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로 이어지는 통로는 적막했다. 문 하나 너머의 수술실에서는 머리가 갈라진 메리아가 연신 피를 흘리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대로였다. 이대로 메리아가 죽든 말든 세계는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런 진리가 어깨를 누른다. 브레이즈는 차라리 어깨를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술실은 좀처럼 초록빛을 보여주지 않다가, 않다가, 세상 모든 종말이 그렇게 찾아오듯 툭 바뀌었다. 의사는 무너진 탄광에서 간신히 균열을 더듬어 빠져나온 매몰자같은 몰골로 그를 불렀다. 메리아양 보호자 분이시죠.
“일단 1차 적출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뇌종양이라는 게 워낙 골치 아파서…… 지금은 모르지만 척추로 전이됐을 가능성도 있어요. 전이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후유증이 있을 거구요. 각오는 어느 정도 해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메리아를, 만날 수 있을까요.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수술직후라 무리입니다. 차후 중환자실로 이송 될 테니 그쪽으로 면회해주세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그 점 염두해주시구요. 의식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의사의 말은 어쩐지 비가 내릴 때 까지 접시를 닦으세요, 같은 의미 없는 관행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매달릴 길이 없는 것도 현실이었다. 브레이즈는 의사에게 고개를 한 번 숙여보이고는 네모난 창문 너머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피에 더럽혀진 짙은 녹색을 뒤집어 쓴 채 부산스레 움직이는 의료인들과 가느다란 튜브와 차가운 기계와 노란 불빛으로 가득 차 있는 방. 메리아는 그 안에 있다. 손을 한번 잡아주고 수고했다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제 막 수술이 끝난 상황에서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다. 브레이즈는 메마른 얼굴을 손으로 부비며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삭였다.
꼬박 반나절을 기다려 마주한 메리아는 작은 머리를 붕대와 거즈로 감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가느다란 튜브는 뱀이나 벌레를 연상시켰다. 자그맣고 따뜻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식물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지만 그걸 모조리 쏟아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의 자그마한 손을 쥐고 끝없이 이름을 불렀다. 동생은 삼십분 남짓한 면회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계적인 생존음을 고집했다.
면회를 끝내고 소독제 냄새가 감도는 문을 나선다. 웅성이며 빠져나온 면회인들 몇몇은 울음을 터뜨렸고 몇몇은 역정을 냈으며 또 다른 몇몇은 코를 훌쩍이며 향후의 일을 의논했다. 브레이즈는 그 모든 것들을 혼자 소화해내야 했다. 절로 머리가 아파왔다. 돈과 감정,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며 만들어진 뾰족한 톱니바퀴가 뇌를 마구 들쑤셔대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메리아가 아닌 자신이 멀쩡한 편이라는데 감사해야할까? 하지만 거기에 감사하기엔 찢긴 상처가 깊었다. 브레이즈는 울음도 무엇도 아닌 뭉쳐진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살아야한다. 어떻게든 살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버리고 말테니. 이를 악무는 브레이즈 곁을 작은 소년이 스쳐지나갔다. 문득 심한 데쟈뷰가 들었다. 브레이즈는 얼굴을 들어 지나간 소년과 소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소년의 발걸음은 전신 근육통을 앓는 사람처럼 불안정했다. 언젠가 메리아도 저런 식으로 브레이즈의 손을 잡고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브레이즈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창밖은 벌써 어둠이었다.
메리아는 꼬박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하지만 맑은 눈망울과는 정반대로 작은 입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이를테면 어느 여름날의 저녁식사와 자살과 옆 자리의 환자와 수술과 겨울 별사탕과 벌레가 뒤섞여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식이었다. 의사는 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흔히 보이는 섬망 증세 중 하나라며 흘려들을 것을 조언했다. 하기사 진지하게 들으려 해도 좀체 가늠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긴 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매번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로 반복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있지 오빠, 그 남자는 자살해버렸어… 왜 그랬을까. 이렇게 기어가는 벌레니까 팔다리는 없었어. 그래서 내가 사탕을 주웠는데…. 그치만 그때 오빠가 있었다면 벌레였을 거야.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살아서 벌레가 되는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이해는커녕 대상이 누군지도 불분명했지만 브레이즈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남자를 신경 쓰기에는 동생의 가느다란 다리가 안쓰러웠고 습기 없이 건조한 얼굴을 닦아주기 위한 물수건이 더 중요했다. 다행히 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서 얼마간 추가 검사를 받은 뒤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다면 얼마간의 요양기간을 거친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다. 다만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돈이었다. 메리아가 갑작스레 쓰러지는 바람에 수술비와 병원비로 양친의 사망 보험금을 대부분 소진하고 말았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은 여차하면 바닥을 드러낼 기세였다. 당장이라도 일자리를 더 찾아봐야 한다. 초조함에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지는 데에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메리아의 섬망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뒤죽박죽이던 화제는 고운 채로 친 것처럼 몇 덩어리로 걸러졌지만 여전히 알아들 수 없었다.
“오빠. 그 남자는 자살했어. 자살해버렸어. 자살하는 것 이외에는 손에 닿는 게 없었는걸. 벌레가 되기엔 길이 너무 멀었어. 그치만 만약 벌레였다면 내가 만날 수 있었을 거야. 팔을 들고 안됐구나, 할 수 있었을 텐데. 모르겠어? 오빠는 모르는 건가? 몰라? 그런 거야?”
