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님 오른쪽 성향.
“나의 아이야, 새로운 전령을 선택할 준비는 되었느냐.”
어느 동화에 나오는 회중시계 토끼처럼 분주히 돌아다니기 일쑤던 지시자는 회랑으로 이어지는 개선문의 문지기를 쓰러뜨린 뒤부터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는지 자신의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휴가에 위화감을 느낀 전사들 몇몇이 직접 지시자의 방을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손꼽아 기다리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혼당한 아가씨마낭 침대에 몸울 파묻은 지시자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도로 내보내기 일쑤였다. 아무도 연유를 알지 못한 채 침묵의 나날은 속절없이 지나갔고, 난데없는 휴가를 맞이한 이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데에 조금씩 익숙해졌을 무렵 에바리스트와 아벨, 그리고 그룬왈드가 한꺼번에 지시자의 방으로 호출되었다.
그들과 지시자가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방에 틀어박힌 지시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그들을 불러 모은 시점에서 다른 전사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이윽고 지시자의 방에서 세 명이 나란히 나오자 에바리스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자크가 재빨리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
“지시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시자의 어머니?
“즉 화염의 성녀다.”
식당에 앉아있던 제드는 아벨이 언제 돌아왔는지는 상관없다는 듯 음식을 먹어치우다가도 그와 레온이 이야기를 나누는 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길 반복했다. 지시자의 방에 들어간 세 명 중 개방된 공간으로 들어온 것은 아벨뿐이라, 그 주변에는 은근슬쩍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전사들이 가득했다. 레온은 그들을 대신해서 아벨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었다.
“개선문을 쓰러뜨렸을 때부터 그 건너편에 ‘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더군. 거길 통과하면 전사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아벨이 아무렇지 않게 꺼낸 단어 하나에 쫑긋하게 서있던 전사들의 신경이 술렁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곳 성유계에서 눈을 뜨자마자 그들의 죽음을 고했던 작은 인형을 기억했다. 더불어 그들의 부활을 약속하는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들이 인형을 따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사라진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지상으로 부활하는 것. 전사 각각이 품은 생각은 다를 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헌데 느닷없이 그 목표가 코앞으로 다가왔노라 단언당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사를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해. 지금은 우리 셋을 부활시키는 게 전부일거라고 하더군.”
이른바 기억을 모두 되찾은 전사부터 부활의 기회가 온다는 얘기다. 지시자는 이제껏 에바리스트와 아벨, 그룬왈드에게 각자의 죽음에 얽힌 기억을 되살려주었으니 이제 지시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언제든지 지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아이자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짓눌린 자국으로 에바리스트의 말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내가 지상으로 돌아갈 날은 아직 이른 것 같다.”
어째서?
“너도 알 텐데. 그 지시자가 제일 먼저 기억을 되찾아 준 전사는 내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야.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지시자에게는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최우선적으로 위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이 누구인지 일부러 알아차릴 필요는 없었다. 아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전사들 또한 지시자가 첫 번째 부활자로 누굴 선택했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렇잖아도 지시자의 편향된 애정은 전사들 사이에서 파다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어렵지. 아무리 봐도 그 녀석보다 우릴 먼저 지상으로 보내주진 않을 분위기였다고.”
그럼….
“그래. 머잖아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는 부활한다. 가장 먼저 그녀와 손을 잡은 전사가 가장 먼저 지시자의 손에서 떠나는 셈이지.”
그룬왈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도 살육을 하거나 상대에게 살육당할 때 정도가 아니면 얼굴 근육하나 꼼짝하지 않는 성품이긴 하지만 죽음을 넘어 지상으로 부활한다는 거대한 사건을 두고 마치 자신이 퀘스트에 나간다는 것 마냥 툭 내뱉고 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페어가 가진 특유의 링크 덕분에 서로의 기억과 죽음을 얼핏 공유할 수 있었던 브레이즈조차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긴 했지만…. 펼쳐놓은 책을 읽는 틈틈이 침대 가에 앉아있는 그룬왈드를 쳐다보기를 반복하던 브레이즈는 자신이 주인공의 아주 간단한 대사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행간을 표류하고 있음을 가까스로 인정하고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너는 부활하면 어쩔 셈이지?
