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대극장의 공연은 모두 마감되었거나 준비과정에 있어 관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에스트레야가 된 이후 거진 처음으로 들리는 대극장은 각별한 감회를 선사해 주는 것이어서, 비보라는 프리 마돈나의 사인을 받은 뒤에도 극장 내부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도중에 그녀를 알아본 극장 직원이 선심을 써준 덕에 빈 공연장에 들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작은 행운이었다.
빈 공연장은 내부 청소를 위해 밝혀둔 불빛으로 조금은 환했으나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탓에 적막이 감돌았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보라가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퍼졌다. 평소에는 깊은 감상을 품지 않고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통로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염치불구하고 무대 위로 살짝 올라간 비보라는 난생 처음으로 보는 광대한 관객석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둥근 천장 아래 빼곡하게 설치된 좌석들이 모두 비어있을 때조차 이러한데, 저기에 사람이 모두 앉아있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던 비보라의 몸이 푸르르 떨렸다.
"무대에 선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거군요…."
목소리는 그리 넓게 퍼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배우들은 넓은 공간에 자신의 목소리를 떨치기 위해 많은 훈련을 한다고 했었지. 비보라는 감히 큰 소리를 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넓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하지만 약간은 어둡고, 사람의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한 홀은 동굴을 연상시켰다.
…서부 지방에는 인간과 용이 교류하던 시절의 흔적이 지하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곳의 모습은 어떨까. 용과 인간의 문화가 섞인 특이한 형태일까? 혹은 문화적 교류를 위해 이 무대와 비슷한 시설이 설치되었는지도 모른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생각이었으나,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올해는 되도록 폐하의 지령에 집중하여 보내고 싶지만, 어쩌면 다시 찾아갈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하를 찬찬히 살펴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비보라는 행여 무대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조심조심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긴 설명은 그렇게 끝났다. 입 안에는 아직 커피의 맛이 남아있다. 어디선가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비보라는 지휘관의 마지막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긍지라는 말의 울림이 묘하게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온다. 이번 과제도 잘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며, 비보라는 창문 바깥의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쩜, 네 머리카락도 많이 길었구나. 이젠 땋아도 되겠어."
"땋아요?"
오랫동안 의자 위에 긴장한 자세로 앉아있던 탓인지 목소리는 보기 좋게 뒤집혀 나오고 말았다. 그게 마치 부인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을까 초조해진 비보라는 재빨리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소 기품없는 행동일런지는 몰라도, 부인의 말에 질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으흠, 죄송해요. 땋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아서."
"그러니? 길게 풀어놓는 것도 좋지만, 단정하게 땋아올리는 것도 예쁘단다. 이 정도 머리면…."
한쪽으로 땋아올리는 방법, 아니면 양쪽으로 땋아내려 위로 틀어올리는 방법…등을 말해주던 부인은 말로만 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비보라의 머리카락을 실제로 만져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요새 유행하는 머리라는데… 이쪽은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 유행한 머리거든… 그리고 이건 내 친구가 했던 스타일이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처음에는 진심으로 모든 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 비보라였으나, 헤어스타일이 거의 두자릿수에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머릿속에서 이제까지 본 머리모양과 부인의 이야기가 뒤섞여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부인은 도중부터 머리모양을 정하는게 아니라 머리 모양에 얽힌 옛 추억을 말해주는데 더 심취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귀찮고 지루하고 싫었느냐고 한다면 또 그런 것도 아니어서.
바깥에서는 고용인들이 겨울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쌍둥이들도 각기 다른 메이드들이 달라붙어 머리를 단장하고 옷을 입히며 둘의 마음에 쏙 드는 연회복장을 맞춰주려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연회의 또 다른 주역이기도 한 도렐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직접 빗어주며 옛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어쩐지 굉장히 쑥쓰러우면서도 두근거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벅차오르는 일인지라, 비보라는 연신 눈을 깜박이거나 가운 아래의 손가락을 바쁘게 조물거려야 했다.
겨울 햇살이 어느 정도 기울어진 뒤에야 이야기를 끝맺은 부인은 비보라의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땋기 시작했다. 그 속도를 보면 마치 이전부터 이 머리 모양을 해주겠노라고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얽혀있었더라. 한꺼번에 흘러들어온 너무 많은 추억 속에서 비보라가 헤매이는 사이, 솜씨좋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부인이 뿌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후후, 내가 네 나이 때 했던 머리 모양이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예쁘구나."
"아… 가, 감사, 감사해요 숙모님.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감사할 것 없단다. 그냥 땋아서 올린게 전부인걸. 다른 머리모양도 예쁘니까, 바꾸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말해주렴."
아니오. 저는 이 머리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품은 말은 너무 거대해서 목을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느새 단장을 끝내고 화려한 모습을 보이러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찾아온 쌍둥이는 비보라의 머리 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자기들도 저렇게 머리를 땋아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부인을 퍽 곤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머리는 언젠가의 비보라처럼 어깨 위를 겨우 덮는 정도였기에 묶는다면 모를까 땋는 것은 무리였다.
"너희들도 비보라랑 같은 나이가 되면 이렇게 해줄테니까 기다리렴!"
"그럼 그동안 머리 기를래!" "기르자!" "비보라는 좋겠다!" "좋겠다!"
돌림 노래처럼 반복되는 말을 듣고 비보라는 웃었다. 만약 내일 당장 열이 올라 쓰러진다 해도, 겨울 연회가 갑작스런 이유로 취소된다 해도, 이 순간의 기분을 맛본 것 만으로도 올해 겨울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다했다. 그런 확신이 천천히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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