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제단은 비어있었다.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뺨을 긋고 지나갔다.
*
그곳을 향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에스트레야 후보들과 천계의 만남이 끝난 건 알고 있었다. 천계에서 해야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걸음은 하늘을 향했고 폐부는 차가워졌다. 가는 길에 천사의 깃털이나 작은 씨앗을 주웠으나 그걸 얻으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럼 왜 끝없이 위로 올라갔지? 왜 신의 제단을 향했지? 내면에서 엉킨 물음들은 아무렇게나 굴러가다 마음 어딘가에 부딪쳐 멈춰섰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나?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나?
과거를 바꾸고 싶었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나?
아니면 뭔가를 잊고 싶었나?
누군가가 잊어주었으면 했나?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뺨을 긋고 지나갔다.
*
그곳을 향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에스트레야 후보들과 천계의 만남이 끝난 건 알고 있었다. 천계에서 해야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걸음은 하늘을 향했고 폐부는 차가워졌다. 가는 길에 천사의 깃털이나 작은 씨앗을 주웠으나 그걸 얻으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럼 왜 끝없이 위로 올라갔지? 왜 신의 제단을 향했지? 내면에서 엉킨 물음들은 아무렇게나 굴러가다 마음 어딘가에 부딪쳐 멈춰섰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나?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나?
과거를 바꾸고 싶었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나?
아니면 뭔가를 잊고 싶었나?
누군가가 잊어주었으면 했나?
다시 사랑받고 싶었나?
다시 믿고 싶었나?
다시,
다시 한 번.
가족이 되고 싶다고.
…비보라 때문에…
멀리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굴러가던 물음들은 말라버린 꽃잎처럼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식어버린 마음에서 북쪽의 공기 못지 않은 한기가 새어나오는데도 창문 너머로 비쳐드는 햇살은 손 쓸 도리 없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어째서인지 마음 한 켠에 묻었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행을 떠나보면 어떻겠냐는 말이 있었다.
있을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말이 있었다.
자신에게 언제든 말을 걸어달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대로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하기사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감히, 무슨 선택을 하겠는가. 이 붉은 머리카락의 누군가 따위가.
…그러나 2년의 남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이 모습 그대로일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소름끼치고 우스운 것이어서.
차라리 ■어버릴까 하는 생각은 방 안의 먼지처럼 떠돈다. 비보라는 그것을 들이쉬고, 내쉬었다가, 눈을 감고, 제 눈꺼풀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그래도 숨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 총괄님... 얘들아... 자꾸 청소년 심리상담사 되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날 아침 한 명의 인간에게 짐승의 감각을 닮은 것이 씌였다.
하늘은 맑다. 새 몇 마리가 창가에서 지저귄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침대가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간다. 찬장 안에 넣어둔 식기와 찻잔들이 고요하다. 비보라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밤 사이 차가워진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호흡은 부드럽다. 몸도 무겁지 않다. 저택에서의 전보를 받고 돌아갔던 그 겨울날 이후로 언제나 복잡했던 머리 속도 잠잠했다. 잠든 사이 누군가가 쌓여있던 모든 것을 깨끗하게 씻어내버리고 떠나간 듯 텅 비어버린 가슴 속에, 작은 예감 하나가 가볍게 발을 디디곤 속삭였다.
오늘이라면 죽을 수 있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선발식에 참여한지도 어언 5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었기에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예감은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어딘가에 앉아 발을 까딱였다.
셔츠와 검은 치마를 입고, 검은 숄을 브로치로 고정하는 과정은 단순하고 익숙하다. 다만 브로치의 핀이 몇 번인가 손끝을 찔렀다. 진정해, 너무 긴장한 것 뿐이야. 예감이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준 뒤에야 핀은 제대로 천을 꿰뚫었다. 마지막으로 머리핀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비보라는 잠시 손을 멈추고, 허공에서 손을 움찔거리다, 결국 아무것도 몸에 달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나섰다.
나오는 길에는 어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눈에 가장 처음 들어온 마차를 잡아탄 그녀는 말발굽 소리가 한참이나 울려퍼지고서야 자신이 묘지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묻힌 곳.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어린 금발 소녀 하나가 관 속에 들어가 빈 자리를 채운 곳. 그리고 이제는.
나야 거길 먼저 둘러봐도 상관없다며, 예감은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비보라는 한기를 머금은 제 뺨을 천천히 문질렀다. 작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점점 살풍경해져가고 있었다.
*
바칠 꽃도 없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비보라는 십년 남짓한 수명이 새겨진 비석 앞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제 손과 손수건을 이용해 쌓여있는 눈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차가워진 손은 금새 감각이 없어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손끝이 쿡쿡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까 핀으로 찔린 자리에 물이 들어갔나 보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예감은 대수롭잖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다. 비보라는 말라붙은 작은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어서 옆을 돌아보았다.
"……비보라."