“…글쎄.”
의욕이 없어 보이는군.
“나는 현세보다 이 세계가 마음에 들어.”
부활하지 않을 셈인가?
그룬왈드는 대답 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싸늘했다. 차게 식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브레이즈는 창문을 닫고 방의 등불을 줄인 뒤 제 침대에 앉았다. 설핏 잠이 들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브레이즈가 눈을 떠보니 그룬왈드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아마 사냥이라도 간 것이겠지. 지시자가 갑작스레 모든 것을 놓고 방에서만 칩거하기 전부터 틈이 나면 밖으로 나가 성유계의 생물을 상대로 칼부림을 벌이는 게 취미였던 남자다. 아침 일찍부터 방에서 사라진 것도 그 취미의 특성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지나 저녁이 다 되도록 그룬왈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성유계의 전사가 지시자 없이 활동할 수 있는 반경에는 한계가 있고 그 반경 내에 존재하는 몬스터의 숫자도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예상 외의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브레이즈는 서둘러 갑주를 챙겨 입은 뒤 제 검을 허리께에 매고 그룬왈드를 찾아 성녀의 관을 나섰다.
어둑한 숲은 고요했고, 간간히 부는 바람소리만이 스산했다. 연신 그룬왈드의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던 브레이즈는 어느새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음을 알고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시자가 없으면 늘 이런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엇갈린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룬왈드가 정말로 여기서 사냥을 하는 중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브레이즈와 만나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도 마주칠 수 없는 건 어째서인가? 불안해지려는 마음을 꽉 억누른 채, 브레이즈는 자신이 엉뚱한 곳에서 그룬왈드를 찾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일단 성녀의 관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하루 그룬왈드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도 다들 그러고 보면 보지 못했다는 투로 고개를 저을 뿐. 있을 법한, 혹은 없을 법한 장소까지 모조리 뒤져도 그룬왈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찾아보지 않은 장소는 딱 한 군데였다. 브레이즈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다른 전사들의 문과는 달리 섬세한 장미 장식이 새겨져있는 문을 두드렸다. 무반응. 기약 없는 침묵에 초조해져 다시 한 번 노크를 시도하려던 브레이즈는 제 눈앞에서 스르륵 열리는 문을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갓 불을 불인 듯 길쭉한 초 끝에서 불빛이 일렁거리는 방 안에는 지시자가 예의 그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 앉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 어딘가에 걸려있을 시계가 째깍거린다. 브레이즈는 그 소리가 자신의 등을 쿡쿡 찌르기라도 하는 것 마냥 어수선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지시자…. 그룬왈드가 사라졌다.”
인형은 녹색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명백히 당황한 눈짓이었다. 당연하다. 브레이즈 또한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섬기곤 새삼스런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으니까. 성유계에서, 어제까지 멀쩡하게 존재했던 전사가 지시자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다.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지시자는 설명을 해달라는 듯 침대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작은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은 브레이즈는 자신이 겪은 일을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했다. 어제 지시자가 ‘부활’에 대해 얘기한 것을 전해들은 뒤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룬왈드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바깥과 성녀의 관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브레이즈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지시자는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지시자.”
그래. 하지만 여긴 성유계야. 죽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아무리 심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회복되는 곳이라고. 살인이니 실종이니 하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어. 그런데도 사라졌다는 건 그룬왈드 자신의 의지로 잠적했거나 타인의 의지가 개입됐다는 뜻이지. 혹은 둘 다거나…. 브레이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
브레이즈는 ‘부활‘이라는 화두를 다음 퀘스트 지역의 이름인양 툭 내뱉던 그룬왈드를 기억했다. 거부감은 담겨있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호의도 찾아보기 힘들던 그 태도. 거기다 예전부터 현세보다 이 곳이 마음에 든다고 몇 번이고 되뇌이던 그룬왈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해버릴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정도로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었다면 레지 전멸 이후 일부러 정적이 가득한 론즈브라우 성으로 돌아갈 것도 없이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룬왈드는 성으로 돌아갔다. 그걸 생각한다면 답은 하나였다.
