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함께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는 건 잘못된 걸까요.
베른하드는 언젠가 강에 끼어있던 살얼음이 초봄의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흘러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듀얼 콜로세움에서 몇 번째의 패배를 겪고도 또 한 번 열세에 몰리고 있던 찰나 풀썩 쓰러진 지시자 또한 그만큼 갑작스러웠다. 뒤에서 대기중이던 베른하드가 그녀를 부축할 사이도 없이 그들을 휘감은 어둠은 오랜 현기증과 역겨움 끝에 그들을 성녀의 관 안으로 귀환시켰다. 처음에는 에바나 프리드리히가 의식을 잃다시피 한 상태라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한 베른하드였지만, 어째서인지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상찮은 일이었다. 보통 때라면 아무리 심한 치명상이라도 하룻밤을 넘지 않는다. 적어도 지시자가 이 성녀의 관 안을 또각또각 걸어 다닐 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방 안의 침대에 누워있다. 차이가 유일히니 원인은 극명했다. 문제는 이유였다. 왜 지시자는 눈을 뜨지 않는가. 어째서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의 상처는 낫지 않고 그들의 의식 또한 돌아오지 않는가. 베른하드의 발치에 흩뿌려진 의문들이 시간을 양분 삼아 수북하게 자라날 동안 인형의 눈꺼풀은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이상 성녀의 관에 처박혀봤자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베른하드는 제 검을 챙겨들고 성녀의 관을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인형을 아가씨라고 부르며 참 극진히도 대하던 브라우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베른하드는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기보다 길이 이어지지 않았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언뜻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다 성녀의 관 앞에 그를 토해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세 번 연속으로 일어났다. 멀쩡한 길을 버리고 주변의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보거나 심지어는 인형의 몸을 짊어진 채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미친 짓까지 감행했건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중에 자잘한 몬스터들이 보이는 일도 없었다. 이래서야 성녀의 관을 중심으로 한 반경 몇 알레의 공간에 갇혀버린 꼴이다. 이것도 지시자가 눈을 뜨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겠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기미는 없다. 그런데 해결책을 알아낼 수단이 없고 수단이 없다는 것을 외부에 알릴 방법도 없다. 베른하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 베른하드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인지, 지시자의 몸을 안고 돌아온 베른하드는 현관 바닥에 스치듯 떨어져있는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가 그토록 만나려했던 어콜라이트 브라우로부터의 서신이었다. 편지가 왔다는 것은 외부와 성녀의 관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뜻이니 안도해야 마땅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날렵하게 접힌 봉투와 붉게 찍힌 인장은 안도감은 커녕 불안함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그렇다고 편지를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 베른하드는 지시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편지를 뜯었다. 글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우아하게 적혀있었다.
[아가씨께서는 전사를 이끄는 여행을 포기하셨습니다. 머잖아 화염의 성녀님께서 아가씨의 영혼을 완전히 거둬 가시면 전사분들도 자연스레 소멸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마음 편히 기다려 주십시오.
브라우.]
“…….”
편지는 구겨지지도 찢겨지지도 않았다. 베른하드는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릿 속으로 몇 번 되뇌어 본 다음 혹여나 내용을 잘못 오독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단아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며 검토했다. 오독은 없었다. 지시자는 제 임무를 포기했고 전사들은 가치를 잃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정말 간단한 내용이었다. 너무 간단해서 오찬 초대라도 받은 기분이다. 베른하드는 편지를 결대로 접어 넣은 뒤 지시자를 본래의 방으로 돌려놓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흡사 죽은 인형을 다루는 느낌이었다.
그날 유일하게 듀얼에 함께 하지 않았던 전사는 느닷없이 제 방을 찾아온 베른하드가 일방적인 소멸을 알리는 통지서를 건넸는데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붉은 눈동자로 편지지를 응시하다 하얀 손가락으로 편지를 접어 봉투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와중에 손가락에 점점이 달라붙은 인장 조각이 푸슬푸슬 떨어져내렸다.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가 의식불명인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만나러 갈텐가?”
