은 직후의 일이었다.
[타라로 올 것. 단서를 찾았음.]
단서? 설마하니 정말 개인상점 주인을 찾은건가? 하지만 뜬금없이 타라가 왜 나오는거야?
순식간에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일단 가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나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신세를 진 아이바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게이트를 통해 타라로 향했다. 몸이 빛에 둘러싸이는 순간 D가 정확히 타라 어디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문게이트 바로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내 이름을 확인하고 타라의 어딘가로 안내해주었으니까.
도착한 곳은 타라의 건물이 으레 그러하듯 으리으리한 풍채를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나무판자 하나까지 고급스러운 빛을 띄고있어 섣불리 걷기가 죄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마음도 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응접실에서 D가 태연자약하게 늘어놓는 헛소리를 듣고 확 날아가 버렸지만.
“…그래서 던바튼이 아니라 탈틴도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개인상점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며 저를 남겨두고 자기 혼자 탈틴으로 가버렸죠. 지금까지 별다른 전보가 없는걸 보면 아마도 헛물을 켜고있는 모양입니다. 좀 우직한게 흠이긴 하지만 좋은 녀석이에요.”
얼씨구?
당장 의자에서 끌어내어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남의 집에서 그런 결레를 저지를 순 없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것이 묘령의 여성이라면 더더욱. 부드러워보이는 붉은 소파에 앉아있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 시선을 눈치챈 D도 나를 향해 휘휘 팔을 저어보였다.
“여, 수고 많았어.”
말이나 못하면 밉지는 않을텐데. 나는 작게 한숨 쉰 뒤 D의 옆자리에 앉으며 속삭였다.
“…저분은 누구야?”
"우리가 찾던 사람.“
눈 앞에 번개가 번쩍이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금 돌아본 여성은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모든 물건으로부터 부유함을 타고난 자의 안목이 느껴졌다. 저 진주 귀걸이 하나면 내가 들고있는 실린더로 방 하나를 꽉 채울 수 있겠지. 그 터무니 없는 가치의 간극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인사가 늦었네요. P라고 합니다. 제가 찾는 실린더를 가지고 계신다구요”
“아, 네…. 그런데 저희가 가지고 있다는건 어떻게 아셨죠?”
D가 실린더를 사서 계약하려고 했던게 오늘 새벽의 일이다. 실린더를 산 것은 바로 어제 즈음. 그 사이에 이렇게 우리를 찾아내다니 우연이라 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우리를 바짝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의 긴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탓일까, P는 돌연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머,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누가 보면 제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요.”
“하하, 이 녀석이 워낙 새가슴이라서요.”
저놈의 헛소리는 지치지도 않나!
“사실… 이 실린더는 저도 한참 수소문하고 있던 물건이에요. 저희 집에서 한번 사라진 이후, 아무리 찾아도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알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던바튼에서 이 물건이 나왔단걸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하지만 저희쪽 사람이 사러 갔을땐 이미 팔린 뒤였죠.”
동그란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어서 상점을 계속 조사하게 했는데, 때마침 저희와 같은 요지의 질문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왠지 수상한 기분이 들어서 당장에 붙잡아서 실토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시려던거 아니겠어요? 너무 감사하고 죄송스러워서, 이렇게 직접 저희 집으로 모시고 오게된 거에요!”
“그렇군요….”
붙잡느니 실토라느니 부잣집 아가씨 치고는 좀 과격한 어휘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일단 이걸로 P라는 아가씨가 타이밍 좋게 우리를 찾아낸 이유는 설명되었다. 더불어 D가 고급스런 집안에서 맘 편하게 뒹굴며 나를 불러낼 수 있었던 까닭도. 보나마나 묻는 사람 막지도 않고 신세한탄하는 것 마냥 술술 늘어놓았겠지. 나는 그 ‘실토하는 과정’에서 D가 약간이나마 험한 꼴을 당했기를 기도하며 주머니에 담긴 실린더를 짙은 묵빛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느다란 손으로 주머니를 끌어당긴 P는 실린더를 꺼내자마자 몸체를 샅샅이 살펴보더니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
“L자 모양의 긁힌 자국! 틀림없어요, 제가 찾고있던 실린더에요!”
“그건… 이니셜이 아니었나요?”
“아버지는 F세요. 이건… 아마도 이 안에 있다는 정령의 이니셜이겠죠.”
아버지? 아마도?
“실례지만, 이 실린더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신가요?”
“아, 설명이 늦었네요. 이건 본래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물건이에요. 젊었을 적에 연금술을 배운 적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그때 쓰시던 거라고 생각해요. 설마 정령계약까지 되어있는 줄은 몰랐지만요.”