“다른 사람이 개입했군.”
확신해?
“그룬왈드는 그렇게 요령이 좋지 않다. 차라리 지시자의 면전에 대고 부활이 싫다고 말하면 말했지 이런 식으로 숨어드는 건 녀석이 취할만한 행동이 아냐.”
나도 브레이즈의 생각에 동감이야. 그럼 제일 중요한 게 남았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 * *
[에바리스트의 경우]
아이자크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부르기 전까진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일러뒀으니.
그룬왈드가 전날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나도 지시자의 방에서 마주친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어. 행방을 나에게 물어봐도 곤란할 뿐이다. 아니면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짧은 생각이군. 이 세계에 온 이상, 우리는 지시자의 명령과 선택에 충실하게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지상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니까. 설령 지시자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이런 식의 ‘반항‘은 손해면 손해지 결코 득은 되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시자의 결정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의 지시자는 눈 앞에 목표가 주어지면 일단 그걸 달성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격이니 달랑 한 명만 부활시키고 끝낼 리가 없어. 단지 부활하는 순서가 다를 뿐이라고 여기면 그만인 일이지. 그런데 뭐 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벌여야 하지?
…입을 조심하는 편이 좋겠군, 브레이즈. 확실히 아이작은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충실한 녀석이지만 주어진 상황도 이해하지 못하고 날뛰는 잡종은 아니다. 페어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건 좋지만 무턱대고 의심가는 곳을 찌르기보다 조금 더 상황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 좋을 거야.
내가 해줄만한 충고는 이걸로 끝이다. 아이자크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에 떠나는 게 좋을 거야.
[아벨의 경우]
별일이군. 너와 이런 식으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얼굴이 썩 편해보이진 않는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그룬왈드를 찾고 싶은 건가? 겉으로 보기에 너희들은 그렇게까지 사이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흐음, 그렇군. 하기사 페어가 페어를 신경 쓰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지. 하지만 내가 해줄 말은 없어. 서로 얼굴을 마주친 적도 없거니와 그룬왈드가 사냥을 하러 나가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 전부터 그녀석이 나가는 모습은 종종 봤어. 별로 놀랍지도 않은 일이잖아? 레지멘트에 있을 때부터 그 녀석의 사냥습관은 유명했으니까. 그걸로 교관에게 호되게 혼난 적이 있었는데도 관두지 않았지. 그런 주제에 나나 레온이 같이 하자고 권유하면 칼같이 거절하고. 그 성격은 여기서도 똑같더구만. 검술 실력은 조금 늘은 것 같긴 하던데.
부활?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현세에 딱히 미련은 없다. 오히려 호적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성유계로 꽤 괜찮은 편이지. 하지만 레온이나 제드를 다시 만나게 해준 은혜도 있는데다 이만한 기억을 되찾은 것도 지시자 덕분인데 그 뜻을 거스를 수야 없지 않겠어?
…그러고보면 우리보다 그룬왈드의 부활에 더 민감할 녀석이 있지 않나? 너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저번에 지시자가 거의 이를 바득바득 갈다시피 하면서 데려온 전사.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빌헬름의 경우]
……….
………….
……대답이 없다. 비어있는 모양이다.
브레이즈는 노크를 하던 손을 멈추고 침묵하는 문을 응시했다.
빌헬름 쿠르트라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적다. 기껏해야 그가 그룬왈드의 부관이었고, 그가 죽은 전장에서 함께 싸웠으며 그룬왈드를 상당히 염려했었다는 사실 정도. 하지만 부모가 제 아이를 사랑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브레이즈는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빌헬름을 배척할 수 있었다.