“아뇨.”
담백한 대답이었다. 제가 소멸한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옛 전대의 추억을 가진 이들이 의식불명이든 어떻든 아무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베른하드는 구태여 그걸 비난하진 않았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사정이 있고,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 전부 사라질 운명이다. 미쳐 발광하지만 않는다면 제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게 상책이리라. 베른하드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 누워있을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에게도 이 통보를 알려주기 위해 등을 돌렸다. 과연 그들이 베른하드의 말을 이해할 정도의 의식을 되찾았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알려주려는 시도는 해야 했다. 물론 그룬왈드가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며칠 뒤 불길에 휩싸인 인형은 새까만 잿더미가 되었다.
타고 남은 재마저 신기루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베른하드는 그 모든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뒤 지시자의 방을 나왔다. 지시자가 불타는 것과 동시에 존재가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예상 외로 사지의 감각은 뚜렷했다. 깨지고 부서지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 있는 성녀의 관 쪽이었다. 아무래도 전사들의 소멸은 이 공간이 무너져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이루어질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를 찾아갈 요량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베른하드는 저 아래쪽 홀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룬왈드를 발견했다. 이쪽을 등지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위에 드리워진 검은 옷자락이 한낮의 그림자처럼 짙었다.
“거기에 있을 생각이냐.”
돌아보지 않는다.
베른하드는 그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그들이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에바리스트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프리드리히는 반쯤 의식을 되찾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베른하드가 그를 기다리는 운명을 말해줘도 하는 수 없지, 하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복도를 걸어가던 베른하드는 저 멀리 보이는 방문이 비스듬하게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은 틀림없이 문을 닫고 나왔고 에바리스트나 프리드리히는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만한 상태가 아니니 저렇게 문을 열어둘 만한 사람은 그룬왈드 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 하얀 얼굴을 하고선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남기러 찾아왔던 것일까.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간 베른하드가 목격한 것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붉은 풍경이었다. 두 걸음 걸어들어가니 상황은 더욱 참혹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기계적으로 살펴본 상처들은 베였다기보다 찢고 후벼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잔혹했다. 누워있는 사람이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손을 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감겨줄 눈꺼풀조차 없는 두 사람의 시신을 조악하게 수습하곤 방을 벗어나는 베른하드의 등 뒤에서 새까만 잔금이 곰팡이처럼 피어났다.
“그룬왈드.”
검은 옷의 왕자가 천천히 위를 올려다본다. 하얗고 고귀하던 얼굴에는 붉은 피가 잔뜩 말라붙어있었다. 어째서 이토록 진한 피 냄새를 맡지 못했을까. 베른하드는 해이해져있었던 자신을 꾸짖으며 홀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룬왈드를 향해 걸어갔다. 피투성이 왕자님은 그가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죽음에 홀린건가.”
마지막 걸음이 붉은 카펫에 닿는다. 마주보게 된 상대는 피 얼룩이 진 것만 제외하면 제법 차분한 얼굴이었다.
“죽음에 홀린 것은 당신이나 저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
그룬왈드의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면 레지멘트 이후로 서로 검을 맞대는 것은 처음인가. 깊은 숨을 몰아쉬고, 베른하드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어 순식간에 간격을 좁혔다. 바닥의 카펫은 부드러웠지만 검을 들고 싸우기에는 충분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
“이제 와서 이유를 알 필요가 있습니까?”
“때가 언제든 간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얻지 못할 존재 아닙니까.”
“그런 걸 네가 정할 수 있다는 건가?”
“잊으셨나요. 그 말을 해준 것은 당신이었는데.”
“뭐?”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존재다. 무언가를 얻는다던가, 이룬다던가, 해낸다던가 하는 무른 생각은 버려라. 그게 당신이 가르쳐준 것이지요.”
