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살을 베어나가는 모습은 통렬하다. 피부가죽이 갈라지고, 근육과 혈관이 끊어져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검의 날이 무디거나 녹슬어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모든 칼날은 상대방을 베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있기 마련이고, 되어있지않다면 대장간에 수리를 맡겨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될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통렬함'이 단순히 검에 의한 상처의 크기에 좌우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칼날이 예리하다면 똑같은 힘으로도 더 깊은 상처를, 반대로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 스치는 듯한 아주 작은 힘으로도 피부가 잘릴 정도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 검날은 조금, 모자란다.
살을 베려면 보통의 각오보다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줘야한다. 통상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하고 있는 지금은, 아무래도 그 약간의 무딘 감각이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유감스럽든 어떻든 시각은 대장간도 문을 닫은 야심한 밤이고 여기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는 차가운 던전이다. 소녀는 끈적하게 고이는 유감을 억누르기 위해 검날을 어슴푸레한 빛에 비추어보며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설령 검이 부러져 밑둥만 남아있다해도 결국 지금 이렇게 검을 쥐고있는 그 순간부터 그녀가 취할 행동은 단 하나뿐이니까.
…찢어지는 소리.
귀에 닿는 것이 아니라 몸의 혈관과 근육을 타고 머릿 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소리에 몸이 떨린다. 날카로운 통증과 상처 안으로 파고드는 검날의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검날을 조금 더 움직인 소녀는 질긴 천을 가위로 자를 때처럼 피부가 밀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갈라진 상처 사이에서 배어나온 피가 손금을 타고 번져나가 붉은 가지를 뻗고, 상처 부위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목구멍은 물론 전신의 감각이 크게 꿈틀거렸다. 여기서, 여기서 조금만 더….
소녀는 내부를 향한 파괴충동이 더욱 심하게 들끓는 것을 느끼며 발작적으로 왼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은빛 칼날이 손바닥에 박혀들며 피부를 저미고 신경을 찢는 감각에 일시적으로 모든 현실감각이 차단되고, 한동안 머리를 울리는 띵한 통증만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것이야말로 마음 속에 고여있던 온갖 찌꺼기들을 모조리 산화시키기에는 하등 부족함 없는 불꽃이자, 뇌리에 담겨있던 온갖 생각을 전부 먼지처럼 날려버리기에 하등 부족함 없는 유희행위. 고통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이유로 떨리는 한숨을 내뱉은 소녀는 다소 깊게 베인 상처를 핥으며 입 안에 번지는 비릿함을 삼킨 뒤….
-무슨 짓을 하는겁니까?
몸을 타고 전해지는 고통과는 또 다른 경로로 머리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흠칫 어깨가 떨린다. 식은땀과 피가 고여있는 손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본 소녀는 눈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와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황급히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주 잠깐 마주쳤을 뿐인 시선은 어찌나 강렬했는지 도리어 차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죠?
소녀는 상처를 핥고있던 혀를 후퇴시키고 송곳니를 내세워 상처를 지긋이 물어뜯었다. 피맛이 한층 강렬해지며 뱃속이 뜨겁게 달궈지는 듯한, 혹은 심장을 얼음손으로 움켜쥐는 듯한 모순적인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직후 사지가 차가워지고 심장이 격렬히 튀어오르는 것을 느꼈을 무렵에는 그것이 자기자신의 감각인지 단순한 착각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번에야말로 이유를 얘기해주셔야 할겁니다.
몸이 떨리는 것은 밤의 찬 바람과 비밀스런 행위를 들켰다는 수치심 때문이겠지. 손목을 타고 떨어진 붉은 핏줄기는 돌바닥에 떨어지며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침묵을 점점이 재단하고 있었다. 자신도 차라리 이 핏방울처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지금 소녀는 피가 아니라 인간이고, 눈앞에는 자신의 정령이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절벽에 걸쳐진 외줄마냥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놓여있었다.
대답해야할까, 아니면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릴까.
찰나의 고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말해도, 이해 못할텐데."