배척했다고 하여 그의 면전에 칼을 들이대거나 욕설을 내뱉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제 마음에서 그를 몰아냈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룬왈드의 페어는 자신이다. 한때 부관이었다 한들 이리도 늦게 나타난 남자가 무엇을 하겠 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적지 않은 위기감이 심장을 갉아먹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일부러 모든 감정의 수문을 닫고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협정심문관으로 일하면서 배운 감정의 통제를 이런 데에 써먹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빌헬름은 언제나 그들과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있게 되었다. 적어도 브레이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잠겨있었다면 걷어차서 부숴버렸을 것이다. 브레이즈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은 채 아무도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기본적으로 2명이 묵어야하지만 인원이 맞지 않은 탓에 빌헬름 혼자서 쓰고 있을 방은 꽤나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리하지 않아 흐트러진 침대 시트가 아니었다면 빈 방을 착각해서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을 정도였다. 그럼, 이다지도 다급하게 방을 나간 그 남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하?”
대답은 뜻밖에도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애초에 주인 없는 방에서 시간을 너무 보낸 것이 실수였다. 여차하면 서로 검을 맞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의 불을 당기며 뒤로 돌아선 브레이즈는 자신의 방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 들어왔다는 돌발 상황에도 불구하고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빌헬름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여기가 아니군.”
빌헬름은 애매한 시선으로 방 안의 풍경을 훑어보고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도로 닫아버렸다.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브레이즈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태도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황급히 문을 열어젖히고 양옆의 복도를 둘러보는 브레이즈였지만, 그 짧은 사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빌헬름은 보이지 않았다. 왼편 복도에서 걸어오던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검사가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으로 서있는 브레이즈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당신. 분명 이번에 사라졌다는 그 흑태자의 페어지?”
“…그렇다만.”
“내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그 남자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방금 전에도 예고도 없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선 빤히 쳐다보다가 나가버렸다고. 만약에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었더라면 어쩔 뻔했어?”
흡사 브레이즈가 빌헬름을 관리해야 한다는 투였지만, 브레이즈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고 적당히 대꾸해준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조금 전 빌헬름이 툭 내뱉었던 “여기가 아니”라는 말은 조금만 형태를 바꿔보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 된다. 무엇이? 말할 것도 없다. 빌헬름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전하.’
…그 짧은 접촉만으로는 빌헬름이 그룬왈드가 있는 장소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주군의 실종에 충격을 받아 이상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때문에 빌헬름을 찾아 대화를 나눠보려고 생각한 브레이즈였지만 어쩐 일인지 복도를 뒤지고 아무리 수소문을 해봐도 여검사와 같은 피해 사례만 들려올 뿐 정작 장본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룬왈드에 이은 두 번째 실종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결국 빌헬름을 찾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온 브레이즈는 자신의 침대 대신 여전히 텅 비어있는 그룬왈드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날, 그룬왈드는 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잠들어있는 사이 먼저 눈을 뜨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쩌면 처음에는 정말로 사냥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와중 예정 외의 일이 생겼고, 그대로 그룬왈드는 모습을 감췄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의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그룬왈드를 찾아다니던 빌헬름 또한 브레이즈의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빌헬름이 벌인 짓이라면 대응이 너무 허술하다. 이상행동을 꾸미는 거라면 끝까지 그 행동을 고수해야지, 중도에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것은 타이밍이 어정쩡하다. 게다가 그냥 감춘 것도 아니라 ‘실종’이다. 이토록 완벽하게 숨을 방도가 있다면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범인이 있다고 친다면, 이건 이것대로 이야기가 뒤엉킨다. 그들을 이런 식으로 실종시켜서 대체 누가 어떤 이득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머리는 복잡했다. 생전 오염자들이 사라진 흔적을 쫓아 추적할 때에도 이렇게까지 생각이 뒤엉켰던 적은 없다. 연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의 경위를 쫓아가보려 해도 추리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끊어지거나 뒤틀리며 제대로 된 흐름을 이루지 못했다. 지시자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밤이 제법 깊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좋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다. 브레이즈는 앉아있던 몸을 그대로 끌어올려 지시자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장미가 새겨진 문은 브레이즈가 몇 차례 노크를 한 뒤에도 계속 닫혀있을 뿐 열릴 줄을 몰랐다. 지시자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문이 이렇게 계속 닫혀있다는 건 보통 그녀가 잠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대로 돌아가서 다음 날 만나러 왔어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브레이즈는 기어코 문손잡이를 잡고 돌랴버렸다. 동그란 손잡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돌아가며 안쪽으로의 출입을 허했다. 낯선 감각은 아니었다. 노크해도 침묵하는 문, 잠겨있지 않은 문, 자연스레 돌아가는 손잡이….