그만해, 를 그렇구나. 라고 발음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중환자실의 간호사들은 이 기묘하고 어린 수다쟁이를 두고 자신들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내곤 했다. 환자에겐 금기란 걸 알면서도 병동 뒤뜰에서 태우는 담배의 개수도 늘어갔다. 시간은 담배를 태우는 불꽃만큼이나 사정없이 타들어가고 재는 바닥에 쌓이는 듯 하다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이따금 그날 본 소년과 스쳐 지날 때도 있었다. 함께 있는 사람은 전에 본 남자와는 다른 여자였다. 다른 친척일까, 싶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전의 남자도 지금의 여자도 간병인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몇 달은커녕 몇 주마다 간병인을 바꿔가며 병원에 머무른 지 2년이 다 되가는 소년은 일반 병동보다 좀 더 높은 층에 있는 일인실을 통째로 대여해 쓰고 있다고들 했다. 분명 어딘가 잘나가는 집안의 아드님이다. 성격이 괴팍해서 간병인을 찍어내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을 테지. 언젠가의 간병인은 복도 구석에서 아무리 돈을 주셨어도 저는 그런 일까진 못하겠습니다, 라며 울음을 터뜨렸다던가. 브레이즈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웃었다. 꿀럭이는 절망 위에서 둥실둥실 웃음이 떠다니는 감각은 제법 역겹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역겨움을 누른다면, 참는다면 어떨까. 떠도는 소문에 비해 얌전해 보이는 간병인은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적어도 브레이즈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따금 소년의 병동에 들린다는 늙은 남자.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브레이즈는 메리아의 마른 입술에 물병을 물려주며 조용히 마음을 굳혔다. 메리아는 쪼로록 물을 빨아 마시고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웃었다.
늙은 남자가 온 것은 그로부터 이 주 남짓한 날이 지난 뒤였다. 과연 새로 온 간병인이 모습을 감춘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 그녀가 그만둔 이유는 뭘까.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늙은 남자는 한번 오면 하루 남짓한 시간을 머무른 뒤 떠난다. 그리고 그가 떠난 빈 자리를 채우듯 새로운 간병인이 들어온다고 했다. 새로운 간병인이 떠나면 남자는 또 다시 찾아오겠지. 하지만 브레이즈는 ‘다음’을 느긋하게 가늠하며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저를 간병인으로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늙은 남자는 호오, 하고 눈썹을 올렸다. 갑작스런 난입에 저런 식의 감정표현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깜부기 불같은 적의가 감정의 잿더미 사이에서 쿨럭였지만 투정을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브레이즈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붙이지 않았다. 취향도 아니거니와 그런 식으로 메리아를 불쌍하게 묘사하는 것도 사양이었다. 다만 돈이 필요하다는 목적만은 확실히 밝혀두었다. 간병인으로서는 실격인지도 모르지만 예비 계약관계에서는 이렇게나 명백한 의사표현도 없다. 남자는 브레이즈의 말밑에 깔린 의도를 죽 훑어보는가 싶더니 방금 자신이 나온 문을 열고 그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시지요.”
늙은 남자의 말에 들어간 일 인실은 널찍하고 조용했다. 이름처럼 한 사람 밖에 쓰지 않는 공간이니 당연하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큼직한 공간에 소음이 전부 짓눌려 죽어버린 인상이 소름끼쳐 브레이즈는 잠깐 몸서리를 쳤다. 소년은 그 소름끼치는 침묵의 안쪽에 신줏단지처럼 가만히 놓여있었다. 환자복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알게 모르게 기품이 배어나오는 것은 타고난 혈통이 빚어낸 외모 덕분일까. 노인이 토하는 헛기침소리마저 옛 귀족이 차려야 할 예의범절 중 하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옷에 희미하게 배인 담배냄새는 한 번도 왕도를 디딘 적 없는 촌놈의 무례함에 비할 수 있을까. 순간 입술이 비틀리는 것을 느낀 브레이즈는 짐짓 얕은 기침을 토하며 입가를 가렸다. 촌뜨기가 어설프게 귀족의 예법을 흉내 내는 것처럼.
“도련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의 차린 말투에 비해 서슴없이 일인실 안으로 들어선 노인은 작은 테이블의 의자를 잡아당겨 앉고는 아직 입구에 서있는 브레이즈를 바라보았다. 테이블의 의자는 딱 하나 남아있었지만 왠지 거기가 자신의 자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면 소년의 침대는 좀 먼 자리에 있었다. 브레이즈는 침묵의 공간에 낀 성에를 깨부수듯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소년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피와 살이 감겨있을 몸이 어째서인지 실로 얽어놓은 나무토막으로 인간 흉내를 내는 것 마냥 부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의자로 올라가는 순간 자신의 손을 필요 이상으로 힘껏 그러쥐던 손아귀의 힘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소년과 노인이 마주보고 앉자, 노인이 언제 꺼냈는지 모를 볼펜으로 수첩을 끄적이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이름이나 가족 구성 같은 자잘한 신상파악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는 천천히 실체를 갖추고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병동의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여동생이 입원해 있으니까요.”
“무슨 병으로?”
“소아 뇌종양입니다.”
“어린 나이에 불쌍하기도 하지. 그럼 단 하나 뿐인 가족이 곁을 지켜줘야 하지 않나요? 일하던 도중에 여동생이 신경 쓰여서 몰래 자리를 비우거나 하면 도련님도 저도 곤란해서 말이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유는?”
“이미 수술은 끝났습니다. 동생은 면회가 제한된 중환자실에서 회복중입니다. 그리고… 회복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브레이즈는 굳건히 버티고 선 자세 그대로 몇 번이고 곱씹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시도 때도 없이 동생을 만나러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수첩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브레이즈는 이를 꾹 악문 채 그 끝에 찾아올 판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심판의 망치를 대변하는 것은 노인의 펜 끝이 아니었다.