“그런데 어쩌다 잃어버리신 거죠?”
이때만은 D의 가벼운 천성에 감사했다. 나 또한 그런 물건이 어쩌다 주인과 헤어지게 되고 말았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라는게 문제긴 했지만, 그 순간의 나는 어깨로 기어오르려 드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미처 결례를 사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P가 덜컥 화를 내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행운이었다.
“사실은.”
사고, 사고였다고 말해.
“옛날에 집안이 무척 어려워졌던 시절이 있었어요.”
자의와는 하등 상관없는 불행한 우연이 있었다고 해줘.
“그때 집안의 물건을 모두 정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정령무기를 내다버리는 인간이 있다고 하지마…!
“같이 팔아버렸어요.”
……….
“아버지도 많이 고민하셨었어요. 마지막까지 어쩔 수 없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람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
D는 태연자약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드레스 자락을 꼭 붙들고있던 P의 손가락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나도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넸으면 좋았겠지만, 뱃속에서 지글거리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나마 D가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는게 다행이었다.
그럼 그 불행한 일 이후로 이만큼 집안을 일으켜 세우신 거군요. 아버님이 대단하신걸요? 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세요. 하지만 그때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에요. 요즘 들어 부쩍 자주 가위에 눌리세요. 이런, 죄책감을 느끼신 모양이군요. 그렇겠죠. 안그래도 나이가 많아지셔서 건강도 염려되는데…. 그래서 따님으로서 두고보지 못하시고 행동에 나서신거군요! 효성이 지극하시네요. 어머나, 과찬의 말씀이세요. 아뇨, 이건 찬사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런 맘씨 고운 분을 찬사하지 않으면 이 땅의 누굴….
D의 입술은 물에 뜨다 못해 숫제 하늘로 치솟을 기세였다. 나는 이쯤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에게는… 언제 전해드리실 건가요?”
“지금 바로요. 아, 괜찮으시다면 아버님을 만나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분명 반겨주실 거에요!”
글쎄요, 저는 별로 반갑지 않을 것 같네요.
마음 속 목소리는 굳게 맞물린 이빨 사이를 뚫지 못하고 목고멍 속으로 침잠했다. 하지만 그것이 P의 아버지를 만나고도 이렇게 얌전히 되돌아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P는 손수 아버지가 있다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고, D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자기가 이겼다고 속닥거렸다. D의 헛소리를 들은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건만, 그 입을 재봉키트로 꿰메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P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불거져 나온 탓이리라.
하지만 결국 그 분노가 제 목표를 향해 뛰쳐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가 안으로 들어간 뒤 내실 허락을 받기 위해 문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이, 갑자기 안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소리가 번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본 나와 D는 실례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틈새로 처절한 절규가 거센 물처럼 세차게 쏟아져나왔다.
“아아, 아아아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일부러 그런건 아냐!”
“아버지, 진정하세요! 이 아이도 아빠를 미워하진 않을 거에요!”
“아냐, 아냐!! 미웠던건 아냐! 오히려 믿고 있었어!! 하지만 너무 무서웠다!! 네가 하염없이 돌아오지 않는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이제 괜찮아요! 제가 이렇게 되찾아 왔잖아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D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스스로 정령무기를 버린 주인이라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무기를 보고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런건 어느 정도 예상했고, 알면서도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지금 P의 아버지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정령무기를 버린 죄책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그 이외의 무언가가 섞여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눈 앞의 태엽이 헛돌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한 묘한 기분. 그 와중에 우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챈 P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였다. 침대에 반쯤 누워있던 초로의 남자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속 절규하고 있었다.
“왜!! 왜 이게 하필 나에게 다시 돌아온거냐!! 벌을 주려는 게냐? 그 사막에 너를 묻어버리고 떠나간 죄를, 평생 곱씹으며 살라는 거냐…!!”
“아버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세요?”
혼란이 전염된 것인지 P의 목소리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D를 내버려둔 채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벼락처럼 생각난 어떤 생각 때문에 뱃속이 화덕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에 앉아있는 노인을 향해 다가갈 때마다 점점 커져가는 비통한 외침이 피부에 깊이 파고들었다. 뒤늦게 나의 접근을 알아차린 P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어깨는 이미 나의 손에 붙들린 뒤였다. 억지로 마주친 시선이 쉼없이 흔들렸다.
“당신은.”
내뱉은 말은 씹다 버린 고기조각 같았다.
“이 실린더의 주인이 아니야.”
남자가 숨을 삼켰다. 동굴 틈새로 간신히 빠져나가는 바람소리 같았다.