“자신의 욕망에 남의 말을 덧붙일 줄도 알게 되었나. 제법 교활해졌군.”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만큼 검이 무뎌졌어.
날카로운 검무 속에서 마지막 지적을 대신한 것은 검고 길쭉한 칼날이었다. 순식간에 옆구리가 찔리고 오른팔을 깊게 베인 그룬왈드의 얼굴에 고통이 스칠 사이도 없이 자세를 낮춰 허벅지를 깊게 찌르자 살점을 타고 샘솟은 피가 칼날을 더럽혔다. 베른하드는 자세가 무너진 안쪽 다리를 걸어 그룬왈드의 몸을 쓰러뜨린 뒤 무방비한 어깨를 짓밟으며 날카로운 검 끝을 들어 그의 목을 겨냥했다. 아주 약간만 스쳐도 피가 용솟을 위치였다.
“두 사람도 이런 식으로 베었나?”
“아뇨. 이미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왼쪽 어깨를 짓밟은 군화 밑창 아래에서 관절이 삐걱거린다. 검을 들어 목을 치지 않은 것은 자비가 아닌 추궁을 위한 것이었다.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면, 왜 그런 짓을 했지?”
침묵.
“대답해라, 그룬왈드.”
관절이 으드득 소리를 낸다.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데 여기서 힘을 더 준다면 틀림없이 몸에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어차피 전부 소멸하는 마당에 그런 것은 다 소용없을지도 모르지만….
“신경에 거슬려서 죽였습니다.”
다발로 묶인 나무가 꺽이고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바닥에 깔린 그룬왈드의 몸이 파드득 경련했지만 베른하드에게는 아무런 가책도 들지 않았다. 하기사 자신과 이 왕자의 사이에는 한때 레지멘트에 속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인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오늘 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마지막까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 없이 소멸했겠지. 하지만 그룬왈드는 가장 무력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가장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러니 베른하드가 이곳에서 그를 죽여버린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성유계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나 다름없는 이 공간이 머잖아 그들과 인형을 비롯한 모든 구성요소를 잃고 한낱 티끌보다 못한 무(無)로 돌아가는 이상 이 일방적인 처형을 알아차릴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베른하드는 끝끝내 그의 숨통을 끊지 않고 발을 치웠다. 망가진 어깨와 찔리고 베인 살갗의 고통을 참느라 얼굴이 한껏 찌푸려진 그룬왈드가 숨을 헐떡였다.
“뭘, 망설이시는 거죠.”
“내가 여기서 널 죽이면 나는 너와 똑같은 족속이 되겠지.”
“그게 두려우신가요?”
“아니. 역겨울 뿐이다.”
베른하드는 그룬왈드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성녀의 관 곳곳의 균열과 진동은 점점 심해지고 있어 그 간단한 동작조차 힘들었다. 팔과 허벅지가 깊게 베이고 어깨가 어긋난 사람이라면 어지럼증 때문에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겠지. 흘끗 내려다본 그룬왈드는 아니나 다를까 몸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다 다시 허물어지고 있었다.
“꼴사납군. 그룬왈드.”
“…….”
“너는 죽음에 홀려있는 인간이다. 여기서 내가 너를 죽여봤자 너를 기쁘게 만들 뿐이겠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 그룬왈드는 약간 입을 벌리고, 정지했다. 뺨 위에서 갈빛으로 얼룩져가는 피 얼룩은 이제 곧 그의 얼굴에도 균열이 생길 거라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만두실 건가요?”
