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룬왈드는 웃고있었다. 여기서 저는 무엇을 하면 되는거죠? 하는 물음은 필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리라. 싸우고, 죽는다. 자신의 쌍둥이 형이 자주 읊조리던 말이 그룬왈드에게 있어 유일한 삶의 지표가 되어있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도망쳐라." 그룬왈드의 눈이 커졌다. 이런 귀여운 반응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나.
"여기서 도망가. 헛되이 죽지 마라. 너희들은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어."
"싫습니다." "명령이다." "거부합니다. 어차피 돌아갈 장소도 없습니다."
알고있다. 추방된 왕자. 괴벽. 싸늘한 시선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너는 죽음을 구원으로 여기고 있고, 도리어 삶을 이어가는 것을 무료한 형벌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살아줬으면 한다. 살아서, 삶이라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읊조리고 웃을 수 있게 된다면.
"...참 기쁠텐데 말이지."
이어지지 않는 회화에 그룬왈드가 얼굴을 찌푸리는 찰나 있는 힘을 다해 복부를 걷어찬다. 의표를 찔린 습격에 배를 감싸쥐고 쿨럭이는 제자를 내려다보며, 리리는 묵묵히 칼집으로 목 뒤를 내려쳤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넌 반드시 따라올테지."
근처의 나무등걸에 몸을 기대게 하고는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킨다. ... 나중에 눈을 뜨면, 이 아이는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프리드리히를 원망하겠지.
"그래도 뭐, 그걸로 한 사람이 살아난다면 좋은거지."
설령 나 자신이 죽더라도. 홀연히 스며나오는 생각은 스스로도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아마도(혹은 분명) 이제 두번 다시 마주할 수 없을 얼굴을 잠시 쓰다듬고, 리리는 몸을 돌려 숲의 중심부로 향했다.
2.
"뻔뻔하시군요."
뒤틀린 옷깃이 뿌득뿌득 뒤틀린다. 자신보다 작고 어린, 한때는 교관과 학생 사이였던 청년에게 멱살을 잡힌 채, 베른하드는 한 손으로 자신들을 말리려드는 쌍둥이 동생을 저지했다.
(이건 우리 사이의 일이야.)
뒤틀린 옷깃과 천을 틀어쥔 손, 자신을 찔러죽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 낮은 각도로 자신의 목을 압박한다. 분명 브레이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한 자신의 표정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우리라.
"그건 오히려 네 쪽 아닌가, 브레이즈?"
"...무슨 뜻이죠?"
"원망에 눈이 멀어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 않냐는 뜻이다."
목을 으스러뜨리려는 악력이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고함과 분노를 대신한다. 제법 대단한 자제심이었지만, 그것은 지금 이 곳이 아닌 좀 더 적절한 곳에서 발휘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가장 처음 이 소식을 들은 그 장소에서.
"네가 나에게 경쟁의식을 품거나 원망하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 않겠다. 하지만 거기에만 휩쓸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팔을 붙잡고, 무방비한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뜨리고 중심점을 잃고 방황하는 몸을 단숨에 바닥에 메다꽂는다. 갑작스런 충격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브레이즈가 자신의 눈 앞에 들이밀어진 붉은 검날을 발견하고 이를 악무는 모습을 바라보며, 베른하드는 조용히 선언했다.
"망설임없이 너를 베겠다."
"여유로우시군요. 차라리 여기서 저를 베시는게 어떻습니까?"
"....멍청한 놈."
아직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인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최대한급의 모욕을 토해내던 베른하드는 문득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씁쓸히 검을 거뒀다.
3.
다리와 팔의 감각이 아득하다. 숨은 쉬어지지만 의식은 어쩐지 굉장히 멀어서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기 대신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모호한 감각 속에서 말라가는 눈동자로 어디라고 할 것 없는 한 점을 응시하던 찰나 무언가가 시야 구석에서 움직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고, 어린 남자아이이며, 그 자신과 오랫동안 어울려왔던 뒷세계의 아이라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의식이 너무 깊게 침잠해있었던 그룬왈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소년은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무릎을 꿇어 낡은 침대에 잠겨있는 그룬왈드와 시선을 맞췄다. 약물에 젖어 흐릿하게 풀린 눈동자에 소년의 입술 한 구석이 살짝 들떴다.
"그룬왈드."
