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와서 이런 글이네요. 제목은 나름 중의적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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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새로운 의상에는 흥미없었다. 뭐, 실제로 나온다고 한다면야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겠지만 그걸 노리고 조커 몬스터를 사냥한다거나 카드를 온종일 모아댄다던가 하는건 솔직히 좀 지나친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그런데도 왜 지금 숫자카드를 하나하나 모으고 있는가 하면, 카드를 댓가로 열 수 있는 트럼프 선물 상자에서 상당히 큰 보석이 나온다는 걸 알아버린 탓이다. 보석이라고 하면 던바튼의 개인 상점에서 사려면 개당 만 골드는 가법게 나가고, 야금채를 몇 개씩 버려가며 에르케 폭포를 이잡듯이 뒤져도 3~4cm를 찾으면 운이 좋다고 봐야하는 녀석들이다. 요즘들어 정령이 슬슬 레벨이 높아지면서 1, 2cm짜리는 길가에 깔린 잔돌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기 시작한 바람에 자잘한 보석을 합성하면 더 큰 보석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있던 나에게는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처음 몇 번은 어느 정도의 숫자여야 보석이 나오는지 몰라 숫자 가늠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덕분에 쓸모없는포션만 잔뜩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7이나 8 정도에서 알이 굵은 녀석이 나온다는 것을 안 뒤로는 이렇게 카드 교환에 매진하고있는 중이다. 다만 사람 일이 그리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 법이라, 이따금 용병 스크롤이나 오거의 보증서같은 물건이 -나는 이미 교역에서 손 뗐는데!- 나오기도 했다. 지금 내가 연 상자 안에서 나온 이것도 보석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용병 스크롤과 다를 바 없었는데, 그나마 카드 A로 나왔다는 점에서 다른 아이템들과는 남다른 가치를 기대해볼 법 했다. 하지만….
"하트 안대라니. 센스 한번 멋지네."
기왕이면 클로버나 스페이드 같은걸로 만들었어도 좋았을텐데. 그래도 기왕에 나온 희귀 아이템이겠다, 한번 착용해보는 것도 어떨까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광장에서 핑크빛 하트 안대를 착용하는 모습을 과감히 내보이는건 좀 부끄럽다. 나는 광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던바튼 성벽과 광장 사이의 틈새로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걸어들어가던 도중에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혼자 하트 안대를 매고있는 것도 적잖이 괴상한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돌아가는 것도 바보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광장보다 이쪽이 훨씬 보는 눈이 적다는 건 사실이고.
"…이쯤이면 되려나."
광장에서 약간 멀어졌을 뿐인데도 거짓말처럼 주변이 텅 비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던바튼의 성벽을 마주보고있는 주택의 창가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걸 확인한 뒤, 나는 가방에 넣어두었던 하트 안대를 꺼내들었다. 이런건 처음 해보는거라 감이 잘 안오긴 하지만… 아마도, 음, 이렇게, 하면, 되는 거겠…지?
"됐다."
정말로 어떻게든 착용해버렸다. 뭔가를 묶는 재주는 서툴러서 끈이 좀 느슨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거겠지. 조금 전까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일단 한번 써보니 감촉도 나쁘지 않고 안대의 모양이나 색깔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어서 도리어 약간 편해진 기분이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법이라더니 딱 그 말대로다. 이쯤되면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한 번 보고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아쉽게도 여기에 얼굴을 비출 만한건 우물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너무 깊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뭐… 아무래도 좋은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내가 이걸 열어본 목적은 하트 안대 따위도 아니니.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왼팔에서 찌르르한 감각이 느껴지는 걸 보면, 내 정령도 그리 양반은 아닌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보석을 준 이후로도 충분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불러내도 괜찮겠지. 가방 안에 들어있는 보석을 몇 개 골라내며 정령의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정령 특유의 빛이 일렁이며 몇 번이고 들어온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엔 또 무슨…."
…이어지려다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정령은 마치 기묘한 무언가를 목격한 것 마냥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압도적이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뭐지, 나 뭔가 잘못한거라도 있나? 물론 대화 요청을 못 들은 척 하긴 했지만 그건 보석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거고, 정령도 보석을 잘도 구해왔다면서 놀라면 놀랐지 대화를 무시한걸로 그닥 불만스럽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설마 이제껏 겨우 세 네번 정도 건네준 6cm 짜리 보석에 익숙해져서 이걸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된건 아니겠지?! 그치만 왠지 이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신빙성 있어!!
"아, 아니지?"
대답 대신 머리 뒷쪽을 손으로 붙잡혔다. 설마하니 얼마 전에 익힌 정령 실체화의 기술을 이런 식으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식을 뛰어넘는 전개에 오히려 평온해진 머리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자니, 머리 뒤쪽의 손에 힘이 실리며 정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어?
눈을 감을 사이도 없이 다가온 얼굴은 스치듯 닿았다가 멀어지고, 머리 뒤쪽을 붙잡고있던 손도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그동안 해가 백 번 정도 떨어졌다 다시 솟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신이 들고보니 해나 그림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고 내 정령은 정면에서 하트 안대의 끝을 입에 문 채 어쩐지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이윽고 그 입술에 물려있던 안대가 손바닥 위에 놓인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아니 잠시만!!
"의지가 크게 오르는걸 보니 기분이 좋군요. 후후…."
후후, 가 아니잖아!!
"어, 어, 어째서 그걸 흡수하는거야!! 평소에는 보석말고는 신경도 안 썼으면서!"
"그렇게 떡하니 얼굴에 달려있는걸 신경 안 쓰기는 힘들죠."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보석을 기대하고 있던거 아니었어?!"
"그랬죠."
"근데 왜!?"
정령은 안대를 물어뜯던 조금 전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께느른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턱을 괴었다.
"당신 눈동자를 가리지 않습니까."
"……그것 뿐?"
"그 이외의 이유가 필요합니까?"
단호한 반문에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하긴 내 정령은 이런 성격이었지. 나는 그 이상 안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손에 쥐고있던 보석을 내밀었다. 푸른빛 토파즈, 붉은 루비, 초록색 에메랄드가 차례차례 모습을 감출때마다 빛이 조금씩 강해진 정령은 마침내 보석이 모두 사라졌을 무렵 다음에도 기대한다는 말과 함께 내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는 사라졌다.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퇴장이었다.
"…그나저나 그 안대, 팔았으면 얼마나 했으려나…."
부질없는 상상과 함께 허전한 눈가를 손으로 짚는다.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가볍게 눈가를 덥혔다. 그러고보면 그 녀석, 잘도 안대를 물어버릴 생각을 했네. 실체화를 한 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끈은 느슨하게 묶여있었으니까 그냥 손으로 잡아당겨도 맥없이 벗겨졌을텐데. 어라, 잠시만, 실체화한 상태에서 물어뜯었다는건…?
…….
……….
…………!!!
뒤늦게 그 순간의 감각을 떠올린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손의 온기와는 또 다른 감각이 되살아난 눈가에서 열기를 머금은 꽃이 피어나 전신을 뒤덮는 듯한 기분. 특히나 터져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로브의 후드로 감추며,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감추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겨우 눈꺼풀에 입술이 닿은 정도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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