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기심으로 숨어든 궁궐 안에는 작은 사발을 마주한 소년이 있었다. 나이는 이제 열 살에 접어들었을까?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올라있던 것은 임종을 앞둔 노인이 짓곤하던 표정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인간이 눈 앞에서 흔들리는 욕망에서 눈을 돌려버릴 때의 얼굴. 그래서인가, 레온은 제가 숨어들어온 처지란 것도 잊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너, 곧 죽을 사람 같다.
.....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있어?
......
저기...
어차피 난 죽습니다. 누가 보낸 건진 모르겠지만 돌아가주세요. ...아니면 어머니가 확인하고 오라고 하시던가요.
레온은 멀거니 서있었다. 소년은 비틀린 나무처럼 얼굴을 찡그리곤 제 앞에 놓인 사발로 손을 뻗었다. 저걸 마시게 해선 안돼. 생각의 온점이 찍히기도 전에 레온은 사발을 빼앗아 바닥에 엎어버렸다. 탁한 냄새. 음침하게 고이는 검은 빛.
무슨 짓이죠.
나도 잘 모르겠어.
......
화났어?
...모르겠습니다.
말린 과일 먹을래?
소년은 길게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이 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준 노란 알맹이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얼굴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작은 고사리 손에 얹힌 과일은 개나리마냥 화사했다.
다음날에도 소년은 사발을 마주보고 있었다. 레온은 그릇을 뒤집어버렸다. 다음날에도 또 있었다. 레온은 그릇을 아예 밀어내버리고 말린 과일을 주었다. 소년은 다람쥐처럼 오물거리며 과일을 먹었다. 이따금 둘은 놀기도 했다. 소년은 저잣거리의 놀이 따윈 하나도 몰라 레온이 일일이 가르쳐줘야 했지만, 어쨌든 둘은 제법 잘 어울려놀았다. 소년이 그 유명한 저주받은 셋째 왕자라는걸 안 것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말야.
왜요.
그때 그 약, 결국 뭐였어?
아, 그거.
이제는 청년의 티가 완연한(그러나 레온이 보기엔 아직 풋기가 남아있는) 그룬왈드는 바둑의 다음 수를 궁리하나 싶더니 이내 레온이 상상못한 위치에 돌을 놓으며 대답했다.
마시면 죽었겠죠.
...알고있었어?
어마마마는 날 싫어하니까.
......
그래도 굳이 살고 싶진 않아서 마실까 했는데 레온 형아..... 아니, 당신이 와버려서.
그럼 내가 안 왔으면 마셨을거란 얘기야?
그랬겠죠.
그룬왈드의 수는 허술한 듯 하면서도 착실하게 숨을 조여오고 있다. 그동안 진게 헛수고는 아니었구나. 그런 농담을 건넬까 하다가, 레온은 마음을 바꿔 공격적인 위치에 제 돌을 얹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어때?
.....몰라, 모르겠어. 아직도.
......
아직도, 라는건 전에도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것일까.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제 추억을 저울대 삼아 죽음과 삶을 저울질하는 그룬왈드를 상상하다가, 그만둔다. 그룬왈드의 손은 바둑판 위에서 멈춰있었다.
그룬왈드. 난 네가 살아있는게 좋다.
...그럼 여기서 죽어주세요.
야, 그거랑 바둑이랑은 별개의 얘기지...
이 작은 아이, 삶을 몰라서 일찌감치 죽음에 홀혀버린 아이. 만약 네가 죽으면 내 마음에 꽉 찬 애정은 대체 어디로 가겠느냐. 레온의 한탄이 닫힌 둑 안에서 넘실거린다. 그룬왈드의 눈이 그 물결을 훔쳐보려는 듯 살짝 가늘어졌다.
2.
레온의 반지는 그룬왈드의 손가락에는 헐렁했다
너는 목에 걸고 다녀야겠다며 레온이 웃었다.
3.