“진짜 주인은 누구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속에 무슨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거냐고!!”
“그만하세요,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가녀린 힘이 내 옷자락과 팔뚝을 긁어댔다. 하지만 그래봤자 부잣집의 아가씨가 산전수전 겪어본 상인을 끌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등 뒤에서 미쳤냐고 소리치며 달려든 D가 합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어깨를 잡은 내 손가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치다 못한 P가 새된 소리로 하인을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까지도.
그 순간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덜덜 떨고 있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알았네.”
“아버지?”
“얘기하겠네. 전부.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무덤까지 후회를 안고가게 되겠지.”
나는 스르륵 손을 놓았다. 한 박자 늦게 방 안으로 달려들어온 메이드와 하인들이 이 무례한 풍경을 보고 나와 D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P의 아버지는 그것을 만류하고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P도 함께였다.
“우선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네. 심약한 늙은이가 과거의 잔재를 보고 깜빡 이성을 놓아버렸어. 이야기가 길어질텐데 차라도 들겠나?”
“필요없습니다. 그보다….”
“알겠네. …내가 그 실린더를 얻은건 약 30여년 전의 일이네. 젊음만을 믿고 나뒹굴던 시절이었지. 나름 좋은 경험이 되긴 했지만, 그 때문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말았어. …자네들은 혹 이리아 대륙에 대해서 알고있나?”
물론 알고 있다. 모예 바다 건너에 있는 대륙으로, 고대 유물과 유적을 찾는 고고학자들과 새로운 대륙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모험자들이 숱하게 찾는 곳. 그곳에 살고있는 자이언트와 엘프라는 존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일이 세상에 수두룩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었다.
“그때는 이리아가 막 발견된 참이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네. 하지만 그곳에 사는 기묘한 종족에 대해서는 입소문을 타고 알려졌지. 나는 그 소문에 단숨에 매혹되었어. 그 종족들이 사는 마을과 이 울라 대륙의 물품을 서로 교역한다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얘기지만… 그땐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 단순히 젊었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때 나는 든든한 호위를 데리고 있었거든. L이라는 이름의 소녀였네.”
나는 무심코 마른 침을 삼켰다.
드디어, 나왔다.
“강한 아이였어. 본래는 쌍검술을 썼지만, 연금술에도 손을 대면서 두 가지 기술을 절묘하게 사용했지. 알고지낸 기간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간다면 어떤 적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네. 하지만 착각이었지. 그녀에게도 능력의 한계는 있었어. 그걸 알았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불타오르는 망령을 만났네.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사나운 모래바람 때문에 방향 감각은 커녕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던 때의 일이었어. 피부가 녹을 것 같은 열기에 숨도 쉴 수 없었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푹푹 밑으로 잠겨들어가는 모래는 따갑게 피부를 찔러댔네. L은 금방 열세에 몰리고 말았고, 지옥불에 던져진 것 같은 상황에 뒤늦게 겁에 질려있던 나는 난생 처음 듣는 L의 비명소리에 그만 정신을 잃었네. 퍼뜩 눈을 떴을 땐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었지. L은 찾을 수 없었어. ……그 아이가 쓰고다니던 실린더만 간신히 발견했을 뿐.”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곤 탁자에 놓여있던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과거의 회상이 파문을 일으켰는지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실린더를 가지고 왔다가, 집안이 어려워지자 도로 팔아버렸다는 얘기군요.”
스스로 듣기에도 성난 목소리였다. 남자는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 이후 아무리 L을 찾아도 소식은 없었어. 내가 사막에서 기절한 그 시간동안 그 아이는 실린더만 남기고 모래먼지처럼 사라져 버린거야. 나는 점점 무서워졌네. 안타까운 마음에 들고 온 실린더가 나의 죄를 책망하고 규탄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보관해도… 무언가가 계속 내 뒷통수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바짝 말라가는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었고, 그런 때에 집안을 정리해야했지. 나는… 죄책감을 피하려 그걸 팔아버린거야.”
멋진 이야기다. 어디서 들은 누구씨의 얘기같다. 그렇게 이 집안을 떠난 실린더는 차츰차츰 분노를 키우며 탈틴에서 저주받은 실린더라는 악명을 얻고, 다시 흘러흘러 던바튼 개인상점에서 D에게 구매되어 최종적으로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킨 것은 그런 이유였나. 입맛이 쓴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어쩐지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P를 돌아보며 지친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안하다. 좀 더 일찍 모든 걸 털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에요 아버지.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저는 오히려 기뻐요. 지금이라도 사라진 그분을 대신해서, 우리가 대신 이 실린더를 아끼면 될 거에요.”