이젠 또 지시자가 사라져 있을 모양이군.
허나 그것은 성급한 결론이었다. 브레이즈가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차례대로 켜지기 시작한 촛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분명 지시자의 몸이었으니까. 한 가지 난감한 것은 그녀의 상태가 어제와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
부서진 목. 박살난 머리. 뜯겨나간 팔다리와 온몸에 난자한 칼자국.
그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동그란 눈알 한 쌍이 말을 잃은 브레이즈의 발치에서 데룩거렸다.
* * *
지시자의 몸이 수리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수리를 담당한 어콜라이트에 의하면 부서진 파츠를 새로운 것으로 갈아 끼운다기 보다 아예 새로 준비한 몸에 멀쩡한 파츠를 대체해넣은 것에 가까운 대작업이었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제 형체를 찾긴 했어도 지시자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익숙해지는 데에는 적어도 일주일은 되는 시간이 지나야 할 터였다. 만약 그 사이에 지시자가 또 습격당한다면….
“이번엔 성녀의 관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르겠네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는 달리 새파란 날을 품은 말이었다. 그들의 영혼을 이끄는 지시자를 잃은 순간 그녀에게 속해있던 모든 전사들은 육체도 정신도 모두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진다. 고작 전사들조차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지시자에 대한 형벌이자 동시에 감히 반역의 깃발을 들어 올린 망자들에게 내리쳐지는 심판의 쇠망치.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이미 모든 것을 보셨으니까.”
그 말대로 였다. 사건의 피해자는 사건의 최대 증언자가 된다. 죽지 않고 되살아난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한 번 박살났긴 하나 여전히 성녀의 이름 아래 관을 지배할 힘을 가진 인형은 붉은 갑주에 안긴 채 자신을 ‘죽이려’ 한 범인의 이름을 말했다. 브레이즈의 심중에서 없어질 듯 없어지지 않으며 불쾌하게 굴러다니던 덩어리와 꼭 같은 형태였다.
“그럼 그를 찾아야겠군. 하지만 어디에 있지?”
내 예상이 맞다면, 여전히 전사들의 방에 있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진 나도 알아. 설명하자면 기니까 일단은 숙소로 가줘.
“…알겠다.”
어디로 간다는 전언조차 없이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지시자의 귀환에 전사 몇 명이 달려와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브레이즈는 미리 귀뜸 받았던 데로 그녀가 급하게 맵을 수색하다 성과없이 돌아왔다고 둘러대며 그들의 사이사이를 빠져나갔다. 이윽고 숙소에 도착한 브레이즈의 품 안에서 지시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브레이즈, 여기에 방이 정확히 몇 개나 되는지 알아?
“모른다. 각 전사들에게 하나씩 돌아갈 정도는 되는 것 같다만….”
정확히는 전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방도 늘어나는 구조야. 브레이즈는 몰랐겠지만, 처음에 그룬왈드와 함께 여기로 왔을 땐 문은 하나 뿐이었어. 그러다 세 개가 되고, 다섯 개가 되고…. 지금은 이만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응.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던 건 나뿐이었으니까. 브라우는 미리 준비되어있던 방이 나의 의지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설명해줬어.