왕자님, 이라고 정중히 불러야 할 이름을 내키는대로 부르며 침대가에 팔을 얹는다. 이제 이 남자를 왕자라 부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대할 필요도 없다. 이 지하, 이 감옥, 이 좁은 철창 안쪽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그룬왈드."
소년의 애완동물 뿐이니까.
"다른건 다 잊어버려."
왕국, 지위, 혈육, 정적, 모멸, 허무.
그런 의미없는 것 따위 모조리 지워버리고.
"이제부턴 나만 기억하는거야."
내 목소리를.
내 손길을.
내 눈빛을.
내 모든 것을 그 몸과 마음에 모조리 새겨서 너덜너덜해지고 넘쳐흐를 정도로 가득 채워서 내가 한날한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그립고 무서워서 미쳐버릴 정도로.
나만을 생각하고 물들어라.
"사랑스런 그룬왈드."
바싹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 이내 몸을 당겨 입 안에서 무방비하게 늘어져있는 혀를 이빨로 깨물어대며, 콥은 짙게 웃었다. 그룬왈드의 손이 꿈틀거리다 얇은 한숨과 함께 시트를 쓸어내렸다.
4.
브레이즈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년은 제 몸만한 크기의 토끼 인형을 껴안은 채 볼을 부풀렸다. 분명 나갈 땐 금방 돌아올 거라고 말해놓고선 이렇게나 자신을 기다리게 하다니. 자신이 이런 인형 따위에 정신이 팔려 늦게 들아와도 모를거라고 여겼단 말인가. 괘씸한 생각에 괜시리 껴안은 인형을 때리거나 목을 틀어쥐며 분풀이를 하던 그룬왈드는 어느 순간 괘종시계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걸로 브레이즈가 자리를 비운지도 벌써 두 시간이 다 되어가는 셈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갑작스레 위협적으로 들려오는 초침소리에 놀란 그룬왈드는 방금 전까지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형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로부터 도망치려는 듯 눈을 꼭 감았지만, 천과 솜으로 이루어진 몸이 공기를 둔중하게 울리는 소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룬왈드는 떨리는 숨을 조금씩 내뱉으며 행여나 놓칠새라 팔에 안고있는 인형을 조금씩 고쳐안았다. 분노와 폭력이 사그러진 자리에서 쓸쓸함과 고독함의 안개가 짙게 배어나왔다.
"...브레이즈..."
인형을 끌어안은 채 토해내는 목소리는 초침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는다. 또 다시 아무도 없는 집의 크기를 실감하게 된 그룬왈드가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마음을 추스리며 인향을 안은 팔에 힘을 준 순간, 현관문 방향에서 누군가의 출입을 알리는 익숙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집을 가로지른 그룬왈드는 자신이 조금 전 까지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던 이의 얼굴이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브레이즈!"
허망하게 울리던 때에 비해 훨씬 명확해진 목소리를 듣고 이제 막 집으로 들어선 은발의 남자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얼굴이 붉어지는 줄도 모르고 브레이즈의 소맷자락을 붙잡은 그룬왈드는 이내 자신의 손을 맞잡아주는 브레이즈의 온기에 몸의 고동이 되살아나는 기분에 살짝 몸을 떨었다.
5.
이런거 좋아해요?
아니.
근데?
왠지 너한텐 해보고 싶어.
남자는 웃었다. 그룬왈드로 말할 것 같으면, 싸한 밤이 발목에 매달린 기분이라 그리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장소가 대학교의 강의실 세트장이라는 것도 더욱 웃음기를 마비시켰다.
기왕이면 돌아가서 따뜻한 이불과 함께 푹 잠들고싶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스케줄이 있으니 지금 자두지 않으면 눈밑이 퀭해져 메이크업 담당자가 신경질을 부리겠지. 하지만 눈 앞의 이 남자가 그리 쉽게 자신을 풀어줄 것 같지도 않아, 그룬왈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비아깃테씨랑 스캔들 난거 봤어요. ...둘이서 뭐했어요?
키스, 속삭임, 애무, 삽입, 사정, 임신, 낙태, 배신, 증오. 이제 눈 밑에 점을 찍고 찾아올거야.
브레이즈.
발목뼈까지만 보고 관뒀어. 그 사람 애인 있더라. 뭐, 지금 이렇게 보니 네쪽이 더 이쁘네.
말만 들어도 고맙네요.