“그건 안됩니다.”
나의 말에 P가 눈을 크게 떴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D가 손짓으로 너 뭐 잘못 먹었냐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P의 아버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시선으로 나를 마주보며 왜 안된다는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품 속에 걸려있는 금속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정령은 오직 계약자와만 대화할 수 있고, 교감할 수 있으며, 그에게만 모든 충성을 다합니다. 계약자가 아닌 생판 남이 만져봐야 아무것도 느찔 수 없어요. 거기다 정령과 우리 투아하 데 다난은 시간의 흐름조차 다르죠. 당신들이야 이 실린더를 아끼겠지만 당신의 자식들은, 손자들은 어떨까요? 그 손자의 손자는요? 만약에 사고가 나서 이 가문의 대가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죠? 정령은 평생 여기에 갇힌 채 죽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영원히 의식만 이어지게 될 겁니다!! 그건 차라리 지옥이에요!!”
찌잉, 하고 유리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높은 고함소리가 남긴 상처에서 흘러내린 침묵이 서서히 방안에 고였다. 여태껏 의식하지 못한 벽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무정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계약자가 아닌 자가 소유하는 정령무기는 그저 박제에 불과하지.”
“그럼 파기라도 해야하는건가?”
여태껏 가만히 있었다는게 신기한 D가 변함없는 어투로 끼어들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주인은 사막에서 사라졌고, 정령은 오랜 세월동안 망령이나 다름없어진 상태로 타인의 손을 떠돌았다. 이야기는 이대로 남은 정령의 강제파기로 끝나버릴 수 밖에 없는건가? …아니, 어쩌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뭐?”
“그 L이라는 소녀는, 기억을 잃었거나, 뭐 그런 상황이 되어서 정령무기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녀를 찾아본다면….”
“그런 생각은 나도 해봤네! 하지만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어! 룬가 사막은 물론 필리아나 루트라 강가를 모조리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고!”
“마, 만약 그녀가 밀레시안이라면, 외모를 바꾸었을 수도….:
“그건 새로운 생각이네만, 밀레시안은 투아하 데 다난과는 달리 죽지도 않을 뿐더러 기억을 온전하게 남긴 상태에서 모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네. 그 사건 이후로 벌써 몇 십 년이 지났어. 그런데도 왜 L은 나를 찾아오지 않는걸까? 내가 미워서?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그녀의 정령무기는? 내가 모르는 새 손에 넣었다면 모르지만, 이건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에 있네! 그렇다면 정황을 묻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오는게 맞지 않겠는가!”
그렇다. 답은 두 가지 뿐이다. L이 죽었거나, 혹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되 더 이상 이 남자나 정령 무기에 대한 미련은 가지고 있지 않거나. 도중에 머뭇머뭇 끼어든 P 또한 이 실린더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 이외에 실린더의 존재를 묻는 이를 만나지는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최종적인 낙인을 찍었다. D는 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나를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타라의 시계탑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재판의 폐정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
“대체 왜 그렇게까지 집착한거냐?”
“뭐가.”
“그 실린더의 주인. 아는 사람도 아니면서 정령 무기를 버린게 아닐거라느니, 기억을 잃고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느니, 밀레시안일지도 모른다느니. 난 니가 그 실린더를 하도 들고 다녀서 정령한테 씌이기라도 한 줄 알았다.”
“시끄러.”
결국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기껏해야 이 정령무기의 계약파기는 내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P와 그녀의 아버지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내가 한 말을 보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계약이 풀린 실린더를 되돌려주는 조건 하에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졸리다고 투정을 부리는 D를 반쯤 걷어차며 문게이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무서울 정도로 한산한 거리에는 이웨카의 빛을 받아 석회색으로 빛나는 건물들이 가득했다. 순간 기억 속에서 회색빛으로 퇴색할 정도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 차가운 온도만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주인 잃은 정령검.
고통에 일그러져있던 상처투성이 얼굴.
발치에서 무언가가 잘그락 소리를 냈다. 칼의 조각? 숨이 멈추는 기분이 들어 황급히 발을 치우니 거기에 있던 것은 칼 조각이 아난 타라의 문게이트 제단 위였다. 나를 지나쳐 문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D가 제자리에도 꿈쩍않는 나를 흘끗 돌아보았다.
“뭐하냐?”
“…아무것도 아냐, 발에 뭐가 밟혀서.”
“흐응…. 난 먼저 간다-.”