“그럼 범인이 숨어있는 방도 지시자의 의지로 생겨났다는 말인가?”
비슷할지도 몰라.
“비슷하다니….”
일단은 숨겨진 방을 찾아야 해. 브레이즈, 방문 앞에 걸린 명패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이동해줘.
“…알겠다.”
성녀의 관 맨 윗 층의 숙소는 각각의 방이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이어지는 있는 구조다. 그러니까 명패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이동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처음의 방에 도착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빌헬름의 방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의 명패가 그것을 증명해주었지만, 지시자는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더 방을 돌 것을 명령했다. 이번에도 방은 순서대로 이어졌다. 지시자는 한 번 더 명령했다. 그런 식으로 네 바퀴를 더 돌았을 무렵에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절로 머리가 멍해졌다. 그렇다고 도중에 내팽개칠 수도 없는 일이라, 브레이즈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계속해서 명패를 짚어나갔다. 텟샤와 C.C. 콥과 타이렐, 루디아. 빌헬름의 독방.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명패.
브레이즈.
부러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브레이즈는 품에 안고있던 지시자를 천천히 내려놓은 뒤 문고리를 돌렸다. 잘 돌아가나 싶던 손잡이는 중간에서 턱하니 걸려버렸다. 이 안에 있다. 디음 순간 브레이즈는 허리춤에 매여있던 검을 뽑아 들고 잠긴 문을 후려쳤다. 처음 몇 번은 어떻게든 저항하던 문은 이내 그의 감정을 못 이겨내겠다는 듯 너덜너덜하게 떨어져나갔다. 조용한 방 안에는 맞은편 창문에서 들어오는 희부연 빛이 가득했다. 비리고 뜨뜻한 피 냄새도 그러했다.
“…….”
빌헬름은 고목처럼 서있었다. 피에 물든 양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무기라는 것이 필요하기는 했던가?
빌헬름의 오른손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 손끝이 살점에 파묻힌 심장을 긁어내기 전에 문을 부쉈던 검을 고쳐 쥐며 단숨에 빌헬름에게로 달려드는 브레이즈였지만 오른 팔뚝을 노리고 휘두른 칼날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빌헬름의 왼 손목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검날을 맨손으로 막은 탓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상쳐에서 피가 튀었지만 빌헬름은 아프지도 어떻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을 마저 끄집어냈다. 장갑 낀 손가락에 걸려나온 심장이 붉다 못해 새하얀 빛을 꾸역꾸역 토해내며 허공에서 벌떡거렸다. 귀찮은 상황이지만…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브레이즈는 부서지도록 이를 악물곤 빛을 머금기 시작한 검날로 빌헬름의 복부를 깊게 찔렀다. 봉인의 힘이 담긴 일격에 빛을 뿜던 심장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한 박자 늦게 자신의 뱃속을 태우는 고통의 불길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검을 뽑아 빌헬름의 오른팔 째로 검을 벽에 박아넣은 다음에야 뒤로 물러선 브레이즈는 질척하게 굳어가는 제 옆구리를 붙잡은 채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빌헬름은 왼팔, 복부, 심장, 오른팔에서 죄 피를 쏟아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은 것은 순전히 침대에 눕혀진 누군가의 실루엣 때문이었다.
“…그룬왈드.”
등 뒤로 손을 묶인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렸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 양쪽 발목은 아킬레스 건을 꿰뚫은 빌헬름의 검과 함께 칭칭 동여매어져, 걷고 싶어도 발을 땅에 디디고 서지도 못하리라. 차마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모를 정도로 참혹한 모습에 울컥한 브레이즈가 이번에야말로 빌헬름의 얼굴을 걷어차려 한 순간.
기다려. 브레이즈.
“…지시자.”
빌헬름과 전투를 벌이느라 깜빡 존재를 잊어버린 인형은 불안해보이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비칠비칠 걸어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그녀의 옷깃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데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있는 힘껏 빌헬름을 향해 기어간 인형이 말했다.
빌헬름은, 그룬왈드가 부활하는 게 싫은 거지?