“도련님은 어떠신가요?”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던 소년은 노인의 수첩과 브레이즈의 얼굴을 쳐다보곤 작은 새가 오후 햇살에 몸을 털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브레이즈의 머리와 감정이 새하얗게 굳는다. 노인은 수첩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
“도련님?”
“졸려.”
소년은 팔을 뻗어 브레이즈의 옷자락을 건드렸다. 단순히 손가락과 옷깃이 스치는 정도의 접촉이었지만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브레이즈는 행여나 소년이 마음을 바꾸거나 노인이 강경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까 조바심 내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신중하게 소년의 팔과 몸을 부축했다. 그 작은 몸을 새하얀 침대 안으로 밀어 넣는 동안 지구의 흐름이 역류하는 듯한 현기증이 두 어 번 엄습했지만 다행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도련님은 간병인이 당신이라도 별 상관없는 모양이군요.”
별 상관없다. 그래도 좋았다. 겨우 그 정도로 자신의 손아귀가 푸슬푸슬 바스러지지 않을 수 있다면 더한 싸구려 이유라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 있었다. 잠든 소년을 배려하듯 방의 불을 한 단계 줄인 노인은 어슴푸레해진 방 안에서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브레이즈는 군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의자는 푹신했다.
“어땠습니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니, 당신은 이미 시작했습니다. 어떻던가요?”
그렇다면 질문이 대답할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브레이즈는 잠시 망설이다 나무토막으로 인간흉내를 내는 것 같던 소년의 행동에 대해 말했다. 자신의 손아귀를 있는 힘껏 쥐어뜯던 손아귀에 관해서도.
"이유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근육이나, 신경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까?”
“정확히는 감각신경의 다발성 신경장해입니다. 2년 전에 발병했죠. 그 영향으로 도련님은 양팔과 양다리의 고유 감각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그보다 더 복잡하지요. 환상통의 정반대라고 해야 할까. 몸은 거기에 있는데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는 게 도련님의 설명입니다. 자신의 몸은 머리를 포함해서 허벅지 약간 위쪽까지. 나머지 팔과 다리는 그냥 흐물흐물한 죽은 살에 불과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따금 혀도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걸 움직이기 위해선 한없이 의식적으로 근육을 끌어당겨야하고, 또 그러도록 부추겨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도련님에게도, 당신에게도.”
“거기에 더해서, 2년 전의 사고 이후로 기억이 애매하기 일쑤라 툭하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을 겁니다. 그때는 차분하게 이해할 때까지 증상을 이해시켜 준 다음 몸을 움직이는 요령을 환기시켜주세요. 시선을 통해 투명한 낚싯줄을 관절마다 엮어 끌어 올린다-고 설명하면 가장 빨리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서 간병인이 그렇게나 쉽게 바뀌었던 걸까? 하지만 뒤이어 노인이 제시한 급여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액이었다. 남은 가능성은 둘이었다. 노인이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거나, 소년의 본성이 차마 두 번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거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브레이즈 씨.”
노인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을 로휀이라고 소개한 뒤 브레이즈가 돌보게 될 소년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그룬왈드.
당연하게도 낯선 이름이었다.
◆
“몸이 있지만 감각이 없다…?”
오랜만에 재회한 여동생은 브레이즈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그 얼굴에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브레이즈는 겨울을 이겨내고 움터난 여린 새싹을 어루만지듯 메리아의 손을 쓰다듬었다. 온기는 무심코 눈물이 흐를 만큼 가벼웠다.
“이를테면 내가 이렇게 메리아의 손을 만지면 굳이 그걸 보지 않더라도 내가 만진다는 걸 알 수 있지?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만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손을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어. 팔과 다리의 고유 감각이 망가져서 눈으로 직접 보면서 움직이거나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거야.”
“불쌍해라.”
메리아가 작은 머리를 브레이즈의 팔뚝에 기댄다. 수술을 위해 머리카락을 모조리 밀어버린 두피는 험한 수술자국을 머금은 채 천천히 은빛 수풀을 길러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사각이는 소리를 내는 메리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기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게다가 기억도 불안정해서, 2년 전 이후의 일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몸을 움직이는 방법 같은 건 어찌어찌 기억해내는 모양이지만….”
“벌레 같아.”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굳는다. 브레이즈는 등허리를 달구던 햇빛이 얼어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팔뚝에 기대어 있는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 생긋 웃는 입술. 그 위에 섬망의 먹구름이 깔렸다.
“팔과 다리의 감각이 없다니, 그래서야 몸뚱아리만 남겨진 것과 마찬가지잖아? 벌레가 억지로 인간 흉내를 내는 거랑 똑같아.”
“…….”
등골에 차가운 성에가 더께처럼 내려앉는다. 할 수 만 있다면 여동생의 머리에 스며든 언어들을 모조리 긁어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언어는 그의 혓바닥을 떠났고 여동생의 얼굴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브레이즈는 그 변화를 막을 수 없었다.
“자살한 걸까? 아, 하지만 자살하면 벌레가 되진 않아. 그럼 어째서일까? 업보일까? 후후후, 그럴지도 모르겠네. 만나기도 전에 벌레가 되어버리다니, 정말 불쌍해. 아니면 만나기 위해서 벌레가 된 건가? 오빠, 어떻게 생각해?”
