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본 사이 퍽 어려진 것 같군요?"
"환생했으니까."
"물론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요."
정령의 목소리에 계약자가 가만히 고개를 파묻자 배겟잇이 볼을 감싸안았다. 아무리 부드럽고 폭신한 배게라고는 해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열 살 짜리 꼬마아이면 자기 몸통만한 솜뭉치를 껴안고 다니는 꼴이 되는 법. 아무래도 이 정령에게는 그런 계약자의 모습이 좋은 놀림감으로 보였는지,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다분한 웃음끼가 스며들어있었다.
"후후, 제법 귀여운데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배게를 든 마족단이 나타난 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약자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정령과의 대화를 잠시 뒤로 미루고 배게를 손에 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족단을 향해 달려갔다. 개중에는 눈부신 빛의 갑옷을 입은 팔라딘이나 어둠으로 몸을 감싼 다크 나이트의 모습도 있었다.
마족과 밀레시안이 흰 배게를 손에 들고 장렬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사방에 배게용 하얀 깃털과 양털 뭉치가 휘날린다. 피만 흐르지 않을 뿐이지 아수라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풍경은 높이 떠오르는 이웨카 아래 하나 남아있던 섀도우 위자드가 팔라딘의 신성한 배게 스매쉬를 맞고 뻗어버리는 것으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깃털을 주워모으던 계약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마지막 하나까지 손에 넣었을 무렵에는 언제 전투가 벌어졌냐는 듯한 적막만이 이멘 마하의 평원에 내려앉아 있었다.
"제가 알기론 배게란 사람이 잠을 잘 때에 쓰는 것일텐데… 밀레시안은 그런 것도 무기로 쓰는 겁니까?"
"상대방도 배게로 싸우고 있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처음 보는 풍경이라 쉽게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런 의미에서 슬슬 제 지식욕을 채워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다. 계약자는 작은 주머니에 깃털을 채워넣으며 가방에서 꺼낸 토파즈를 건넸다. 이웨카를 닮은 표면이 허공에서 반짝이는 난반사를 일으키다 정령의 손바닥 사이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빛의 잔상을 쫓던 눈동자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은 자신이 할 일을 거의 마무리했다는 데에서 온 안도감 탓이었을까. 머리로 몰려오는 피로를 견디지 못한 계약자가 잔디밭 위에 배게를 놓고 몸을 눕히자 정령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잘 생각입니까?"
"…잠시…." 눈만 붙일거야.
뒤를 이어야 했던 말들은 계약자의 의식과 함께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삼켜졌다. 졸지에 평원 허공에 홀로 남겨지는 신세가 된 정령은 눈 깜빡할 사이 곤히 잠들어버린 계약자를 내려다보며 턱을 괴었다.
"의외군요. 밀레시안은 잠자지 않는다고 알고있는데."
아니, 당신이 내 앞에서 잠든 적이 없을 뿐인가.
낮은 혼잣말이 계절이 바뀌면서 조금 따뜻해진 잠 공기 사이로 흩어진다. 부드러움 바람에 계약자의 볼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불현듯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천천히 몸을 낮추던 정령은 근처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배게를 든 캣시 기사단.
조금 전의 그 아수라장에서 용케 몸을 숨기고 적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린 점이라던가 숨기 직전까지 격전을 피할 수는 없었을텐데도 비틀거리면서 적을 노리고 조심스레 다가드는 그 모습은 제법 끈기있다고 평가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표적으로 삼은 것이 자신의 계약자라면 단순한 훼방에 지나지 않는다. 계약자의 곁에 정령이 있는 줄도 모르고 대담하게 달려드는 기사단원의 얼굴에 최대한으로 장전된 워터 캐논을 몇 번이고 발사해 완전히 침묵시킨 뒤, 다시 계약자를 돌아본 정령은 그 눈동자가 가늘게 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육체는 깨어있지만 의식은 여전히 혼몽한 상태에 빠져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짓지 못하고 있는 눈동자.
"깼습니까?"
"……."
"별 일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
느릿한, 움직임으로, 눈꺼풀이 닫힌다.
이어지는 차분한 숨소리.
그제사 계약자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넘긴 정령은 비로소 보석을 흡수했을 때보다도 만족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2차 창작 > 마비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트리아즈]세계중심론 (0) | 2017.12.14 |
---|---|
[남실정X밀레시안]EYE PATCH (0) | 2017.12.14 |
밀레시안 메이커~별에서부터 내려온 여행자~ (0) | 2017.12.14 |
[라트리아즈]밀레시안 그랑디 (2) | 2017.12.12 |
남실린더x계약자 SS 모음 (0) | 2017.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