D의 모습이 푸르스름한 빛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동안 그 문게이트를 바라보다 느릿느릿 제단 가운데로 들어섰다. 이제 이 안에서 티르 코네일로 가서, 시드 스넷타로 올라간 뒤, 타르라크에게 그간의 일을 말하고 정령계약의 파기를 신청하면 끝이다. 아, 실린더를 들고 한번 더 타라로 돌아와야 하는군. 시드 스넷타에서 정령이 사라지는 장면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실린더가 우아한 저택 한 귀퉁이에서 소중히 보관되는걸 상상하고, 나는 발작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던바튼.”
기묘한 부유감이 몸을 감싼 뒤, 타라나 탈틴보다는 소박한 성벽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다시 한번 나의 서러브래드를 소환하고는 미친듯이 카브항구로 내달렸다. 때마침 이리아 대륙으로 막 출발하려던 배가 있어 그 위로 서러브래드째 뛰어들자 안 그래도 작은 규모의 배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문신이 인상적인 선장은 퍽 당혹한 기색이었다.
“이런… 꽤나 급하신 모양이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얼마간 새카만 바다 위를 달려 이리아 대륙에 도착했다. 도중에 D에게서 도착한 부엉이 교신-야 너 어디야-을 갈갈이 찢으며 시간을 죽이던 나는 배가 둑에 닿기 무섭게 종이짝을 바다로 내버리고 서러브래드에 올라탔다. 뒤에서 선장이 균형을 잃고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고 사과해줄 여유는 없었다.
메이즈 평원을 지나 협곡을 통과하고 무유 사막과 카루 숲을 가로질러 누군가가 라노와 콘누스를 이은 다리를 건넌다. 고원지대를 통과해 사막에 들어선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말에게 박차를 가하던 나는 사방팔방 모래바람이 춤추는 어느 모래언덕 위에 도착한 뒤에야 간신히 멈춰섰다. 사막에는 익숙하지않은 서러브레드가 불만 섞인 투레질을 했다.
“아, 미안. 너는 이만 가보렴.”
말을 돌려보내고 모래언덕 위에 직접 두 발을 디디자 발밑이 움푹 패어들어갔다. 일단 얼굴을 때리는 모래를 피해 가방에 들어있던 슬렌더 로브를 뒤집어쓴 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룬가 사막을 둘러보았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래바람 사이로 보이는 이웨카는 평소보다 붉어보였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짙은 모래 냄새가 코를 찔러들었다.
아아,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있는걸까.
“…야, 여기가 네 주인님이 사라진 장소란다. 구경이나 해봐라.”
주머니를 까뒤집자 아래로 떨어진 실린더가 푹, 하고 모래에 처박혔다. 나는 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내 얼굴은 울고 싶어 했다. 빌어먹을, 대체 왜 세상은 정령무기와 계약자가 멀리 떨어져있어도 감응하게 만들어주지 않은거지? 그랬다면 이렇게 헤어지는 일도, 계약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일도 없을텐데!
허무한 마음으로 모래언덕에 벌러덩 드러눕자 피부에 닿는 금속조각이 느껴졌다. 나를 미워하고 원망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쇳조각에 불과한 검의 손잡이. 그 상태에서 얼굴을 옆으로 돌리니 이제 곧 별 의미없는 존재로 전락할 살린더가 보였다. 충동적으로 팔에 착용해보니 제법 알맞게 맞물렸다. 보기만 했을 땐 몰랐는데 단단하게 고정되게 고안된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싸우는 도중에 날아가 버리겠지.
……어?
나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실린더를 찬 팔을 허공으로 뻗어보던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나와 수평을 이루던 모랫빛 하늘이 위로 치켜올라가고,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길쭉한 뭔가가 로브의 후드 뒤쪽을 수평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에 일어난 일은 모래바람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형체가 명확했기에, 로브 뒤쪽을 손으로 더듬으며 뒤를 돌아본 나는 그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끔찍한 형상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래바람을 맞아 너덜너덜하게 펄럭이는 로브 안쪽에서 형형한 눈빛이 빝났다.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기묘한 부분에서 끊어진 한쪽 팔에는 누렇게 바랜 붕대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남은 손에 쥐어진 칼은 날이 빠질대로 빠지고 일부 녹이 슬어있었지만, 일단 쓸만해 보였다. 그러니까, 아까 내 로브를 찌르고 지나간게 저걸테니 당연한 소리…겠지?
내가 이렇게 얼이 빠져있는 동안, 망령은 기묘한 숨소리를 내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한번 한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튼 것과 망령의 칼이 내 정수리가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내려꽂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빈틈을 타 대쉬 펀치를 시도하려 했지만, 애초에 걸음조차 조심스러워야할 모래언덕에서 빠른 걸음을 시도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펀치는 커녕 균형감각이 흐트러진 내가 비틀거리는 사이 망령은 그대로 머리를 잡은 채 연속적으로 내 배를 걷어차 모래바닥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타격이 어찌나 셌던지 한동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제, 헨장….”