짤막하던 은빛 머리카락이 주르륵 자라나 뒤엉키며 팔과 어깨를 조여오는 감각은 덩굴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생물에게 휘감기는 상황을 연상시켰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브레이즈의 손등에 메리아의 손이 포개진다. 시체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식어있는 작은 손. 비늘이 솟구친 머리카락이 뱀의 목소리로 웃는다. 소녀는 흰자위가 새까맣게 물든 눈으로 홍채를 노랗게 빛내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나는 오빠의 여동생이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타고 기어 올라온 뱀은 섬뜩하게 목을 휘감았다. 그럼 그 남자는 누구지. 오소소 돋아난 소름이 피부를 잡아당긴다. 그 남자는 그냥 그 남자일 뿐이야. 뱀은 잠깐 꿈틀거리다 크게 입을 벌렸다. 그냥, 이라는 건 무슨 의미지? 독액처럼 흘러나온 냉기가 목을 적시며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 소녀가 노란 홍채를 일그러뜨렸다. 뱀은 그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브레이즈는 한참동안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 줄도 모르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코 안쪽에 고인 숨결이 미지근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전신의 감각을 되찾은 브레이즈는 물에 젖어 무너지는 진흙처럼 툭툭 떨어지는 숨을 그러모으다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등허리가 축축했다. 기분 나쁜… 아니, 어쩐지 개운치 못한 꿈이다. 무심코 침대를 돌아본 브레이즈는 횃불처럼 켜져 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어나지 않을 터인 소년은 놀란 기색도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도, 꿈일까.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먼 존대. 소년은 그대로 잠들어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않다가,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야?” “너는 누구지?” “나는 분명.” “없어졌을 텐데.”
다 떨어진 천 처럼 너덜거리는 물음. 브레이즈는 물 컵을 내려놓았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저는 당신을 간병하기 위한 사람이고,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아있어요.”
붉은 눈이 그를 응시하다 손끝을 향한다. 이 팔은 누구의 팔이지? 이 다리는 누구의 다리야? 그렇게 묻는 말에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하고 되돌려주자 소년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사이에 시체가 팔다리에 꿰어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하얀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상처 하나 없는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브레이즈가 그룬왈드의 간병인이 된 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아닌 게 아니라 소년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신경을 피곤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폭행을 하는 수준이었다면 차라리 견딜 만 했으리라. 문제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그 방식에 있었다. 몸에 감각이 없으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살아있다는 걸 실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룬왈드는 잊을 만하면 자해를 시도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해 시도를 부탁했다.’ 과일을 깎고 있던 브레이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을 베어달라고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어떤 날은 계단참에서 밀어달라고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옥상까지 데려다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손가락이나 팔뚝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대는 건 아예 일상이었다. 이러니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어지간한 간병인이라도 고개를 내두르며 나갈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레이즈는 꿋꿋이 소년의 손아귀에서 날붙이를 빼앗고 부탁을 단숨에 거절하고 강제로 입을 벌려 피멍울이 맺히기 직전의 손가락을 빼내며 간병인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불만이라서 죽고 싶어 하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거꾸로 삶이란 소중한 것이라고 역설하지도 않았다. 어떤 말을 하든 어차피 소년은 길게 기억하지 못한다. 고작해야 이전의 간병인과 언젠가의 간병인을 뒤섞어 어렴풋이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인식으로 브레이즈를 대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런 소년이 있었다’는 느낌으로 대하면 끝이라는 게 브레이즈의 최종 판단이었다. 물론 자해를 막으려면 여러모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 이상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 간병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관리자에 가까운 관계였지만 메리아를 살리기 위해선 그 정도가 가장 알맞았다. 노인은 지난 간병인들에 비하면 잘 버티는 편이라며 브레이즈를 독려해주었다. 급여는 규칙적으로 들어와 생활을 그럭저럭 회전시켰다. 노인의 허락 하에 이따금 동생을 면회하러 갈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동생의 섬망 증세는 조금씩 줄어갔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병실을 나와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희망이 새싹 뿌리처럼 움찔댈 무렵이었다.
“여동생 말입니까?”
소년은 침대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즈는 사과 껍질을 벗기는 걸 멀뚱히 쳐다보던 소년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의도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화제로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까지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브레이즈는 딱히 거절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착하고 얌전한 아이입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남은 가족은 우리 둘뿐인데도 꿋꿋하게 버텨주었어요. 어쩌다 큰 병에 걸려서 입원중이지만… 금세 나아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얼마 안 있으면 생일이기도 하니 어떻게든 케이크라도 먹여주고 싶군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하나 뿐인 가족입니다. 당연히 해줘야죠.”
“당연히. ……모르겠어.”
하나도 모르겠어. 잦아드는 목소리로 연거푸 되풀이하던 소년은 껍질을 벗긴 과일이 질서정연하게 접시에 놓이기도 전에 베개에 머리를 묻어버렸다. 어둑한 밤의 풍경이 녹아든 창문 아래 환자복을 입은 소년이 새하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퍽 쓸쓸해 보였다.
“가족에게 생일을 축하받은 적 없습니까?”
“선물을 받았어.”
“기쁘지 않았나요?”
“기쁘지 않았어.”
“가족이 싫습니까?”
“몰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어째서?”
“…….”
암흑으로 가득 찬 깊은 절벽 아래로 던져 넣은 횃불은 끝없이 추락한다. 언제 닿을지도 알 수 없는 침묵을 디디며 침대로 다가간 브레이즈는 느릿느릿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어두운 하늘을 마주보았다. 도시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구멍 같은 달을 제외한 하늘은 그저 새까말 뿐이었다. 별을 보기 위해선 하늘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둑한 구름을 뚫고, 숨이 턱 막히는 높이까지.
“생일은 언제입니까?”