그런데도 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중얼거리고 만 것은 내부의 침묵이 방점이 되어 모조리 흘러나가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던전의 돌벽을 타고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소녀가 놀랄 틈도 없이, 정령이 매섭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던전 안에서 튀어나오는 아둔한 축생들이랑 똑같이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건가? 말을 해도 이해하기는 커녕 한귀로 듣고 그냥 흘릴거라고? 터무니없는 모욕이로군."
"그, 그런 의미가 아냐…!!"
정령의 말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려던 소녀는 몇 걸음도 채 걷지 못한 채 굳어진 관절의 반항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엉겁결에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 바람에 오른손에 쥐어져있던 검이 바닥 위로 요란스레 떨어지고, 비틀거리던 찰나에 미끄러진 구두 아래에서 피로 찍힌 방점들이 비참하게 뭉그러졌다. 이제까지 소녀가 지켜왔던 무언의 침묵이 무너져 내리듯이, 한순간에.
"……이건 내 마음의 문제고, 내가 택한 방법이니까… 내가 안고있지 않으면 안돼. 당신과는… 관계없는걸."
"헛소리. 정령과 계약한 순간부터 당신은 고독해질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정령으로써 당신을 알 권리가 있어. 그러니 전부 말해. 남김없이 이해할테니까."
"………이해?"
조금 전까지의 무력한 기분과는 완전히 다른 열기가 눈가에 고인다. 소녀는 목구멍 사이로 새어나려는 무언가를 이빨로 단단히 깨물어 버리고는 거세게 깜빡인 눈꺼풀 사이로 고여있던 열기를 날려보내며 얼굴을 들었다.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게 된 정령은 아무 말 없이 안경을 고쳐쓸 뿐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그러쥐며 토해내듯이 외쳤다.
"…말하고, 이해하면? 그 뒤에는 뭐가 남는데?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기분나쁜 눈을 할테고, 나만 이상한 꼬리표가 붙은 채 끝날뿐이잖아! 그 정도는 알고있어!! 정말 싫어… 그냥 내버려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완벽한 이해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아무리 친하다고 믿어도, 아무리 서로를 신용하고 있어도 결국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이쪽에서 필사적으로 얘기하고 애절하게 이해를 구해도 돌아오는 것은 그저 어색하고 차가운 반응과 어이없는 비웃음을 감춘 채 다정한 척하는 겉치레뿐.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그 기억을, 어째서 이런 장소에서 다시 재현해야한단 말인가. 그 분노에 가까운 슬픔에 등을 떠밀려 정신없이 절규한 소녀는, 직후 자신의 행동이 실로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또, 무의미한 짓을 벌이고 말았다.
이런걸 말해봤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받을 뿐인데.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윽고, 정령이 입을 열었다.
"무슨 착각을 하고있는건지 모르겠군."
"……."
"네가 나를 불렀기에 우리는 계약을 맺었고, 그렇기에 내 세계의 모든 것은 너에게서 비롯된다. 그 이외의 존재는 하등 가치도 없어. 그런데 어째서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내가 너를 이해하려는 걸 방해할 수 있다는거지?"
아무도 없는 던전의 돌바닥은 이상할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고, 딱딱한 돌벽은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채 침묵만을 뱉어냈다. 그런 장소에서 일순간이나마 파동을 일으키는 소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정령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환청을 들어버린 것은 단순히 주위가 너무 조용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나는…."
입술이 떨린다. 그러쥔 주먹의 손가락이 우둘투둘한 돌의 표면에 짓눌렸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 가슴이 뛰는 상태에서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던 소녀는, 바로 그 순간 허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무수한 공포의 감정을 느끼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심장이 빨라지는 것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라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폭주하기 시작한 심장박동에 맞춰 호흡이 가빠져오기 시작하더니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 진정되어있던 몸마저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끝없는 공포가 온몸을 사각거리며 기어다니는 가운데, 자신의 몸이 땅 아래로 꺼져버릴 듯한 아득함에 눈 앞이 어지러워진 소녀는 그저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반쯤 쓰러지듯 바닥에 몸을 기댔다. 중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기분이 들지만….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만큼 뒤틀린 그것은, 던전에 반사된 그녀 자신의 절규에 뒤섞여 본래의 현체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이 듣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을 무렵, 소녀의 뇌리에 단 한가지의 극단적인 사고가 되살아났다. …끝없이 이어질지도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가 주는 고통을 쐐기 삼아 그 굴레를 깨부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방법으라서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도구로도 얼마든지 시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다시 한번.