망령은 천천히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대로 어딘가가 날카롭게 쑤셔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별 수 없이 살을 내주고 뼈를 깍을 각오를 다지는 나의 왼쪽 팔 위로 망령의 칼날이 내려박혔다. 피부와 근육이 무식하게 찢겨지는 고통에 의식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몸의 감각을 되찾아 재빨리 망령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던 나를 막은 것은 갑자기 떨어져내린 물방울이었다.
빗방울은 아니었다. 모래먼지 가득한 하늘을 배경인 사막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물방을은 대체 어디서 떨어지는거지? 그제사 망령의 로브 속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상처투성이 피부와 피골이 상접한 얼굴, 그리고 퀭해진 안구. 물방울을 그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건 심히 눈뜨고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망령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생명의 흔적이었다. 먼 옛날에 말라붙어버린 망령은 눈물 흘려 울 수 없다. 즉 내 앞에 있는 것은 망령이 아니라 망령으로 착각할 정도로 변해버린 인간, 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건 대체 누구일까?
"아, 아아-…."
…조금 전 실린더를 찼을 때 알아차린게 있다. 그것은 한번 찬 실린더는 의외로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 전투 중에 엉뚱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그 기능은 L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리라. 그렇다면 L과 그녀의 정령무기는 왜 따로 떨어지게 된 걸까? P의 아버지가 들었다던 비명소리와 아무런 파손 없이 주인과 떨어진 실린더를 생각하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망령인줄로만 착각했던 자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왼팔을 쳐다보았다. 로브의 끄트머리는 불에 그슬린 것 처럼 거뭇거뭇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맡아졌던 것은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나는 느리게 손을 움직여 실린더의 고정장치를 풀어내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불의 화신에게 왼팔을 잃고, 자신의 정령을 잃고.
망령이나 다름없는 몰골이 되어가면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시간 속을 이 사막에서 헤메이면서.
“계속 찾고있었던 건가요….”
그녀는. L은 실린더를 하나 남은 오른팔로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친 모래바닥 위로 그녀가 흘리는 눈물과 내 팔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스며들어갔다.
=
이프리트가 내지른 일격이 팔을 녹였을 때, 소녀의 머리를 지배했던 것은 살과 뼈가 불타서 끊어지는 통각보다 자신의 정령과 자신이 떨어져버렸다는 싸늘한 공포감이었다. 비명은 자연스레 터져나왔고, 조금 전까지의 이성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패닉에 빠져 말 그대로 빈틈 투성이가 되어버린 소녀를 이프리트가 봐줄 이유따윈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정령을 주우려던 소녀는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그녀의 정령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갔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대로 개미지옥으로 이어지는 모래의 흐름에 휩쓸리고 말았다. 정령을 되찾기 위해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빠르게 그녀를 끌어당기는 모래의 흐름은 지옥의 입구를 향해 흐르는 강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추락.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래가 흘러내리는 개미굴 한복판이었다. 소녀는 순간 자신의 정령을 돌보려했지만, 거기에는 실린더도, 팔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시커멓게 타들어가버린 살가죽이 어깨죽지에서 덜렁거리고 있었을 뿐. 소녀는 절망했다. 자신의 팔이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정령무기를 홀로 저 위에 남겨두고 말았다는 죄책감과 그로 인한 외로움때문에. 계약을 맺은 이래 이렇게 멀리 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이상 그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수많은 상처가 남고 한쪽 팔이 사라져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 몸을 대충 붕대로 감은 뒤, 소녀는 개미지옥의 출구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 안에서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헤매였는지. 한쪽 팔이 사라진 쌍검술은 놀라도록 무력했고, 정령을 잃은 소녀의 가슴은 막다른 길을 마주할 때마다 바싹바싹 말라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에란스 협곡으로 빠져나왔을 때, 소녀는 탈출의 기쁨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령에 대한 갈망에 빠져있었다.