소년은 브레이즈를 쳐다보았다. 까마득한 절벽 끝에 닿은 횃불은 용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래서? 그리고, 그리고그리고그리하여그래서그렇게되고그런식으로그렇게그렇게그러므로그래서그래서그래서그래서그리고그리하여그리하여그러므로그리고그렇게 메리아가 죽었다.
어째서 모든 일이 하나의 저항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는지 브레이즈는 이해하지 못했다. 중환자실의 소독제 냄새. 지독한 냄새. 전이, 재발. 그런 단어들. 면회를 기다리는 인파를 뚫고 나와 자신을 부르던 굳은 인상의 간호사. 물컹이는 바닥. 삐걱이는 기계소리. 일그러지는 목소리. 임종. 장례와 추모와 무거운 관과 사죄의 말. 하얀색과 검은 색. 부재와 공백. 연기, 하늘, 사망신고서, 현기증, 현기증, 현기증. 무력감.
흐릿한 하얀색이 휘어지며 떠오른다. 코끝에 감도는 매캐한 냄새. 켜켜이 쌓아둔 숨을 토해내자 촘촘한 방충망 사이로 희멀건 그림자가 유령처럼 빠져나가 산산히 흩어졌다. 모든 이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저러할까. 낮은 목소리로 웃던 브레이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 몸을 묻은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 드렸는지도 모르지만.”
“제 여동생은 죽었습니다.”
소년의 붉은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동생.”
“그건 누구지?”
그렇지. 그럴 거라고 알고 있었다. 소년은 기억이 갱신되지 않는, 갱신되더라도 추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의 인간이니까. 소년의 베갯머리에는 죽음이, 발치에는 절망이, 손끝에는 허망함이 휘감겨 있을지니. 그러나 그들의 변덕으로 소년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삶을 선택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영역에서 꼭두각시처럼 지내리라. 정작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이들과 모르는 사이 사신에게 목덜미를 붙잡히는 이들의 심정에는 한 발짝도 가까워지지 못한 채. 가까워지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소년은 앞으로도 생명의 대지에 발을 디딘 채 내키는 대로 죽음의 우물을 들여다볼 것이다. 일찌감치 그 안에 빠져 죽어버린 이들의 백골을 응시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놓일 자리를 가늠하면서.
“제 여동생이 부럽습니까?” “이미 죽어버린 그 아이가 부럽지 않으신가요?” “아니, 당신은 틀림없이 부러울 거야.” “그렇지 않을 리가 없어.” “그렇지요.”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긍정이든 보류든 상관없었다. 브레이즈는 가슴을 찌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입 안에 고인 연기를 토해냈다. 영혼이라던가 죽음이라던가 그런 것을 닮은 게 허공에서 꿈틀꿈틀 흐트러져갔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에게” “죽음으로 향하는 계단을 놓아드리지요.”
아직 길게 남아있던 담배가 단숨에 짤묵해질 정도로 깊게 빨아들인 브레이즈는 창가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켜 죽음을 쫓는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코를 막아버리면 반사적으로 벌어지는 입술. 거기에 강제로 입을 맞춰 아무런 기교 없이 그저 폐부까지 고여 있던 연기를 단숨에 불어넣는다. 깊게, 깊게, 집요할 정도로 끝까지. 어린 아이의 부드러운 호흡기에 독을 머금은 담배연기는 지독히도 쓰라리겠지.
갑작스러운 침입에 감각을 잃은 몸뚱아리조차 흠칫거렸지만 브레이즈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작은 목구멍에서 신선한 공기를 원하는 다급한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브레이즈는 그 숨마저 고스란히 빨아들이고는 다시금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어느덧 서로의 얼굴이 떨어졌을 무렵에는 소년의 기침소리마저 담배냄새에 흠뻑 젖어있었다.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은 어떻습니까.”
소년은 약간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이 난폭한 행동조차 망각의 저편으로 흘러가고 말겠지. 그리고 소년은 또 다시 죽음을 쫓는 과거로 되돌아갈 것이다. 허나 메리아가 죽어버린 이상 브레이즈가 소년에게 뭔가를 할 이유는 상실되었다. 소멸되었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니.
“잘 있어라. 그룬왈드.”
“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을 할퀸다. 그는 멈칫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백의 공간은 혼자 남은 브레이즈에게는 너무 넓었다. 아무리 문을 닫고 창문을 닫아둬도 어딘가로 스며드는 바람은 집안에 스민 일상적인 추억을 자극하며 온갖 환청을 자아내기 일쑤였다. 부엌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신문이 거실에서 넘어가는 소리, 방에 있던 소녀가 문을 열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
하지만 방금 전처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만은 정확히 누가 남긴 환청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리아는 더더욱 아닌, 언제라도 바람에 파묻혀 흐트러질 것 같은 얇고 얇은 목소리. 그 끝을 쫓듯 모퉁이를 살짝 굽어보던 브레이즈는 손아귀에 안긴 상자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밋밋한 갈색 상자. 뚜껑이 약간 벌어진 상자. 메리아가 숨을 거두면서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아버린 물건들. 처음에는 그 벌어진 틈을 보는 것만으로 숨이 멈출 것 같은 슬픔을 꾸역꾸역 토해내던 심장은 이제 모든 것에 지쳤다는 듯 허한 감정을 토해냈다. 상자를 여는 손길은 여전히 떨리고 있는데도.
“…….”