그룬왈드의 썩은 몸은 진실한 사랑만이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새까맣게 변한 왕자님은 베른하드의 옷깃을 그러쥐고 멈춰세우는데 성공했지만 두 사람의 입맞춤은 차갑고 허무할 뿐... "널 사랑할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나에겐 그게 당신이었는데. 당신 뿐이었는데. 왕자의 말은 심중에서 썩었다. 문드러졌다. 아무도 들을 일 없는 연모의 감정이 말라죽었다. 베른하드는 그룬왈드의 시체를 장례지내곤 조용히 기억 사이에 묻어버렸다. 그걸로 끝나버린 비참한 연정.
4.
그룬왈드는 마지막 남은 살점이 생명을 잃고 썩어 부패할때까지 키스를 바라지 않았다 브레이즈도 그 비참한 생명을 굳이 부여잡으려 하지 않았다 썩은 고기 사이로 악취가 피어오른다 브레이즈는 시체를 치우기 전 썩은 눈꺼풀을 감겨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너를 사랑할 이가 있었으면 살 수 있었을테지만 네 끈적한 살점에 입맞추려는 이는 없었다 나는 오로지 네 몸에 붙은 검은 곰팡이들을 남김없이 불태워 정화시키고 싶었지 그리고 까맣게 타버린 너의 시체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그건 사랑이 아냐 사랑이 아니지 사랑이 아니었기에 브레이즈는 차갑고 썩은 입술위에 입을 맞췄다 그건 동정이자 배웅이었고 작별이었으며 고백이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악취만이 잠깐 사그러들었다 사랑의 기적조차 썩어 죽은 이를 일으키지는 못하는 너무 늦은 어느 시체의 밤
5.
녀석은 늘 그늘에 앉아 우리가 뛰는 모습을 구경했다. 따가운 햇빛을 쬐기라도 하면 피부가 새빨갛게 일어나는 체질이었다. 대신 녀석은 체육시간이 끝나고 돌아온 내 어깨에 매번 얼굴을 묻었다. 거기선 흙냄새와 바람 냄새와 더불어 나의 체취가 난다고 했다. 사내놈 땀냄새가 대체 뭐가 좋다고.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끝내 녀석을 밀어내지 못한건 녀석이 코를 묻을 때마다 보이는 목덜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햇볕에 그을려 본 적 없을, 하얗고 매끈한 목덜미. 남자놈이 대체 왜 그렇게 선이 가늘었는지.
그 미묘한 밀회...같은 것은 녀석이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전학가면서 그대로 끝났다. 원래 우리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게 이상할 정도의 부잣집 자식이다. 있을 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싶었지만 왠지 녀석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원체부터 활기찬 녀석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만 자신의 전학 사실을 먼저 알려주던 그때의 그룬왈드는 분명 다른 때보다 심하게 침울해져 있었다. 내가 건네는 작별인사에도 한참을 꼼짝않던 녀석은 해가 거의 도망쳤을 무렵 갑자기 칼을 꺼내들어 휘둘렀다. 섬찟한 감촉에 한 걸음물러서자마자 녀석은 도망가버렸고... 멍청히 서있던 나는 집에 돌아간 다음에야 내 교복의 두번째 단추가 끈채로 떨어진 것을 알았다. 말을 하면 그냥이라도 떼서 줬을텐데. 망할 자식.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심장에 남아있던 말을 건네지도 못했다.
어쩌면 너는 내 첫사랑이었는지도 모르는데.
6.
맑은 물로 하얀 거품을 씻어낸 왕자의 몸은 발갛게 익은 과실처럼 향기롭기 마련이어서, 빌헬름은 욕실을 나온 그룬왈드를 보필할 때마다 한동안 숨을 멈췄다. 열기와 섞인 향은 불사의 시간을 살아온 그에게조차 치명적인 독이었다.
7.
술냄새가 가까워져온다. 이번에도 살짝 메마른 입술이 뺨이나 이마를 스쳐지나갈까? 하지만 그룬왈드의 예상과는 달리 리리는 이빨을 세워 귀를 깨물었다. 교관님. 아픕니다. 리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귀한 살점이라도 맛보는 듯 집요하게 깨물고 핥고 짓씹어댔다.
제 귀를 먹어치우실 생각이십니까?
