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는다.
얼음이 사라진다.
꽃은 피어난다.
잔디가 돋아난다.
나무가 잎을 틔운다.
바람이 따뜻해진다.
햇살이 부드러워진다.
사람들이 무거운 옷을 벗는다.
아이들이 웃고 떠든다.
그래서 비보라는 사막에 머물렀다. 봄이라 하여도 무엇 하나 피어나지 않는 모래의 땅. 열기와 바람과 휘날리는 먼지가 가득한 영역에선 봄이라는 단어마저 물기가 바싹 말라 뒤틀어졌다. 어쩌다 마주치는 이들도 모래바람과 해가 진 뒤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몇 겹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다만 달과 별만은 말라붙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이 버틸 수 없다면 자신들이라도 더더욱 빛나보이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밤의 모래밭이 달빛에 젖어 빛날 때마다 비보라는 제 숄로 눈가를 무겁게 가리고 빛을 등졌다. 제 몸뚱아리만큼 가려진 모래는 더할 나위 없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것.
더러운 것.
끔찍한 것.
보고싶지도 않은 것.
당연하겠지만 모래는 그냥 모래일 뿐이다. 어디로든 흘러가고 어디서든 쌓이는 것. 그 위에 쏟아지는 달빛도 아무 의미없긴 마찬가지였으므로,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레 달과 모래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을 향해 모여들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만드는 것.
물을 마시고 빵을 먹는 것.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
결코, 그냥은 사라지지 않는 것.
하지만 다른 것은 아주 간단하게도 없어졌다.
…머리가 아프다. 속이 울렁거린다. 말라 비틀어져 죽어주지 않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도 않아, 비보라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하여 천사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천사의 날개짓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온갖 웅성임과 말싸움이 남았다. 시련을 주고자 한 그들의 의도는 차가운 석문 사이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좋겠지. 비보라는 몇 번째의 석문에서부터인가 관자놀이에 똬리를 땋은 두통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이종족을 옹호하는 자.
이종족을 비난하는 자.
의심하는 목소리.
항변하는 외침.
옹호하는 손짓.
침묵하는 시선.
하지만 이 사이에 이종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일일까. 설령 인어나 마족, 엘프 등이 제 정체를 숨기고 인간의 왕이 된다 한들, 자신의 종족들을 위해서 혹은 제 욕망을 위해 나라를 움직인 순간부터 그것은 인간이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종족의 외모를 버리고 인간의 가죽을 흉내낸 순간부터겠지.
어쩌면 그때문에 인간만이 참가 가능하다는 자격조건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왕의 선별식에 참가하길 바라는 이종족들은 제 본연의 모습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대로 버리고 에스트레야로서 참가한 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도 차라리 인간이 아닌 자였다면 좋았을텐데.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고가 고장난 태엽처럼 여기저기에 부딪쳐 아프다. 비보라는 느릿느릿 동굴 밖으로 나가,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두통약 대신 들이마셨다.
사방에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가득했다.
색과 냄새가 흘러넘친다. 원래 왕성이 이렇게 자극이 강렬한 거리였던가? 피스타치오와 에뜨와르에게 필요한 물건을 건네주고, 조금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자리를 뜬 이래, 비보라는 내내 입가를 한 손으로 가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만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수확이 잘 끝났다며 웃는 목소리, 어느 노점상에서 음식을 구워 파는 냄새. 길바닥에 떨어져 가끔 굴러가는 낙엽의 색.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비하면 생기가 넘치는 공간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사막에서 지내기보다 이곳에서 사는걸 선호하겠지.
하지만 역시 싫다.
누군가의 웃음, 흩날리는 온갖 색, 폐부까지 파고 들어오는 냄새. 그 사이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번뜩이는 것 같아 흠칫거린게 몇 번인지. 적당히 인적이 드문 가게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로도 묘한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가게 안쪽에 있던 주인은 비보라의 얼굴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말없이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주었다. 평소라면 감사의 인사라도 남겼을 일이지만 주인이 자리에 돌아가 앉은 뒤에도 입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비보라가 애꿎은 찻잔의 무늬를 노려보는 동안, 따스한 차에서 올라오던 김이 허공에서 차츰차츰 자취를 감춰갔다.
"돈 걱정은 마세요. 서비스로 드리는 거니까. …그거라도 마시면 마음이 좀 진정될 거에요."
사람이 없어서 눈에 띄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얼굴이 심각했던 것일까. 주인이 조언한대로 입술이라도 적셔보려던 비보라는 설핏 기울어진 찻물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손가락에서 미끄러진 잔이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다행히 날카로운 소리에 비해 잔에는 흠집 하나 없었으나, 안에 담겨있던 찻물은 테이블에 쏟아지며 비보라의 옷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이제 찻잔 안에 담겨있던 것은 테이블의 일부를 점령한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지금 닦아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어디 데이진 않았죠? …손님? 손님!"
찻값으로는 다소 넘칠 만한 돈이 젖지 않은 테이블 구석에 놓인다. 어딘가에 부딪친 몸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온 비보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골목 한 구석에 멈춰 벽을 짚었다. 건물 그림자에 가려져 햇빛조차 닿지 않는 곳에 기침소리 몇 덩이가 굴러갔다.
…작은 아이의 잔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섞인 찬 기운이,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비비, 그거 알아? 비비네 부모님은 금발의 아이를 키우고 싶어해서, 비비가 태어났을 때 무척 실망했대. 그래서 계속 비비의 머리카락의 색을 바꿀 방법을 찾다가 마차사고로 돌아가신거래.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구나.
그럼 비비, 부탁이 있어…. 비비가 비비네 부모님에게 말해서, 이자벨을 돌려달라고 해줘. 엄마가 그랬어, 비비네 부모님은 죽어서도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했다고, 하지만 비비는 죽 붉은 머리 그대로니까 대신에 이자벨을 데려간거라고….
그건 이상하잖아. 이자벨은 내 쌍둥이란 말야. 비비네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야. 그런데 왜 데려가는 거야? 돌려줘, 돌려달라고 해줘. 다시 살아나게 해줘.
어째서? 비비는 에스트레야잖아. 장차 왕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인거잖아. 그런데 왜 할 수 없다는 거야? 어째서 고개를 젓는거야? 왜 그런 것도 못해?
"이자벨은 비보라 때문에 죽은거잖아!"
*
목재로 이루어진 침대 위에서 사람 하나가 깨어났다. 비명도 절규도 아닌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한참동안 가슴께를 쥐어뜯던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발작같은 몸짓을 멈추고 몸을 웅크렸다. 다만 돌덩이를 삼키는 것 마냥 불안정하고 난폭한 숨소리는 그대로였다.
숨소리는 천천히, 느리고 비통한 신음소리로 바뀌었다. 만약 그걸 누군가가 들었더라면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의문을 품고 말을 걸었으리라. 그러나 후보석은 이미 꺼진 뒤였으며, 에스트레야를 위해 따로 마련된 북부 경비대의 숙소에서 그걸 들을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마음이, 겨울 눈과 고독 아래에서 천천히 뭉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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