상자 안에는 많은 물건이 들어있지 않았다. 애시당초 병원 중환자실은 남은 시간에 소일거리를 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닌데다 그나마 반입 가능한 물건은 물수건이나 로션 같은 꼭 필요한 생활 물품뿐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개인물품을 전달받을 수 있었던 메리아는 나름의 특혜를 누린 셈이다. 하지만 그게 인생 마지막 특혜라니. 심장이 슬픔의 가닥을 잡는다. 브레이즈는 벌어지는 틈새에 돌을 쌓아 틀어막는 심정으로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물수건, 수건, 작은 휴지와 로션. 손끝에 닿는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더니 자그마한 곰 인형과 토끼 인형, 끈으로 닫는 형식의 일기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손끝이 덜덜 떨린다. 의식이 휘청인다. 브레이즈는 왈칵 터져 나오는 숨이 마음의 수문을 건드리지 않도록 천천히 흐름을 조절하며 인형과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이제 상자는 텅 비었다.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단촐하게 놓인 물건들을 응시하던 브레이즈의 손이 메리아의 일기장에 닿았다.
본래 프라이버시의 절정이나 다름없는 일기장은 메리아가 병원으로 실려 가기 전부터 손도 댄 적 없는 물건이었다. 둘만 남은 가족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인 기록까지 함부로 침범해선 안 된다는 것이 브레이즈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메리아는 이미 죽고 없다. 이제는 한 상자에도 차지 않는 물건만이 유품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남아있을 뿐. 그리고 프라이버시를 건드려서라도 죽은 이의 흔적을 더듬어가고 싶어지는 건 남겨진 인간의 본성이다. 잠깐 망설이던 브레이즈는 일기장을 묶고 있던 끈을 풀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작고 동글지만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가는 메리아의 글씨가 소곤거렸다. 치솟는 그리움에 페이지를 천천히 쓰다듬던 브레이즈는 일기장이 중반을 넘었을 무렵 갑자기 나타난 비뚤비뚤한 글자를 발견하고 긴장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병원에 입원하고 의식을 되찾은 이후에 쓴 게 분명했다. 손끝으로 선을 더듬으며 본래의 형태를 추적해보던 브레이즈는 곧 행위의 무익함을 깨달았다. 종이 위를 종횡무진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선은 글자라기보다 하나의 무늬였다. 빙글 빙글, 뱅글 뱅글.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추상을 무력하게 따라가던 브레이즈는 일기장의 중반을 넘어선 페이지에 마구잡이로 그려진 덩어리를 보고 손을 멈췄다.
이리저리 뒤엉킨 선. 둥근 덩어리. 그것은 틀림없이 쓰러진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머리맡에 흥건한 검은 색이 의미하는 것은 피…일까. 손에 쥔 새까만 뭉치는 아마도 총이리라. 언뜻 짐승 같은 것의 이빨자국, 손톱자국이 선명한 그의 오른편에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간략화 된 덩어리가 있었다. 팔은 없다. 다리도 없다. 그리다 뭉개진 얼굴은 기묘한 섬뜩함을 머금고 있었다. 가슴팍에는 볼펜으로 마구 찔러댄 자국이 가득했다. 이건 뭘까. 대체 뭘까. 혼란에 빠진 머리로 다시 페이지를 넘기자 갑작스레 가지런한 글자가 나타났다.
[오빠, 어느 쪽이 나은 걸까.]
[그 사람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할까?]
[그 사람에게 있어 오빠는 어떤 의미였던 걸까.]
[오빠에게 그 사람은 무슨 의미였던 거지?]
[오빠는 그걸로 그 사람을 구한 걸까?]
[난 잘 모르겠어.]
[그치만 오빠가 그 사람을 구해준거면 좋겠어.]
[구원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결말이지만.]
기록은 그 페이지에서 끝이었다. 그 이상은 선도 글씨도 없었다. 광활한 백지가 펄럭펄럭 넘어가다가 끝을 고했다. 브레이즈는 일기장을 덮고 원래대로 끈을 묶었다.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던 붉은 끈은 나비 모양으로 부드럽게 묶였다. 그리고 브레이즈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시를 맞이한 시계는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째깍거렸다. 바람이 또 환청을 자아냈다. 이번에도 환청의 주인은 불분명했다. 그래서 브레이즈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풀고 통화목록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이름을 누른다. 뚜르륵, 소리가 몇 번 들린 다음에 연결된 것은 귀에 익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이런, 어쩐 일인가요?”
“…….”
목소리는 천년의 세월을 보낸 화석처럼 굳어있었다. 간신히 그 모퉁이를 깎아내 모은 부스러기로 만들어낸 단어는 조악했지만 노인은 대강 의미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도련님이라면 평소와 같으십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죠.”
“…….”
“문병이라도 가보시겠습니까?”
제안은 단순한 제안이었다. 노인의 말에는 아무런 강제도 없었고 있더라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브레이즈는 겨울 코트를 찾아낸 뒤 그 위에 목도리를 둘렀다. 차가운 바람에 체온을 잃어가면서도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오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북적이는 일반병동을 지나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간 브레이즈는 익숙한 위치에 그대로 있는 일 인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당황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 누구시죠?”
“…….”
말이 궁했다. 안에서 나온 간병인은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허둥지둥하다 휴대폰을 쥐어들고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그것이 누구에게 하는 연락일지는 명백했다. 아, 저기, 그게…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식의 단어가 발치에 수북하게 쌓였을 무렵 전화를 끊은 간병인이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저기, 저는 잠시 나가있을 테니까… 편히 얘기 나누세요.”
문이 닫힌다. 침묵이 차올랐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도 같이 차올랐다. 어차피 이 소년은 모든 것을 잊었을 것이다. 그런 병이다. 그런 증상이다. 예외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노인도 말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은 왜 여기 있을까. 어째서 만나러 왔을까. 소년은 의문 하나에 한 걸음씩 다가오는 브레이즈를 쳐다보았다.
