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렐 가문의 고용인들 사이에선 '겨울과 봄 사이가 제일 길고도 짧다'는 말이 있다. 우선은 한 해의 마무리와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는 겨울 연회의 건배소리가 모두의 귓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슬그머니 봄맞이 준비가 시작되고,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정원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날 무렵이면 봄 다과회니 낭독회니 하는 것이 줄줄이 이어진다. 결국 꽃이 몇 송이 시들어져 떨어질 무렵에야 한숨을 돌리다 보면, 그토록 바쁘게 일을 했는데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도렐 가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용인들의 노력을 당연시하거나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 적어도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마실 것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주거나, 고용인들이 공들여 준비한 장식이나 음식들을 손님들에게 자랑하며 그들을 추켜세워주곤 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연회에 나온 음식이나 차를 신중히 음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비보라는 그날따라 유난스럽게도 차의 맛에 집중하지 못했다. 레몬과 무엇을 블렌딩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차의 맛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손님이라면 몰라도 같은 가문 사람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일까. 어찌어찌 다과회를 끝내고 정원 한쪽에서 숨을 돌리던 비보라 앞으로 작은 두 그림자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비보라, 오늘 이상해." "이상했어."
"어디 아파?" "또 아파?"
아이들도 눈치 챌 정도로 심했던 걸까, 아니면 어린 아이기에 오히려 자신의 위장을 훤히 꿰뚫어 본걸까. 비보라는 다소 굽어져있던 등을 곧게 피고 살짝 미소지었다.
"아프지 않아요. 조금… 다른 생각을 했거든요."
"다과회의 손님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실례야." "실례!"
"미안해요. 꽤 잘해냈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엉망이었나요?"
"많이는 아냐!" "요만큼!" "맞아, 아마 아무도 몰랐을거야." "우리 빼고!"
으히히, 하며 쌍둥이가 웃는다. 그런 웃음은 숙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그렇게 말하던 비보라도 왠지 얼굴이 느슨해지는 기분에 슬그머니 웃어버렸다. 동쪽의 숲도, 엘프들이 했던 말도, 대신의 남긴 말도 어딘가로 날아가버린 듯 했다.
"아무튼, 아무튼!" "그런 비보라에게 선물이야!"
"…선물이요? 생일은 이미 지나갔는데."
"선물은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도 주는거야!" "맞아!"
그렇게 말하며 쌍둥이가 건넨 건 다과회에서 꽃병 아래를 장식하는데 썼던 동그란 장식종이다. 반절로 두번씩 접혀 부채꼴이 된 그걸 가만히 펼쳐본 비보라의 눈에 짤막한 글자가 들어왔다.
「ViVi」
"…비비?"
"비비." "비비!"
알 수 없는 삼중창이 되었다. 비보라가 종이 안쪽에서 시선을 떼자, 예의 장난스런 미소를 띈 쌍둥이가 킥킥거렸다.
"그게 뭐게?" "뭐게!"
"나는 엘리!" "나는 벨!"
"…………아."
혹시.
"애칭……인가요?"
"응!" "맞아!" "숙녀는 애칭이 있는거라고 그랬어!" "근데 비보라는 맨날 비보라잖아!" "그래서 시무룩했던 거지?" "그러니까 선물해줄게!" "선물!"
꺅꺅대는 목소리. 잘 보면 글씨 옆에는 쌍둥이가 삐뚤빼뚤하게 그린 듯한 작은 꽃도 있다. 비보라는 그 서툰 선을 응시하다 쌍둥이의 작은 몸을 단번에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평생 소중히 할게요."
"평생이래-!" "이건 프로포즈야-!!"
"아니, 프로포즈는 아니에요!"
어찌되었건 아이들은 소란스럽다. 벤치 한쪽에 놓아둔 애칭 위로 봄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워졌다.
"엘리제 아파."
열도 많이 나고 목도 부어서, 엄마랑 다른 하인들 빼면 나도 못 만나러 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이자벨의 머리카락이 가을 햇살 아래 잘 익은 밀밭처럼 빛난다. 저택에 잠시 들리려던 발걸음 그대로 정원 한 켠에 앉아있는 비보라와 이사벨을 본 하녀 몇몇이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사라져갔다.
"언제부터 아팠나요?"
"일주일 전부터. 엄마, 엄청 걱정되나봐. 눈만 뜨면 엘리제부터 보러가."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건 당연한 일이에요."
대답없는 이자벨의 발끝이 벤치 아래의 흙을 볼품없이 헤집는다. 기껏 하녀가 광을 내어 닦았을 검은 구두가 속절없이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비보라는 자신이 걸어다녔던 서부지대의 모래사막을 떠올렸다.
"…그럼 비비네 엄마아빠도 그랬어?"
"……………."
그 모래바람이 숨구멍을 틀어막는다. 비보라는 입을 열려고 했다가, 웃으려고 했다가, 입을 다물려고 했다가, 세 가지 모두 실패했다. 이자벨이 만약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녀를 마주보았더라면 퍽 볼 만한 구경을 했으리라.
과거에 얻어맞은 자의 얼굴은 쉬이 볼 수 있는게 아니다.
"……물론이죠. 늘 저를 간호해주셨어요."
"정말?"
"정말로."
이자벨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미 미소를 짓고 있는 비보라의 얼굴 위로는 비스듬한 햇빛이 쏟아져내렸다.