기본적인 이성은 이 시점에서 성질을 달리하고 말았다. 호위를 맡았던 젊은 상인의 안부, 이 룬가 사막의 면적이 무섭도록 넓으며 실린더는 그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작다는 사실, 인간은 사막에서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탈수증에 걸린다는 사실, 한쪽 팔이 없는 것보다 두 팔이 온전한 편이 물건이 찾기에 수월할 거라는 사실 등은 소녀의 정령을 찾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생각되지 못했다. 자신의 정령이 걱정되서 견딜 수 없었던 소녀는 그런 사소한 사실마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시야가 좁아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모래바람을 타고 꿈틀거리는 사막 사이에서 어디에 파묻혀 있을지 모를 실린더를 찾는다는건 미친 짓이다. 유물이 아니니 L로드를 쓸 수도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숨에 포기했을테고, 설사 포기하지 않았더라도 도중에 비참하게 말라비틀어졌으리라. 하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소녀는 결코 죽는 일 없는 밀레시안이었다. 중간에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공격해서 쓰러뜨리고, 지면 잠시 기절했다가도 다시 깨어난다. 숨이 멈췄다 싶다가도 다시 호흡을 했다. 사막 어딘가에 홀로 남아있을 정령을 생각하면 죽어도 죽을 수 없고, 살아도 산게 아니었다.
소녀는 그렇게 서서히 살아있는 망령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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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은 계약자의 몸에 닿지 못하면 자력으로 바깥에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 불덩이의 공격에 의해 강제로 L에게서 떨어져나갔을 때, 그의 세계는 단숨에 암흑으로 전락했다. 그는 그런 순간이 정말이지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연금술 연구 비용을 벌겠답시고 양 손에 칼을 쥐고 호위일을 하는 것도 마뜩찮은데, 이런 식으로 모든 감각이 차단되면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이 상태의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녀를 찾아가는 일조차 할 수 없는데!!
그래서 그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자신의 하나뿐인 계약자가 자신에게로 손을 뻗어, 이 암흑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그 순간만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계약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그가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이젠 검의 정령을 박을 생각이냐며 비꼬고 화를 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꼬박꼬박 지키던 식사시간도 지키지 않았다. 그녀와 계약한 이후로 처음있는 사태였다. 뭔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실린더 바깥으로 스스로 나갈 수도 없는 그는 지독한 자기혐오와 계약자에 대한 온갖 격정에 휩싸인 채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그가 여태까지 얻어왔던 지식들이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흩어져가기 시작함을 안 순간, 정령은 다시 한번 목이 쉬도록 계약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대로 날 계속 내버려둘 셈이야? 이대로라면 너는 지식이라곤 요만큼도 없고, 심지어 자기 계약자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바보 멍청이와 대화를….
불안이 그의 사고를 파고들어 싹을 틔운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실린더를 버리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쌍검에게 정령을 박으려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나에게 말도 걸지 않고 아이템도 주지 않으면서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거지! 그럼 계약을 파기할 때 나에게서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럴리가 없다고? 그럼 왜 나와 대화를 하지 않는거야? 왜 나를 이렇게 버려두고만 있지? 나는 당신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곁에 있을 수 있는데!!
불안은 부정할수록 자라난다. 그녀가 단 한번이라도 그를 잡아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그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미저 사라지고 그 자신의 이름마저 희미해지는 그 순간까지 계약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무엇이 누구이고, 누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추상상태였다. ()는 붉었다가 푸르러지기도하고, 굳었다가 녹아내리기도했다. 하지만 언제나 싸늘했다. 너무나 싸늘했다. 그것이 왠지는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는 그것뿐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다만 싸늘했다. 그리고 가끔씩 날카로웠다.
정령은 그렇게 갇힌 망령이 되어갔다.
=
D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집착한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얼마 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 대사였지만 그때와 달리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하나뿐인 정령무기니까 당연하다고 대답했고, D는 그게 이상한거라며 정색했다. 자기처럼 하나 사서 박으면 될텐데, 그런 생각도 못하고 사막을 뒤지고 다니다니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정령무기란 오랫동안 써온 무기에 정령이 깃듬으로써 무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함께하면 즐겁다.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다. 눈 앞에서 잃어버린다면 목숨을 끊고 싶어진다.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이다.
D는 여전히 뜨악해했다. 내기에서 이긴 내가 강제로 메이스를 쥐어주고 이 무기의 숙련도를 혼자 힘으로 채워보라고 명령한 덕분에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타르라크가 나와 함께 오지 않는 한 정령무기의 계약따위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한몫 거들었겠지. D는 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번쩍번쩍하고 무거운 걸 손에 익히겠냐고 징징댔지만, 이때까지 D가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이것도 가벼운 축에 속한다.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하염없이 투덜거리는 녀석을 강제로 알비 던전에 밀어넣은 뒤, 나는 제단 근처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내가 우연에 가까운 폭주로 찾아낸 L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처음에는 내가 환상을 본 건가 싶어 깜짝 놀랐지만, 팔의 상처는 확실하게 따끔거렸고 내가 들고있던 실린더 또한 사라진 상태였다. 알고보니 실린더를 찾은 상태에서 그대로 잃어버린 왼팔을 보수하러 소울 스트림으로 갔었다는 모양이다. 내가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켈라 베이스 항구로 터덜터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생전 처음보는 갈색 피부의 소녀가 한쪽 팔에 실린더를 찬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로 충분했다.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내쪽이었으니까.