“…….” “…….”
발걸음이 침대 맡에서 멈췄는데도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목 뒤쪽에서 솟아오르는 열기에 갑갑해진 브레이즈는 고여 있는 말만 먼지처럼 흩뿌리고 나가버리기로 했다.
“간병인은 몇 번이나 바뀌었지?”
“……몰라.”
“그렇겠지.”
방 안에 놓여있던 가습기가 메마른 대화에 어떻게든 윤기를 더하려는 듯 하얀 안개를 뿜었다. 뒤늦게 존대가 떠올랐지만 어차피 이제 자신은 소년의 간병인도 뭣도 아니다. 브레이즈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당겨 아무렇게나 앉아버렸다.
“나는 네가 그토록 죽음에 끌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내 동생 대신에 네가 죽었더라면 공평했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기분 나쁜가?”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넌 모든 걸 잊어버리기 일쑤니까. 삶이고 죽음이고 그저 동전의 앞뒷면 정도의 차이인 너에게 그 외의 일 따윈 아무래도 좋은, 무의미한 것일 테지. 그래서 전부 잊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고.”
문득 담배가 심하게 끌린다. 브레이즈는 얇은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는 창문을 비틀어 열었다. 그날 밤에도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웠다. 메리아가 있었더라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불을 붙이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가 이 소년이라면 어쩐지 거리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담배는 싫은가?”
“…별로.”
“그래.”
훅, 내뿜은 연기는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냉기에 안겨 밖으로 빨려나갔다. 옅은 잔향을 눈으로 쫓으며, 브레이즈는 남은 먼지를 털어냈다.
“동생은, 수술 이후로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자살을 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벌레처럼 죽어간다는 이야기였지. 그리고 아무래도 그 차이는 나를 만나냐 아니냐의 차이인 모양이다.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지. 애초에 그런 인물을 만난 적도 없으니까.”
타들어간 재가 꺾이려고 했다. 브레이즈는 휴대용 재떨이를 꺼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게 너인가 생각했다.”
“…….”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생각이었던 것 같군.”
담배연기와 뒤섞인 목소리는 탁했다. 소년은 나무토막이나 그와 비슷한 밀도의 침묵을 유지했다. 대답도 긍정도 부정도 보류도 아닌, 무언가. 차라리 죽은 이의 백골을 닮은.
“그룬왈드.”
이름을 불렀지만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어긋난 채였고 마음도 그렇게 어긋나있을 터였다. 기억은 차오르지도 않겠지.
“너는 나를 만나서 변하기는 했나?”
담배는 자그마한 재떨이 안에서 구겨졌다. 다른 모든 것도 그러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얘기만 했군. 간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남아있을 담배연기를 위해 창문은 닫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을 환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 한 그 순간이었다.
손을 붙잡혔다.
심장을 붙잡혔다고 착각할 정도의 충격이 가지를 뻗는다. 돌아보자 시트를 잔뜩 구기며 가장자리로 다가온 그룬왈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었다. 힘은 터무니없이 강하다. 사지를 조절하는 법을 잊은 걸까, 아니면 그저 온 힘을 다해서 브레이즈를 붙잡고 있는 걸까. 혼란스러워하던 브레이즈는 이내 그 힘의 의미를 깨닫고 실소했다.
“또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셈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네 간병인이 아니다. 그런 부탁은.”
“브레이즈.”
그때까지 담배를 물고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떨어뜨렸을 것이다. 담배 한 개피는 커녕 의식의 일부분이 툭 떨어져나간 시선으로 응시하는 브레이즈의 앞에서 소년은 무슨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려는 듯 입술을 벌려 허공을 빨아들였다. 가습기가 안개를 뿜는다. 빨려 들어간 허공은 소년의 몸 안에서 뭉쳐지고 흩어지다가 새로운 형태를 갖추고 흘러나왔다.
“꿈을 꿨어.”
손에 실린 힘이 더 강해진다. 이러다 소년의 손이 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질 것만 같았다. 혀 위에 얹어진 언어는 무슨 형태를 갖출지 몰라 당황하다가 녹아버렸다. 붙들린 손은 아프다기보다 통째로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데 죽지 않는 꿈. 계속 살아가는 꿈. 그렇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꿈.”
의식은 마구 마찰을 일으켰다. 허공에서 쇠사슬과 쇠사슬이 맞물려 끼익거리는 듯한 압박감. 철컥이는 감촉. 붙들린 손. 안에 고여서 짓눌리는 온기. 에 물들어 가는 체온. 을 그러쥐지도 못하는 손. 이 붙들려서.
“거기에 당신이 있었어.”
[오빠, 어느 쪽이 나은 걸까.]
어느 쪽도 비참할 뿐이다.
[그 사람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할까?]
모를 일이지. 모를 일이다. 알 수 있는 일 따위 없다.
브레이즈는 병원 구석에 멈춰서 동생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리다 뒤이어 그룬왈드가 중얼거린 말을 되씹었다.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데 죽지 않는 꿈. 계속 살아가는 꿈. 그렇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꿈. 거기에 당신이 있었어 붙잡혔던 손은 풀려난 지금도 보이지 않는 사슬이 뒤얽힌 것 마냥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조심 들어와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준 간병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껏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손을 뗀 것은 그룬왈드 쪽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용건은 그것 뿐이라는 듯, 더 이상은 아무 할 말도 없다는 듯. 그와 반대로 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찾지 못한 채 텅 빈 입술로 황망히 병실을 등지는 브레이즈의 등 뒤에서 간병인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엉킨 말을 간신히 이해한 것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세 발자국 걸어간 다음이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그런 말은 병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한 걸까.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형식적인 인사로 넘길 수도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 말이 노인이 던졌던 말과 똑같은 속성이라는데 있었다. 강제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 그런데도 브레이즈는 거기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다. 그때는 여동생의 일기장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을 붙잡던 손이 있다. 담배를 피우려 해도 잘 움직이지 않는 손을 감싸 쥔 브레이즈는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이곳으로 찾아올 자신을 직감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오빠는 어떤 의미였던 걸까.]