아까까지 얼음처럼 유지되던 담담한 태도에 감정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베른하드는 그가 오직 죽기 위해서 죽였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마 그 편지를 읽은 날 이후로 줄곧 세워온 계획이겠지. 그저 멍하니 존재를 잃어버리느니 명확한 결말을 맞이할 생각으로 의식 불명 상태나 다름없는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를 잔인하게 죽이며, 틀림없이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 검은 옷의 왕자. 베른하드는 곳곳에 뚫린 균열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심연만큼이나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아직 거두지 않았던 검을 들었다. 순간 지옥에 내몰린 듯 말라붙어가던 왕자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착각하지 마라. 네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낮은 땅울림이 몸을 떨었다. 그 순간 검은 그룬왈드의 왼쪽 눈을 베어내고 남은 오른쪽 눈마저 찔러버렸다. 창백한 입술에서 한데 뒤엉긴 비명, 한숨, 호흡이 뚝뚝 흘러내려 카펫을 더럽히고 눈물도 아닌 무언가와 섞인 핏물이 하염없이 샘솟으며 말라붙어가던 얼굴을 흠뻑 적셨다.
한때 제자였던 이의 눈을 망설임 없이 찢어버린 교관은 그 이상 그룬왈드를 지켜보는 일 없이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올라 그곳을 떠났다. 빛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룬왈드만이 땅울림과 균열과 함께 남아 미친 사람 처럼 베른하드의 이름을 부르며 되뇌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이름이, 마음이 땅울림에 통째로 삼켜졌다.
베른하드, 베른하드.
당신이 나를 죽여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의미하군.”
베른하드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발치에서 굴러가던 낙엽이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겹쳐놓은 장작 사이로 끼어들어가 새까맣게 그을리며 연기 한 줌을 자아냈다. 소용돌이의 변덕스런 기후에 대비하기 위한 적응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찾아온 산 구석구석에 숨겨있던 어둠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존재다.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무른 마음가짐 따위는 사치야.”
“하지만 저는.”
“허황된 소원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가? 어떤 소원이든 바란다는 것은 곧 욕심이다. 욕심은 사람을 둔하게 만들지. 공연한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소원 따위는 버려라.”
스산한 가을 바람이 그룬왈드의 볼을 두드렸다. 말을 마친 베른하드는 저 뒤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프리드리히의 목소리를 듣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바로 아까까지 빛나는 태양이 있었던 하늘은 진득한 붉은 빛을 띄고 산을 감싼 어둠을 한층 더 음침하게 채색한다. 그 언저리를 응시하던 그룬왈드가 메마른 입술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당신과 함께 죽고 싶어요.”
치명적인 독에 중독되어 피가 말라붙는 고통 끝에 죽어도 좋다. 깊은 상처를 입은 환부가 짓무르고 터져 피고름 범벅이 된 채로 죽어도 좋다. 사지가 잘려나간 비참한 꼬락서니가 되어도, 산 채로 살과 뼈가 갈갈이 찢기더라도 내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당신이 나와 함께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있다면.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룬왈드의 어린 가슴은 충족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동물을 사냥하고 가르며 피내음을 맡아왔건만 그런 충만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아무 편견 없는 누군가가 그룬왈드의 속마음을 들었더라면 그것은 첫사랑, 혹은 연정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을지도 모르지만 불행히도 그의 주변에는 그 정도로 친분 있는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그룬왈드 본인 또한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술술 말할 정도로 사교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에게서 사랑받은 기억도 없고 표면적으로라도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이 느껴본 ‘애정’을 말로 표현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그룬왈드의 마음은 본인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고여만 갔다. 그동안 소년은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과 베른하드가 함께 죽기를 소망했지만 그렇다고 서로가 개죽음을 당하기를 바라거나 동반자살을 꾀하려 든 적은 없었다. 같은 전장에서 함께 검을 들고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소년이 원하는 최고의 결말이었으니까.