자신을.
……….
……………….
공포에 절여진 머리는 감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몇번이고 다시 휘둘러야 했다.
=
불현듯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는 눈 앞에 피가 달라붙은 단검이 널부러져 있었다. 던전의 돌바닥 틈새로 붉은 핏줄기가 가닥가닥 뻗어나가는 가운데,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왼팔과 허벅지에서 화끈한 열기를 느끼고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겉옷의 왼팔뚝은 엉망으로 찢겨져 안쪽의 상처가 그대로 들여다보였고, 아예 바깥쪽에 드러나있는 허벅지의 경우에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정도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가벼운 찰과상에서부터 시작해 꽤 깊은 상처까지 나있는 자신의 팔다리를 기묘할 정도로 침착한 눈으로 바라본 소녀는 익숙한 손길로 가방 안의 붕대를 꺼내 상처를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하얀 붕대사이로 간간히 피가 배어나와 따끔거렸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공포에 비한다면야.
"……아."
퍼뜩, 소녀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정령의 밥을 챙겨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는 물론,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적당한 시간간격 내에 아이템을 주었던 기억이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강한 편인 실린더 정령인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끼며 일단 가방 안에 전날 미리 챙겨두었던 정령용 아이템이 있음을 확인한 뒤, 소녀는 피투성이의 던전 내부에서 던전 바깥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나오지 않는다. 화가 난걸까.
소녀는 작은 보석을 꼭 쥔 채 다시 한번 조심스레 정령을 불렀다. 여전히 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다시 한번.
결국 세번째 호출에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 정령은 한 눈에 보기에도 심기가 몹시 불편해보이는 얼굴을 하고있었다.
"왜 부르는 겁니까? 목이 터져라 부를 땐 듣지도 않더니."
"미, 미안해요. 듣질 못해서…."
정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 그대로 소녀가 내민 보석을 그대로 흡수하고 스르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상태에서 무어라도 말을 거는 것도 어색한 일이라 일단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소녀는 그동안 정령이 자신을 불렀을 때가 언제였을지를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토록 애타게 -정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을 걸어온 기억은 없었다. 그렇게 불렀더라면 분명히 기억에 남았을텐데.
………기억에……?
소녀는 자신의 왼손을 감고있는 붕대와 거기에 배어나온 피를 내려다보며 공포에 차있던 무렵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려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지만, 그 발작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던 듯한 인상이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가 공포에 사로잡힌 이후 완전히 마음을 갉아먹히던 바로 그 순간 비참한 절규에 뒤섞여 들려왔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것이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정령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더 이상 정상적으로 걷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마을로 이어지는 길 한중간에서 걸음을 멈춘 채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붕대 아래에서 아릿하게 저려오는 상처의 감각 사이로 심장이 조여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심해지면 또 그 발작이 찾아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방어막 삼아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던 소녀의 노력도 헛되이, 마음 한켠에서 불거져나온 또 다른 생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그림자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듯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를 머릿 속에서 지우고 싶으면 자신을 상처입히고는 그 통증을 통해 공포로부터 도망친다. 그것이 그녀가 지닌 괴상한 마음의 질병이었다. 바로 조금 전에도 아무런 맥락 없는 죽음의 공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상처입히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 순간에 그가 자신을 불러주었으리라는 상상 하나에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것 또한 어떤 식으로든 변질되고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후일 이 가정이 공포의 올가미로 모습을 바꾼다면, 그녀는 자신을 상처입히는 것은 물론이요 부지불식간에 실린더를 부수는 일까지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웠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죽음보다는 삶 쪽이 더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든 느끼고 싶어서 정령과 계약을 맺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런 식이어서야….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을거야…."
중얼거린 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기가 그것을 말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소녀는 기어코 땅바닥에 빗물을 닮은 물방울을 떨군 뒤, 한없이 느리게 몸을 일으켜 천천히 마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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