“…….”
나도 싫었어. 그치만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 그룬왈드가 부활하면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이때까지 그룬왈드를 멸시하고 그의 죽음 앞에서 웃은 자들에게 전부 복수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더러운 것이 가득한 현세로 전하를 돌려보내란 소린가?”
피가 듬뿍 배인 목소리가 낮게 그르렁거린다. 브레이즈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그의 검은 이미 빌헬름의 팔을 꿰뚫은 지 오래였다.
“시체들은 전하의 몸을 뜯어먹고, 살아있는 인간들이 전하의 명예를 뜯어먹은 현세로? 나는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 곳으로 전하를 다시 돌려보내느니 차라리…!!”
“차라리 네가 도륙을 내어서라도 이 세계에 묶어두겠다? 말은 잘하는군.”
빌헬름의 날선 시선이 브레이즈의 얼굴을 헤집었다. 차라리 검으로 눈을 헤집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닥쳐. 인퀴지터. 네놈이 전하에 대해 뭘 알고 있다는 거냐!”
“그러는 너는 어떻지? 전장에서 그와 함께 싸웠다고 해서 네가 그의 의지를 모두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그저 그룬왈드와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조잡한 이유를 덧붙이고 있을 뿐이야.”
“조잡한 건 네놈이다! 전하는 현세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아!”
“웃기지 마라. 그룬왈드가 네 마음과는 반대로 행동할 지 모르는 게 불안해서 사지를 묶고 본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장소로 도망친 주제에.”
“!!”
정곡이었겠지. 하지만 빌헬름은 여전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전하를… 이제야 겨우 만난 그 분을 또 떠나보낼 순 없어…!”
“그런가.”
그럼 철저하게 죽여 버리고 여길 떠나면 그만이다. 브레이즈는 오른손을 꿰뚫고 있는 검을 통째로 들어 올리다시피 하는 빌헬름의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검에 손을 얹었고….
…빌헬름은, 그걸로 좋은 거구나.
돌아보니 지시자의 옷은 이미 피에 젖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브레이즈는 당장 검을 뽑으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시자를 응시했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인형이건만 그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저 그룬왈드가 여기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그걸로 좋은 거지?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그래. 전하는 여기에 있으셔야 한다. 그 편이 훨씬…!!”
그럼 아무 의미가 없잖아!!
소리 없는 절규가 벼락처럼 모두의 의식을 후려쳤다. 브레이즈는 제 몸이 균형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을 쥐고 버텨야 했다. 빌헬름의 얼굴이 일그러질 사이도 없이 지시자의 언어가 쏜살같이 퍼부어졌다.
여기는 그저 죽은 세계에 불과해! 여기에 언제까지나 남아있어 봤자 현세에서 그룬왈드는 그냥 전쟁에 미쳐 죽은 왕자일 뿐이야! 하지만 그룬왈드는 그런 식으로 혐오 받거나 배척받을 정도로 하찮은 존재가 아니잖아! 그래도 부활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걸 모른단 말야! 빌헬름은 사람들이 그룬왈드를 두고 그렇게 기분 나쁜 왕자가 있었다고 수군대는 편이 더 좋은 거야?!
“……………나는, 그런 현세에는 더 이상…!!”
그룬왈드는 현세에 군림할 수 있어. 어머니가 그 힘을 약속하셨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룬왈드를 부활시킬 거야. 부활시켜서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비웃었던 모든 것들이 그를 경배하게 하겠어. 모든 역사가 론즈브라우의 미친 왕자 대신 군림자의 이름을 쓰고 경배 이외의 감정은 죄다 불태워 없애버릴 거야! 내가 그룬왈드를 그렇게 만들겠어!!
정신이 들고 보니 브레이즈의 눈가에는 습기가 고여 있었다. 인형에게서 흘러든 사념이 그의 감정을 자극한 탓인지도 몰랐다. 빌헬름은 아예 뺨이 젖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브레이즈. 빌헬름을 풀어줘.