과거의 경험으로 리리의 술주정은 내버려두는게 상책이라는걸 알곤있지만 한 마디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이내 귓바퀴를 핥아올린 리리가 속삭였다.
설마 내가 귀만 먹을까봐?
그 말에 그룬왈드의 허리께가 굳는다. 리리는 낄낄 웃으며 그룬왈드의 콧등을 깨물고는 자연스레 그 몸을 껴안고 침대로 쓰러졌다. 성인 남자의 몸은 그룬왈드에게는 무겁다. 버둥대는 그룬왈드를 태평히 깔아뭉갠 채 뭐가 우스운지 웃음을 멈추지 않던 리리는 잠깐 그룬왈드를 응시하나 싶더니 그대로 푹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물리고 핥아진 귀가 리리의 귀와 맞닿아 묘하게 뜨겁다. 그룬왈드는 잠시 꼼지락대다 포기하고 잠들어버렸다.
8.
그날, 그룬왈드가 눈을 떴을 때 그의 감독관인 프리드리히는 정장을 입고있었다. 언제나 캐주얼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만 봐온 그룬왈드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다.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그룬왈드를 발견한 프리드리히는 한번 씩, 웃고는
-어때, 멋있지?
-다녀올게. 끝나면 낚시라도 하러가자.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옆구리에 끼고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기다리는 동안 심심할까봐 주는 선물.
책은 두껍다. 소년이 반질반질한 가죽 커버를 손톱으로 문질러보는 동안 프리드리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자기가 돌아와 있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내기를 하자. 내가 책을 읽는 것보다 늦게 돌아오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하지만, 제 소원은.
-괜찮아. 원래 아이들은 무궁무진한 소원을 가진 법이니까.
아마 내가 돌아올 때쯤엔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난감할걸? 프리드리히는 그 말을 남기고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룬왈드는 그가 예의 매끈한 차를 타고 바깥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다 천천히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본래부터 책을 읽는 것에는 익숙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리리는 아마 자신보다는 늦게 돌아오겠지.
하지만...
"그룬왈드."
"프리드리히 담당관이... 교통사고로..."
"즉사였다고 한다. ...유감이다."
페이지가 채 반절도 넘어가지 않은 시각이었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다만 씹어삼키듯이 책을 읽었다. 피를 토하듯이 읽었다. 마침내 주인공이 이세계에서의 삶을 결의하며 소설이 끝을 맺었다. 창문 바깥은 어스름하다. 그룬왈드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뒷표지를 닫은 뒤 조용히 손을 모았다.
눈을 떠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거짓말쟁이."
나보다 일찍 돌아올거라고 했으면서, 낚시를 가자고 했으면서, 늦으면 소원 하나 들어줄 거라고 했으면서, 하나도 지키지 않았잖아요, 프리드리히...
그룬왈드는 조용히 울었다.
추운 밤이었다.
9.
"마셔라."
하얀 컵에서 갈색 커피가 하얀 입김을 피워올린다. 그룬왈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른하드는 그 이상 무리하게 권유하지 않고 근처의 책상 위에 컵을 올려두었다. 창 바깥은 구름이 끼어 낮인데도 흐릿했다. 침대 위의 프리드리히는 깊이 잠들어있다. 팔 위로 길게 늘어진 링거 튜브 사이로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했다.
"그리 깊지는 않은 상처다. 며칠만 쉬면 금방 복직할 수 있을거라더군."
"……."
"네 팔은 어떻지?"
그룬왈드의 입술이 벌어지는 듯 하다가 도로 닫힌다. 말을 꺼내려 했던 건지, 그저 호흡을 하는 건지. 어쨌건 깁스를 하게 된 걸로 보면 뼈가 부러졌는지도 모른다. 프리츠가 두 눈으로 봤다면 기겁을 했겠지. 하지만 대강당의 조명에 직격할 뻔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본다면 지금 이 상황은 도리어 가벼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그룬왈드를 감싼 음흉한 소문은 더 짙이질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죽음과 사고를 부르는 아이. 불행의 덩어리.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한다. 잠깐 화면을 확인해본 베른하드는 여전히 침대 곁에 못박혀 앉아있는 그룬왈드를 돌아보았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 프리드리히를 부탁한다."