아이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자라있었다. 자신은 저 무렵에 어땠었더라. 그걸 떠올리려는 순간 예감이 한쪽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움직이려던 머리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
"왜, 여기에 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무슨 말을 들을지 알잖아.
"응? 비보라."
그게 그들의 전부야.
"……대답이, 필요한가요?"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꽉 깨물며 시선을 떨군다. 품에 안고 있는 연푸른빛과 붉은색 꽃다발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 선명한 빛깔이 언젠가의 모임과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보라는 누군가의 발에 눈이 밟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음을 알았다.
이대로 물러서. 그대로 떠나. 예감의 목소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가슴을 꿰뚫는다. 비보라가 그대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아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가려는 거야?"
이곳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어.
"네."
대답할 필요 없어.
"…기껏 치워놓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럼 당신이 쓰세요. 엘리제."
어차피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떠나려는 거야?"
오늘이라면 죽을 수 있어.
"네."
망설이지 않아도 돼.
예감이, 마음에 올라앉아 발뒷꿈치를 맞부딪친다.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진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것은 제 심장소리의 간격과 닮아있었다. 비보라는 천천히 숄을 움켜쥐었다. 겨울 싸늘함에 마비된 손으로는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줘…. 엄마도 여기 올거야."
여길 떠나자.
"그분에게 드릴 말씀은 없어요."
들을 수 있는 말은 없어.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비보라, 나는… 그냥."
떠나.
"……."
발을 떼.
"………가지 마……."
발을 떼!
비보라는 발을 움직였다.
정면 방향으로.
무슨 짓이야?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요?"
물러서.
"나에게 한 말은 다 잊었어요?"
여기서 추악한 말을 토할 셈이야?
"내가 당신들에게 더 사과해야 하나요?"
이젠 다 상관없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잖아.
"내가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어차피 죽을거라면 조용히 죽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으면서!"
무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소리가 허망하게 퍼져나간다. 비보라는 제 목에서 튀어나간 것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스러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예감은 비보라와 엘리제 사이에 선 채, 형형한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한다. 그 모습이 물에 번지듯 순식간에 흐려졌다.
"전부 내 탓인 것처럼 바라보고! 눈을 돌렸잖아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잖아.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실제로도 그랬어.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고…."
그래서 그들에겐 말을 할 필요가 없었지.
"나도…."
말할 이유가 없어.
"나도, 당신들과 함께 슬퍼하고 싶었는데…!"
이제와서 뭘 하고 싶은 거야.
무얼 하고 싶다는, 그 바늘 같은 말이 자신을 꿰뚫는다. 드러놓아도 좋을 것이 없다며 누르고 잠가놓았던 것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며 줄줄이 새어나온다. 마지막까지 눌러두었으면 깨끗했을 것을. 예감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란 허무하지. 뱉으면 사라지고, 어디로 붙잡지도 못하고, 뒷말을 덧붙이면 금새 바꿀 수 있고. 듣고도 흘려보낼 수 있고, 마음에도 없는 것을 발음할 수도 있어. 그런 것에 왜 매달리는 거야?
왜, 말한거야?
여지껏 잘해왔잖아.
예감은 차분히 속삭인다. 무릎은 제 심장에 얹힌 것의 무게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꺽여버렸다. 비보라는 제 눈물 속에 갇힌 채 대답한다.
죽을 것 같았으니까.
"비비…!"
작은 몸이 달려와 한쪽 몸을 껴안으려한다. 비보라는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다리를 꿈틀거리다, 두 개나 나있는 팔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맨땅에 손톱을 세웠다. 자신의 심장과 가까운 자리에서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울먹임이 들린다. 그보다 먼 곳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온다. 정말이지 꼴사나워 봐줄 수가 없다며. 예감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비보라를 지나쳤다.
여기에 어른 한 명까지 더해지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어. 그래도 좋아?
비보라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 팔이 작은 몸을 껴안았다.
…그래.
등 뒤에는 묘지 근처의 산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가 져있다. 예감은 터벅터벅 걸어가 그 어둠 속에 제 몸을 담구었다. 비보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것이 자신과 같은 모습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자신의 모습을 한 예감이, 죽음의 징조가 그림자 속에 잠긴 채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삼켜지겠구나.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쳐 자신을 휘감았다가 떠나간다. 비보라는 제 품에 있는 이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오열을 쏟아냈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과 이자벨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다. 누군가가 황급히 벗은 겉옷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어떤 그리운 손길이 제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준 순간.
비보라는 자신이 죽을 때를 놓쳤음을 알았다.
*
눈발과 함께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명망 있는 귀족들이라면 누구도 빠지지 않는 신년회에서 이름을 불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보라는 저도 모르게 어둑한 창가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이렇다 할 표정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죽을 수도 없어.
후회하지 않아?
담담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화답하듯 중얼거렸다.
"이미 놓친 것을 후회해서 무엇하겠어요."
어둠 속의 비보라는 웃었다.
반대쪽 그녀가 먼저 미소지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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