"그럼 왜………."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자벨은 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비보라는 제 얼굴에 걸어놓은 웃음이 무겁게 늘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끝끝내 거두지 않았다. 모래로 꽉 찬 마음은, 입꼬리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는 순간 터져버릴게 분명했으므로.
"이자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제는 건강한 아이인걸요. 금새 떨치고 일어날 거에요."
"……응."
"그럼 또 둘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어요."
"……응……."
"저도 엘리제의 쾌유를 기원할게요."
"응…. 고마워, 비비."
"별 말씀을요."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슬슬 바람이 차가워요. 이자벨까지 감기에 걸린다면 숙모님도 쓰러져버리실 거에요. 자연스레 연결된 말에 이끌린 것처럼 이자벨이 벤치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보면 이제 내년이면 쌍둥이가 열 살이 될 뿐만 아니라 장남인 아리스티드가 성인의 나이인 열 여덟살을 맞이한다. 이번 겨울 연회는 예년보다 상당히 북적이고 화려해지리라. 준비도 그만큼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겠지. 비보라는 그렇게 제 생각의 방향을 한껏 비틀었다.
땅에서 곡물이 익고, 나무에 과실이 영글고, 수확하는 자들의 손이 그것을 남김없이 거두어가는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오, 여신이여! 만족을 모르는 유령이여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마시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순간
인간은 모래 위에 아무것도 쓸 수 없다오.
*
그 해 겨울 도렐 가의 연회는 다소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사교계에 약간이라도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중에서 그 이유를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가문의 고용인들은 잠깐이라도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이면 서로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알겠지. 그건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여야 해.
어떤 소리도 감상도 생각도 입 밖에 내지 마.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도렐 가문이 고용인들에게 신경을 써준다 해도 결국 아랫것은 아랫것. 가문의 구성원들과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순 없는 법이다. 그나마 세월과 함께 도렐 가문의 일부가 된 오래된 고용인들이 주인된 이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하루를 보냈다.
이윽고 저택에는 들어줄 이를 잃은 온갖 소리들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저택을 수없이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이 그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 잔향은 모조리 가문의 구성원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를 테면 부인의 오열과 그를 달래는 가주의 목소리.
이를 테면 한 명이 되버린 쌍둥이의 울음.
이를 테면 갓 성인이 된 장남의 한숨.
아아,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에게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네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용인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누군가가 그 사이에서 불쑥 중얼거렸다.
소리가 안 나긴 뭐가 안 나.
이 저택의 모든 소리는 다 그 아이에게 들어갔어.
그래서 무슨 꼴이 났는지 다들 알잖아?
*
"이종족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용족, 엘프와 마족… 신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을 닮은 존재들."
"그들을 만나고 짧게나마 소통하면서 생각했어요. 왕국과 각 종족 사이의 얽힘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을까. 이 나라는 무엇을 해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네요. 같은 인간, 같은 피를 이은 가문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에요. "
"…저, 열심히 했어요. 숙보님과 숙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도렐 가문의 붉은 오점 따위가 되지 않기 위해. 그래서 누구보다 기품 있게 있으려고 노력했어요.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이렇게 간단히 버려질 수 있는 거였군요. 한순간의 오열, 분노와 슬픔 앞에서 구겨질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슬픔은 알아요. 슬프지 않을리가 없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원망스러워요."
"제 부모님, 숙부님과 숙모님, 엘리제와 이자벨… 그리고 아리스티드 오라버니, 당신도."
"…불합리한 감정이라는 건 알아요. 이런 때에 가장 알맞은 행동은 슬픔을 추스리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것일테죠."
"그러나 저는 신이 아니에요."
"도렐 가문의 모든 이도 그랬잖아요?"
"…후후."
"하필이면… 붉은 머리를 금빛으로 바꿀 수 있는 약 따위를 찾으러 가서 마차사고로 죽어버리다니…."
"그런 선물 따위 조금도 기쁘지 않은 것을."
"……."
"난 대체 뭐였던 걸까."
*
남색 어둠이 차오른다. 도렐 부인은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저택 바깥에 떨어진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걸음 뒤에는 부인을 여기까지 안내한 젊은 하녀 한 명이 연신 마른 입술을 핥으며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옛날에, 그녀는 긴 머리를 땋아올려 여러가지 장식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머리카락을 때마다 길이를 맞춰 자르고 다르게 묶으며 꾸미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언젠가… 아니, 바로 작년 겨울에도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땋아 꽃과 보석을 장식했다. 땋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머리카락이 잘려있다.
땋은 상태 그대로 뿌리부터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기이한 로프를 연상시켰다. 바로 근처에는 머리를 자르는데 썼을 날붙이 하나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스스로 잘랐구나.
부인은 확신했다. 이윽고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눈송이가 머리카락과 날붙이 위로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겠군. 저건 땔감으로 쓰도록 해요."
"아… 아, 알겠습니다 사모님."
"날붙이는 잘 정리해두도록."
"네."
서둘러 움직이는 하녀의 발 아래에서 눈이 밟힌다. 그 소리에는 추억이 너무 많이 서려있었다. 이 앞으로 이어질 봄과, 여름과, 가을과, 다시 돌아올 겨울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한 박자 늦게 눈시울이 달아오른다. 도렐 가의 부인은 오열 섞인 한숨을 겨우 삼키며 호숫가를 돌아보았다.
하늘은 보지 않는다.
별이 있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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