그룬왈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베른하드는 그런 그룬왈드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병실의 문을 닫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참동안 앉아있던 그룬왈드는 아까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얀 병실 바닥. 베이지색으로 칠해진 침대 난간 사이로 링거액이 톡톡 떨어지는 미미한 소리가 들렸다.
"……저는."
창문 밖은 어둡다. 그룬왈드는 제 머리 위로 조명이 떨어져내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빨리 도망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이것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다는 희미한 낙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낙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감싸다시피 하며 단상에서 떨어졌다. 그룬왈드의 팔에는 금이 갔지만 방송부의 기자재를 등으로 찍어누르다시피 한 프리드리히의 부상은 분명 그보다 심할 터였다.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그룬왈드의 책임이었다.
"전학을 가겠습니다."
"부상에 대한 보상도 전부 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만나지도 않겠습니다."
여지껏 몇 번이고 반복해온 일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같은 반의 여자아이와 음악선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축구부원과 야구부 감독과… 미술부원이었던가. 그리고 고등학교에 와선 담임선생이다. 놀라울 일이 있나? 아마 기적적으로 오늘 아무 일이 없었다 할지라도 언젠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룬왈드는 미래의 수많은 연장선상에서 펼쳐졌을지도 모르는 비극의 풍경들이 제 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동시에 현재의 비극이 어깨를 꾹 누르는 것도 알았다. 그래, 이번에도 해냈구나. 난 널 믿고 있었어.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칭찬의 말이 심장을 깊게 파고든다. 빨갛게 배어나와 흔적없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 아쉬움은 아닐테지만…….
"말도 안되는 소릴 하네."
크고 따뜻한 손이 난간에 매달린 그룬왈드의 손을 덮고, 쓰다듬는다. 자신을 붙들고 추락할 때와 같은 손길. 모든 풍경과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지다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오로지 한 사람의 목소리와 온기만이 세계를 가득하게 채워나가는 순간에조차 등허리에 붙은 한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그룬왈드는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나를 받아들이면 안된다. 모든 미래는 다시 손톱을 세우고 타박타박 따라올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만큼이나 명백하고 또 명백하게. 그리고 또 당신의 등에 매달리겠지. 상처에선 피가 흐를 것이다…. 피만 흐를까?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데 어떻게 보내라고?"
손을 잡아 빼고 일어서야 했다. 일어서고 방을 나가서 그대로 사라져버려야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미약하게 떨리는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 또한 박음질이라도 된 것 마냥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룬왈드는 이를 악물었지만 악물린 마음 사이로 진물처럼 흐르는 감정을 막고 닦아낼 방법은 없었다. 마른 눈꺼풀이 빠르게 젖어든다. 그룬왈드는 연신 숨을 들이쉬며 프리드리히를 노려보았다. 못이 필요했다. 날카롭고 차갑고, 단단한 못이.
"저는 떨고 있지 않습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
"울고 있지도 않습니다."
"나는 네가 없으면 쓸쓸해."
"저는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누군가를 불행에 밀어넣고서도 자신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잊어버릴 겁니다. 비극 따위는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애초에 자신에게는 아무 비극도 없었으니.
저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입술을 뚫고 나온 것은 전혀 엉뚱한 딸꾹질이었다. 숨을 뒤엎고, 말을 뒤엎고, 모든 흐름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딸꾹질. 프리드리히는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게 되는거야. 마음에 없다니, 마음에 없다니. 내가 당신을 마음에서 들어 파내버리려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거듭했는데 그딴 가벼운 말과 목소리로 모든 것을 날려보내버리려 들다니. 나는.
"나는."
모든 것이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몸은 떨렸다. 말은 히끅거리는 딸꾹질 때문에 매초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올랐다. 그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어진 한순간 눈에서 눈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아, 이래서 당신과 빨리 멀어졌어야 하는 건데. 바닥에 투명하게 쌓여가는 슬픔을 응시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프리드리히는 조용히 그 몸을 자신에게로 끌여당겨 안았다. 흐리기만 하던 하늘에선 기어코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친 뒤에는 햇살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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