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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빌그룬]충견은 주인을 찾아 헤매도 주인은 헤매지 않고

레지멘트는 마지막 소용돌이와 함께 전멸했다. 빌헬름은 차라리 세계의 멸망을 바라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불사의 심장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길 반나절, 빌헬름은 마침내 자신의 군복 위에 허름한 누더기를 뒤집어 쓴 채 론즈브라우 성을 빠져나왔다. 추방의 날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렇게 가버린 전하의 뒷모습을 쫓을 뿐인 무모한 추적의 시작이었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음식도 필요없었다. 하물며 수면이란 한없는 사치였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쉴 틈없이 달려와 레지멘트 마지막 숲에 도달한 빌헬름은 그때부터 정신없이 그룬왈드를 찾아 헤매였다. 숲은 어두웠다가 밝아지기를 반복했고 바람은 누군가의 발소리를 흉내냈다. 멀리서 누군가의 옷자락을 발견하고 달려가면 뭉쳐있던 잎사귀들이 키들거렸다. 그때마다 빌헬름은 손가락을 깨물고 피부를 긁어대며 모든 불길함을 제 몸에서 떼어내려 안간힘을 써댔다.  

아아, 하지만 만약 저 나무 아래 전하의 싸늘한 시신이 있다면. 조각난 팔과 다리가 떨어져 있다면. 자신의 심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맥박쳐야 하는가. 

 절망의 시간은 찬 빗줄기와 함께 끝을 맺었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사철나무 아래 몸을 웅크리고 누운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빌헬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충혈된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타인의 인기척을 느낀 그룬왈드가 파드득 제자리에서 일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빌헬름은 쭉 울고있었다. 

"...빌헬름 쿠르트."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전하." 
"영광따위 무의미한 단어는 집어치워라. 왜 여기 있지?" 
"전하께서 몸을 의탁하신 레지멘트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공연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물은 가지고있나, 소령." 

허리춤에 매달린 수통은 기적적으로 출렁였다. 실낱같은 생존 가능성에 매달렸던 것인지 아니면 군대에서 배운 최소한의 여장 규칙에 따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룬왈드는 무엇도 따지지 않고 물을 달게 받아 마셨다. 투명한 물줄기가 새어 목덜미를 타고 쭉 흘러내렸다. 수통이 반쯤 기울었을 무렵 갑자기 기침을 터뜨린 왕자의 등을 제 젖을 빨다 콜록이는 아기를 대하듯 다정하게 쓸어주던 빌헬름의 머리에 쨍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이대로,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진다면. 

그룬왈드의 생존여부는 아직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른다. 사라진 자신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여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색 도중에 죽었거나 미쳐버렸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다들 죽어나자빠진 왕국이 아닌가. 빌헬름은 아무도 몰래 마른 숨을 삼켰다가. 

"공연한 생각은 버려라, 소령." 

그렇다. 설령 빌헬름이 아무리 원해도, 제 불사의 심장을 바쳐내더라도 왕자가 흔쾌히 그와 헤매여 줄 리는 없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왕족이었고, 추방된 뒤에도 왕족이었으며, 추방되어 자리를 튼 곳이 절멸한 뒤에도 왕족이었으니. 빌헬름은 그가 떠난 뒤 첫째와 둘째 왕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부왕 또한 병들어 죽어간다는 이야기로 그의 주의를 환기시켜보려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가신들의 힘은 강대해졌습니다... 전하의 귀환은 그들에겐 눈엣가시일 뿐입니다." 
"상황보고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소령. 나는 이제부터 본국으로 귀환한다. 소령은 어쩔텐가?" 

잔혹하신 분이었다. 어쩜 그 옛날 저를 등지고 떠나실 때와 한 점 다를 바 없는 말씀이신지. 그리고 그랬기에 그룬왈드는 저의 주군이었다. 빌헬름은 기사의 예를 갖추곤 깍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전하의 종입니다. 부디 뜻대로 하소서." 

산산히 부서진 그의 꿈은 쉬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배겟머리에서, 회랑에서, 옥좌의 뒷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찔러대겠지. 하지만 그는  제 의지 이상으로 주군을 존중했다. 그가 아니라 하면 자신에게도 아닌 일이었다. 이제 그의 주군은 죽음이 가득한 왕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안에서 주군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임무이자 삶의 이유가 될 터였다. 

나의 주군, 나의 왕이시여. 
제 시체가 있을 곳은 전하의 무덤가입니다. 

그룬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빌헬름이 온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빌헬름은 그보다 한두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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