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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쿤그룬]태자님에게 여장을 시키고 예쁜 이름을 붙이고 싶었을 뿐

꽃을 뿌리세, 꽃을 뿌리세.

병마의 썩은 눈이 이 아이를 보지 못하도록.

 

꽃을 뿌리세, 꽃을 뿌리세.

연약한 이 아이의 심장이 병들지 않도록.

 

꽃을 뿌리세, 꽃을 뿌리세.

가녀린 숨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지만 정말 그걸로 충분한건가요?

 

=

 

 론즈브라우 왕국의 안뜰, 장미덤불에 피어난 장미를 햇빛의 애정 어린 손길에서조차 수줍음을 타고 달아난 것 마냥 새하얀 손가락이 쓰다듬는다. 짧은 은발을 대신하듯 머리 위를 화려하게 장식한 퐁탕주에서부터 드리워진 긴 베일에 매끄러운 등허리가 어슴푸레한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붉은 드레스로부터 두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양산을 받치고 서있던 하녀는 문득 자신의 시야 한 구석에서 일렁이는 낯선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 거기에는 여기와 같은 초록과, 장미꽃잎과, 푸른 하늘 아래의 공기가 있다. 조금 전의 낯선 기운은 단순히 자신의 주인되는 자가 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꼼짝않고 양산을 받쳐들고 있어야한다는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본래의 업무로 돌아온 하녀는 행여나 자신의 행실이 다른 하녀나 시종의 눈에 띄어 책당하는 일이 없도록 꿋꿋이 양산을 받쳐들었다.

 

어느 틈엔가 베일 너머에 붉은 꽃봉우리가 고개를 내민 줄도 모르고.

 

=

 

론즈브라우국의 제 3왕자는 태어난 뒤에도 잘 울지 않았다. 옛부터 잘 울지 않는 아이는 자신을 거둬갈 사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거기다 그 무렵 나라 안을 휩쓸던 열벙도 있어, 왕과 왕비는 자연스레 고민에 빠져들었다. 행여나 그 열병의 마수에 셋째 왕자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그 자그마한 몸은 사흘 밤낮동안 지옥같은 고열에 달구어지다 차가운 묘비 아래서 식어가리라. 왕자가 둘이나 있는 시점에서 더이상 아까울 것은 없었지만, 일국의 왕자가 서민들이나 걸리는 열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하면 왕가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의술을 통한 예방책을 세우는 한편 조상들의 지혜를, 관습을 빌려 셋째 왕자의 건강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늘거리는 프릴과 레이스. 부풀어오른 어깨가 그리는 우아한 곡선. 반짝이는 구두, 다리를 감싸는 하얀 양말. 꽃과 보석으로 치장된 머리장식은 단아하고, 몸을 감싸는 드레스는 허리께에서 몇 겹이고 겹쳐진 패티코트 덕에 풍성하게 펼쳐진다.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왕족 특유의 고귀한 외모는 본래의 성별에서 완전히 벗어난 복장에도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이어서, 왕실 사람들은 이따금 셋째 왕자가 사실은 공주였는지 헷갈려 한 두번씩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그래도 결국 남자는 남자다.

7살 생일이 돌아왔을 무렵, 셋째 왕자는 당연하다는 듯 드레스를 벗고 검을 쥐었다.

 

그가 추방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의 일이었다.

 

=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지시자가 간만에 새로 들여온 전사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셋째 왕자를 응시했다. 첫 대면, 그것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남자의 언행에 왕자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

 

“무슨 소리지?”

“이런, 나를 잊었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에, 마치 자신을 생전에 만나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 거기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한 모습에 드물게도 할 말을 잃어버린 셋째 왕자가 묵묵히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상관없나. 너의 육체와 나의 정신이 기억하고 있으니.”

“…불쾌하군. 가겠다.”

“간다고? 너는 나의 소유물이다. 로제타.”

 

그 단어가 귀에 닿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열망에 이성이 파묻힌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그룬왈드의 목덜미에서 붉은 낙인이 움찔거리더니.

 

“이리온.”

 

그의 정신을 화사하게 뒤덮었다.

 

=

 

장미에게선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온기도 없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옷뭉치와 똑같이 의미없는 장식물. 부속품과도 같은 것. 왜 사람들은 이런 것을 한가득 심어두고 쳐다보면서 탄성을 지르기를 반복하는걸까. 진득한 허무감에 휩싸인 채 장미를 더듬던 손가락 끝이 떨어진 순간, 하얗고 얊은 꽃잎들이 일시에 파르르 몸을 떨며 추락했다. 생전 처음보는 현상에 붉은 눈이 깜박이자, 여지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남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거만한 장미도 저보다 아름다운 자 앞에선 패배를 인정하는 법이지.”

 

묘한 남자였다. 비단 옅은 녹색 머리카락이나 경박해보이는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경계심이나 거부감이 솟아나는 일은 없었고, 도리어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이를 만난 듯한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여지껏 자신을 돌봐준 유모나 하녀에게조차 느낀 적 없는 감정.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남자가 새하얀 뺨으로 손을 뻗었다. 약간 싸늘한 체온에 심장이 들떴다.

 

“이름은?”

“로제타.”

“꾸며낸 이름이군. 소용없다. 본명을 말해.”

“…그룬왈드. 그룬왈드 론즈브라우.”

“남자인가? 하기사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것. 오히려 그 비어깃테님의 심복인 이 쿤이 손을 뻗게했다는 점에 너는 인정 받을 자격이 있다. 허나 아직 어린 꽃봉우리를 꺽어버리는 것도 성급한 짓이지….”

 

쿤은 손을 뻗어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장미 봉오리를 꺽었다. 그 와중에 장미가시에 찢긴 피부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꽃잎을 타고 스며드는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룬왈드는 그것을 자신에게로 내미는 쿤을 보고 조심스레 입술을 벌렸다. 피에 물든 장미를 쥔 남자의 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고, 말캉한 혀 안쪽을 누르는 손끝에서 핏기를 머금은 봉우리가 떠밀려 가라앉는다. 갑작스런 이물감. 아랫배가 조이는 감각. 저도 모르게 입을 앙다문 그룬왈드가 쿤을 올려다보자.

 

“삼켜라. 내 피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미지근한 피가 느릿느릿 흘러내린다. 흡사 점막을 유린당하는 기분에 눈을 꼭 감고 몇 번이고 가느다란 목을 꿀꺽이던 그룬왈드가 마침내 장미 봉오리를 삼켰을 무렵, 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빼내고는 익숙치 않은 노동에 헐떡이는 조그만 입술을 매만졌다. 선홍빛 타액이 섞이며 붉어져가는 입술.

 

“이것으로 계약은 맺어졌다. 아름다움이란 세상의 조화. 오늘 여기서 마주친 것처럼, 너와 나는 자연스레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너의 그 귀여운 이름은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오늘 이후로 너를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건 나뿐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차라리 속박이었다. 피냄새가 온몸에 퍼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악마에게 이름을 빼앗긴 꽃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남자는 사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자신은 오늘 이후로 더 이상 로제타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교회 종소리처럼 끊임없이 울려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