수없이 뺨을 스치던 바람 중의 하나. 그 정도일 것이다.
[오빠에게 그 사람은 무슨 의미였던 거지?]
바람은 사람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의미 또한 그렇다.
[오빠는 그걸로 그 사람을 구한 걸까?]
…….
[난 잘 모르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치만 오빠가 그 사람을 구해준거면 좋겠어.]
뺨에 바람이 닿는다. 브레이즈는 고개를 돌려 건녀편을 바라보았다.
[구원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결말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풍경은 아름답기보다 삭막했다. 늘어진 전선은 여기저기 겹쳐지며 흐린 하늘을 절단한다. 버릇처럼 불을 붙이기만 하고 한 번도 빨아들이지 않은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흩어졌다. 그런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구원이 아닌 것은 무얼까. 끔찍하다는 건 또 무얼 말하는 걸까. 브레이즈는 담배를 꺼버렸다.
◆
얼마 뒤 브레이즈는 집의 물건을 정리해 이사했다. 원래 살던 곳과는 상당히 떨어진 마을이었다. 대신 병원과는 조금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자주 찾아갈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브레이즈는 일을 했고 사람을 만났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이따금 담배를 피웠다. 그룬왈드를 만나러 간 횟수는 그보다 적었다. 간병인은 바뀌어있기도 했고 바뀌어있지 않기도 했다. 만나는 시간은 짧을 때도 있었고 길 때도 있었다. 날은 흐리거나 맑거나 비오거나 했고 그룬왈드는 그때마다 살아있었고 살아있었다. 가끔은 잠들어있기도 했다.
브레이즈는 그 잠든 얼굴을 쳐다보며 끔찍한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동생이 남긴 두 개의 덩어리를 떠올리며 비참하게 죽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늘상 그룬왈드가 먼저 깨어나기 마련이었다. 깨어난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뭔가를 하거나 살가운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우연처럼 만나 같은 방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두 사람이 하는 행위는 그 정도였다.
아니, 그걸로 충분한 건가?
어느 날은 눈이 내렸다. 브레이즈는 옷깃을 추스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룬왈드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살짝 만져본 뺨은 창백하긴 해도 온기가 돌고 있었다. 내리는 눈이 벚꽃이 되고 장마가 되고 낙엽이 되고 다시 한 번 눈이 내리고 그런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될 동안 쭉 피와 살을 덥히고 굳은 몸에 영혼을 얽어놓을 온기.
“그룬왈드.”
손을 떼지 않고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소년은 녹은 눈 아래의 꽃이 피어나듯 느리게 눈을 떴다. 이어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않고 가만히 손바닥에 뺨을 기댈 뿐이었다.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부러 손을 빼낼 마음도 들지 않아, 브레이즈는 그대로 자신의 손을 그룬왈드에게 양보했다. 식은 손에 닿는 뺨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 + +
땅에서 자라난 풀에 뒤덮인 시체의 목에 걸려있던 인식표를 뜯어낸 브레이즈는 무릎을 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레지멘트가 끝을 고한 숲은 그 날의 무시무시함은 온데 간 데 없이 새들의 수다스런 지저귐을 음미하며 새파란 잎사귀를 사박거렸다. 비바람을 맞아 군데군데 녹슨 인식표에 새겨진 이름은 읽기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발음할 순 있었다.
“그룬왈드… 론즈, 론즈브라우?”
들어본 이름이었다. 레지멘트 내에서도 좀 이상한 성향을 가진 대원들이 거론될 때 한 두 번씩은 꼭 끼어있던 이름. 덕분에 제대로 얼굴을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가 가진 기이한 성향은 브레이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죽음에 매혹되어, 죽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잘도 그런 가치관으로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자살한 건가.”
손에는 레지멘트 대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지급되는 권총이 들려있었다. 하얀 두개골에는 총알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였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무렵에는 다들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느라 바빴을 테니 아마 아닐 것이다.
이글거리는 소용돌이의 끝자락. 어둡고 어두운 숲. 모두가 도망치는 숲 . 거기에 홀로 남아 레지멘트의 끝을 예감하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당기는 그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일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역시 생각하게 되고 만다.
…뭐, 자살한 사람의 생각을 산 사람이 추측해서 어쩌겠냐만은.
셉터는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때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쉬운 회수였다. 숲에 파묻힌 시체는 묘비도 무덤도 없이 썩어갈 테니 굳이 시체를 수습할 필요도 없다. 브레이즈는 셉터를 잘 갈무리했다,
도중에 문득 이 녀석이 살았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옛 동료끼리 서로 검을 겨누는 일이 한 번 더 늘어날 뿐이다. 설마하니 둘이 서로 어깨를 도닥이며 격려의 말씩이라도 건네겠는가. 우정이라도 쌓았겠는가. 브레이즈는 짧게 혀를 차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바람이 등을 긁었다.
만남에 감사하며.
◆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헨리 제임스, 여인의 초상 中)
Thanks : 표지협조 미하란님
잦은 멘붕을 조용히 지켜봐주는 트친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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