그녀가 살아있었다는걸 알게 된 P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 금방 정신을 차린 그는 도저히 그녀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L과 그 남자 사이에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이제 남부럽지 않은 원조를 받으며 연금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알고있을 뿐이다. 그녀와 그녀의 정령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전에 교역차 탈틴으로 가서 물건을 사던 중에 우연찮게 만났을 때 아무런 빛도 없던 정령무기는 짙은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이제 그들은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는 달리.
몸을 웅크리자 근육이 당겼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구부러지는 이유는 그래야 더 효과적으로 자신을 깍아내릴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한기 도는 빛깔의 던전과는 달리 검붉은 눈꺼풀 속에서 한때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여성의 얼굴이 퍼즐조각처럼 갈갈이 찢어진 채로 떠올랐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고, 정령검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검을 들고 아름답게 싸우는 그녀를 동경했다. 그 감정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났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나보다 그녀와 더 오랜 시간을 지내는 정령검을 질투했다. 우스운 소리처럼 들리겟지만 진심이었다. 그 질투는 서서히 나를 좀먹어 들어갔고, 나는 어느 틈엔가 묵직한 해머를 골라들고 전투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체격에 비해 상당히 박력넘치는 취향이라며 웃었다. 정령을 박으면 자기한테 구경시켜 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정령을 박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가 자주 마시는 술에 몰래 수면제를 타서 재우고, 검집을 끈 째로 잘라내 훔쳐냈다. 내구도의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정령이 깃든 검을 일반 둔기로 마구 부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나는 정령검이 사라진 충격으로 상실감에 빠져있을 그녀를 내가 위로해주는 상상을 하며 해머를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정령검이 빠지면서 생겨난 그녀의 마음 속 빈 자리를 내가 메꾸고 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령무기를 잃은 상실감과 자신의 부주의함을 미처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런 포워르와의 전투가 일어날 경우까지는 상정하지 못했던 그 계획은 최악의 결과를 이끌어내고 말았다.
그녀는 죽느니만 못한 부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 남았다.
언제나 웃던 얼굴에는 상처 투성이의 고통이 가득했다.
이럴 생각까진 없었다. 그냥, 그녀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령과의 이야기를 하기보다 나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눠주길 원했다. 하지만 이제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날 나는 끊임없이 구통하고 고열에 시달리며 그녀가 나를 마지막으로 밀쳐내고 스스로 포워르의 칼날로 뛰어들던 순간을 몇 번이고 목도했다. 나는 내 손으로 그녀의 동반자를 빼앗음으로써 그녀를 정신적 사지의 길로 내몬 것이다. 나는 그 길로 전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내가 평소 흠모하던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진료비를 버는 줄 알고 기특한 표정을 지었지만, 전리품으로 챙긴 검의 손잡이는 내 죄를 똑똑히 알고있었다.
이, 손잡이만이.
"야, 다 깼다!"
상념은 등 뒤에서 터져나온 D의 목소리에 의해 산산조각났다. 뒤를 돌아보니 D가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옷은 들어가기 전과 다름없이 깔끔했고 실밥 하나 터져있지 않았다. 심지어 둔기에는 그 흔한 쥐의 털이나 거미의 체억 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짐짓 D에게 숨겨진 엄청난 잠재력에 감탄하는 척하며 보상으로 나왔을 아이템을 달라고 말했다. D는 잠깐 굳어졌다가, 곧 자신이 그런 것 하나 안 챙겨왔겠느냐며 나에게 작고 동글동글한 것을 내밀었다.
…작은 은색구슬.
"동작 그만."
"왜, 너무 엄청난 아이템이라서 감탄했냐?"
"닥치고 꺼져. 두 번 꺼져."
나는 구슬을 제단에 바치고 D를 걷어차 밀어넣었다.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울려퍼지려다가 뚝 사라졌다. 또 다시 혼자 남은 던전 입구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충동적으로 금속 손잡이를 꺼내 제단을 향해 치켜들었다. 이걸 바치고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면, 그걸로 나의 죄를 증명하는 것은 사라진다. 이대로, 내려치기만 한다면, 나는 정령조차 아닌 망령으로 변한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녀가 자신의 정령을 버린거나 마찬가지라며 자책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녀의 유품이자 평생 이길 수 없을 라이벌인 그것이, 손아귀 속에서 나를 비웃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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