하지만 베른하드는 소용돌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룬왈드의 마음이 썩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윽고 그는 전장 한가운데로 내던져졌다. 한때 이형의 생물을 죽인 검 끝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살아있는 것은 죽이지 않기로 했던 지하실에서의 약속이 무색하게도 그룬왈드는 참 많은 시체를 만들었다. 발 밑은 언제나 덜 굳은 피나 시체의 진물로 찐득했고 코에는 탄내와 핏내가 들러붙어있어 그 어떤 악취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투는 늘 승리였지만 물자의 보급은 툭하면 끊어졌다. 병사들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져가는 음식과 무기 보급 앞에서 어수선하게 웅성댔지만 그딴 것은 그룬왈드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과거에 이룰 수 없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단단히 못을 박던 목소리의 울림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룬왈드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남긴 사람은 이 세계에 없다. 그걸 생각하다보면 그룬왈드는 누군가를 찌르고 베고 마구잡이로 죽이고 싶어졌다. 다행히 전장에는 여기저기 널린 것이 시체고 적인지라 인륜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로 발목 잡힐 일은 없었다. 그룬왈드는 사람을 죽이면서, 혹은 시체를 유린하며 줄곧 베른하드를 떠올렸다.
함께 죽고 싶었던 사람. 그러나 함께 죽을 수 없었던 사람. 그것이 그의 말마따나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었다면 차라리 내가 죽여버렸어야 했을까. 지금 그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무방비한 등을 찌르고, 다리를 자르고, 피를 뒤집어쓴 채 내장을 들쑤시면서 그의 품 안으로 한껏 파고들었더라면 마음이 훨씬 더 충족되었을까.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가정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덜너덜해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룬왈드는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이 아닌 벌레의 죽음이었다. 정확히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는 공백 뒤에 다시 한 번 눈꺼풀을 들어올린 그룬왈드는 제 죽음에 대한 상세한 기억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린 채 벌레가 아닌 인간이 되어 부드러운 카펫 바닥에 발을 디뎠다. 눈 앞에 서있는 인형의 하얗고 빨간 옷의 대비가 눈에 아프도록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녀의 인도를 따르던 그룬왈드는 옛 동지였던 에바리스트와 재회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른하드를 만났다.
그 순간 뭉개져있던 마음이 꿈틀거렸다. 조각조각으로 부서져버린 기억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잊고 있던 감정들을 되살려 냈다. 함께 죽고 싶었던 사람. 함께 죽을 수 없었던 사람. 차라리 죽여버렸더라면 어땠을까, 지나간 시간을 휘휘 저어보게 했던 사람. 그룬왈드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섰다. 베른하드는 그런 그를 잠깐 응시하는 듯 하다가 그의 반대편에 서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에바리스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별로 변한 곳이 없으시군요.”
두 사람 사이에 사소한 인사와 대화가 이어졌다. 그룬왈드는 꼼짝도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지시자가 다가와 베른하드에게 방을 안내해주겠다며 그를 윗 층으로 안내할 때에도 그룬왈드는 흡사 망부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베른하드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시자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흘끗 이쪽을 돌아본 에바리스트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룬왈드는 굳어버린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느릿느릿 그들을 쫓았지만 결국 그날 베른하드가 그룬왈드를 봐주거나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일은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이번에는 프리드리히가 지시자의 손을 잡고 홀로 들어왔다. 서로 마주친 쌍둥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서로 쓴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분명 자연스러웠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던 그룬왈드는 충동적으로 베른하드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베른하드가 그를 봐준 것은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화제도 없이 갑작스레 시작된 이야기는 시작만큼이나 흐지부지하게 끝났고, 대화의 흐름에서 맥없이 튕겨져 나와 제 방으로 돌아온 그룬왈드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인 뒤에야 베른하드가 자신을 다른 이들 만큼 기억해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은 기억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기억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룬왈드의 의문을 들은 지시자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전에 강한 연결고리를 가져서 그런 거에요. 