붉게 물든 검이 주르륵 소리를 내며 뽑혀 나온다. 검을 몇 번 휘둘러 검날에 맺힌 핏방울을 떨쳐낼 동안 빌헬름은 눈물도 닦지 않고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브레이즈는 그런 눈을 잘 알았다. 그건 자신이 믿어오던 신념이 눈앞에서 꺽인 이들이 으레 짓기 마련인 절망의 눈빛이었다.
빌헬름, 그룬왈드를 풀어줘.
절망이 조금 더 짙어졌다. 피가 새까맣게 굳어질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빌헬름은 그녀가 다시 한 번 재촉한 뒤에야 시체마냥 비척비척 일어섰다. 굳은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쓸데없이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팔을 묶고 있던 끈이 풀린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힘껏 베어 물고 있던 칼날도 불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그동안 침대에 마냥 쓰러져있던 그룬왈드는 정말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발밑에 죄인의 자세로 꿇어앉은 빌헬름을 내려다보았다.
“끝인가, 소령.”
빌헬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모든 대답이었다.
* * *
그룬왈드의 실종은 그가 몬스터를 감금시켜놓은 지하 미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로 싱겁게 무마되었다. 몸의 상처도 그때 생긴 것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며칠을 침실에서 보내며 새로운 몸에 익숙해진 지시자는 어머니에게 맞서기 위한 덱을 짜맞춰보느라 분주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아무리 준비해도 계속 모자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준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시자는 마침내 그룬왈드를 필두로 한 덱을 꾸려 어머니에게 도전했고, 몇 번인가의 실패를 거친 끝에 마침내 성녀의 영혼을 이겨내고 그룬왈드를 부활시킬 자격을 얻었다. Dark Lord다크 로드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은 그룬왈드는 과연 현세에 군림할 헤럴드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룬왈드가 부활할 날이 왔다.
부활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방 안에는 그리 많은 손님은 없었다. 그룬왈드가 워낙 사교성이 없는데다 대부분은 그들의 방, 복도, 혹은 식당에서 이미 작별인사를 나눈 뒤였으니까. 때문에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그룬왈드와 브레이즈, 그리고 짤막하게나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 비해 부동자세로 선 채 조금도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빌헬름이 전부였다. 참으로 고집스럽게도 침묵하던 빌헬름은 모든 준비를 마친 지시자가 그룬왈드를 방 중앙에 설치된 제단으로 이끌 무렵에야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전하. 부디 무사히 군림해주십시오.”
목소리는 약간 쉬어있었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통곡하다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 저 충직한 부관은 그 날 이후로 통곡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리라. 브레이즈는 문득 저 제단 위에서 그룬왈드를 끌어내고 대신 빌헬름을 바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룬왈드의 품에는 자신이 남긴 흔적이 즐비했으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룬왈드.”
그룬왈드는 어느 쪽의 말에도 대꾸해주지 않았다. 지시자가 부활의 의식을 치르기 직전 그들이 있는 쪽을 잠깐 돌아보고 상대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웃음 한 조각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룬왈드가 사라졌다.
1월 2일 새벽 4시입니다.
적당한 문구가 있으면 끼워 넣고 싶었는데 없네요.
그룬왈드가 부활했을 때,
빌헬름과는 만나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헤어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20P 남짓한 이야기가 완성되었습니다만
다시 읽어보니 많이 미숙하네요.
사실 너무 급박하게 시작한 원고인지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만약 [쓰레기야! 속았어! 환불 받을 거야!!]라는 분이 있으시다면
부스에 가셔서 항의 하시지 말고 블로그로 연락주세요.
거긴 위탁 부스라 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히 간직해주시려는 분들에게는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봄 더 좋은 글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hanks to : 표지협조 빵고기님 / 부스 위탁해주신 쌀토끼님
한없는 멘탈붕과를 추슬러주신 트친분들.
이 책을 구매해주신 여러분.
파본 및 낙장은 행사장에서 교환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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