베른하드에게는 당신과의 연결고리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룬왈드는 오랫동안 방 안에만 있었다. 어떤 날에는 성녀의 관 주변을 서성이는 작은 몬스터들을 찾아 기계적으로 잡아 죽였다. 그렇잖아도 그룬왈드의 능력이 마땅찮다며 불신을 감추지 않던 지시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배제하곤 퀘스트든 듀얼이든 다른 세 명만 데리고 돌아다니며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룬왈드에게 있어 지시자의 태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베른하드에게 있어 자신이 아무 연결도 없는 존재라는 게 중요했다. 그것을 생각하고 떠올릴 때마다 심장에 구멍이 뚫려 찬 바람이 스며나온다. 듀얼 도중에 널부러진 지시자를 포함한 다른 전사들과 함께 베른하드가 돌아온 것은 찬 바람에 질린 마음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얼마 뒤 베른하드가 그의 방을 찾아왔다. 현 상황에 대해 어콜라이트가 보낸 편지가 왔으니 읽어보라는 이유였다. 이유야 어쨌든 그것은 베른하드가 자신의 방을 찾아와 이름을 불러준 최초의 순간이자 그가 다른 두 사람이 아닌 자신을 신경 쓰게 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거기에 더해 전사들의 존재가 소멸한다느니 하는 편지 또한 생전의 그룬왈드가 원했던 죽음에 대한 욕망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한 끝에 소멸한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베른하드의 마음에 남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베른하드를 자신이 직접 죽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봐도 왠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제는 몬스터의 털이나 발톱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숲에 가만히 서있던 그룬왈드는 불현듯 해답을 깨달았다. 자신이 베른하드를 죽이는 게 아니라, 베른하드가 자신을 죽이게 하면 된다. 타인을 죽이고 싶어하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능가하는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룬왈드는 전장에서의 경험으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냉정한 베른하드라 할 지라도 자신보다 더 신경 쓰는 이들의 몸을 마구 훼손한다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적의를 품을 것이 틀림없었다. 베른하드가 지시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방을 비운 틈을 타 행여나 그 적의가 어이없이 풀려나가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그들의 신체를 훼손하던 그룬왈드는 도중에 자신을 응시하는 프리드리히의 눈을 발견하고 잠시 손을 멈췄다.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검을 놀리기 시작하자 프리드리히의 동공이 금방 탁한 빛깔을 띄었다.
모든 것을 마치고 베른하드를 찾아 홀로 내려온 그룬왈드는 제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베른하드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방 안에 벌어진 참상을 목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참상을 보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미워하게 될 것이다. 검을 뽑아들고 자신을 일방적으로 처형하러 와 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건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베른하드는 그를 죽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곁에서 떠나버렸다. 떠나버린 그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양 눈이 찢긴 상황에서조차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베른하드, 베른하드, 베른하드…!”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뺨이 축축하다. 그룬왈드는 어긋나고 부러진 팔로 어떻게든 바닥을 기어가다 내장이 얼어붙어 산산조각나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옹송그렸다. 숨이 괴롭다. 보이지 않는 눈 앞이 괴롭다. 왜 나를 죽도록 미워해주지 않지. 왜 나를 죽여주지 않는 거야. 당신의 모든 감정을 담아 검을 휘둘러 준다면 나는 정말이지 기쁘게 찢겨 죽을 수 있는데. 당신의 발 밑에 새빨간 피를 흩뿌리며 죽을 수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나를 향한 당신의 충동이자 최후의 빛이었건만 당신은 나를 죽여주지 않았다. 심판만 내리고 가버렸다. 당신이 내 몸을 갈라 꺼내고 그 발로 짓밟아 터뜨려버리는 것 외에는 정말인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생명이었는데.
거대한 울림이 점점 커져간다. 그룬왈드는 베른하드가 짓밟은 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이렇게 애매한 고통과 애매한 감정만 남을 수는 없었다. 그룬왈드는 찢긴 눈을 대신해 팔과 피부로 세계를 더듬으며 나아갔다. 입꼬리가 떨린다. 텅 비어버린 안와에서 문득 새어나온 핏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 당신에게 죽으러 가자.
이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바라건데 당신이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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