핥아도 되지?
자, 잠시만요... 읏.
젖은 혀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복숭아뼈를 핥는 감각에 몸을 움츠리며 발을 빼자 그 행동을 나무라듯 브레이즈가 날카로운 시선을 날린다. 그 시선에서 거역할 수 없는 강제를 느낀 그룬왈드는 살며시 숨을 들이키며 몸의 힘을 빼고는 훤히 드러난 발끝으로 느리게 어둠을 헤집었다. 당췌 브레이즈가 어디서 구해왔을지 모를 둔중한 족쇄가 짤각거렸다
6.
"실력이 녹슬었군. 그룬왈드."
달빛이 내린다. 검을 놓친 그룬왈드에게서 저항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짧은 머리 아래의 목덜미가 처연했다.
"죽여도 좋아, 브레이즈. 다른 동료들에게 했둣이."
"배신자라고 부르고 싶은 모양이네. ...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정의가 있어. 그리고 오늘은 너를 해치러 온게 아니야."
일어나, 라며 손을 내민다. 그룬왈드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마주잡았다. 피부는 약간 차가웠다.
=
"머리는 왜 잘랐어?"
"귀찮아서."
"아까운 짓을 했네. 아름다웠는데."
그룬왈드는 그 이상 아무말도 않고 계단 가에 앉아 눈을 감았다. 달빛이 흐르는 그 옆모습은 석공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깍아낸 여신상의 모습을 연상케했다. 조금 마른걸까, 소매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손목을 지켜보며 브레이즈는 염려스런 마음을 품었다.
"너" "너는, 변하지 않았군."
"...그렇게 생각해?"
"그 머리. ...그대로야."
그 얘기였나. 브레이즈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은발을 쓸어넘겼다. 언젠가 서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퇴색된 이야기다. 그때 서로를 사랑하던 두 소녀는 이제와 각자의 검을 든 전사로서 재회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여 감정까지 퇴색한 것은 아니었다.
"브레이즈."
살짝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그룬왈드의 얼굴을 껴안은 자신에게로 흘러든다. 아니,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남은 어리광일지도 모른다. 브레이즈는 조용히 그룬왈드의 짧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속삭였다.
"판데모니움은 좋은 곳이야, 이런 나라와는 달리."
"...나의 나라야."
"너를 버린 나라야."
그리고 이제와 너를 도로 주워올렸지. 브레이즈는 딱히 불쾌감을 감추지도 않으며 그룬왈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룬왈드는 호응하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함께 가자, 그룬왈드. 내가 너의 모든걸 보장할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브레이즈는 잠자코 입을 맞췄다. 약간 메마른 입술이 까끌거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마음을 더 동하게 했다. 이윽고 입술을 떼어냈을 때, 조각상 같던 그룬왈드의 뺨에는 약간의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브레이즈는 그 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고있어, 그룬왈드. 그리고 그때 너와 함께 있지 못했던 것도 후회해."
"...네 임무는 어쩌고?"
"옛 동료들과 너는 별개야."
브레이즈는 진심이었다. 설사 여기서 그룬왈드에게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올 각오는 되어있었다.
(나의 그룬왈드.)
(너를 저 나라 사이의 논리에 따라 팔아치우게 두진 않겠어.)
그룬왈드는 브레이즈의 품에서 오랫 동안 눈을 감고 가만히 기대고 있었다. 병적으로 창백한 피부가 두근거렸다. 이내 눈을 뜬 그룬왈드의 손은 브레이즈의 손을 깊이 파고들어간 채였다.
7.
날이 쌀쌀하다. 보급품으로 받은 커피를 뜯어 컵에 부어넣은 뒤 뜨거운 물을 부어 휘휘 젓던 브레이즈는 한 발 느리게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그룬왈드를 발견하고 미리 남겨두었던 자기 몫의 설탕을 그룬왈드의 컵에 쏟아부었다. 딱히 기분나빠하는 기색 없이 그 위에 더운 물을 붓고 한 모금 마시려던 그룬왈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멈칫거렸고, 그룬왈드가 예의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눈치챈 브레이즈는 한숨을 쉬며 그룬왈드의 커피를 뜯었다.
"정신차려, 그룬왈드."
"음..."
대답은 미미하다. 브레이즈가 탄 커피를 받아들고서도 한참을 멍하니 있다 브레이즈의 채근에 비로소 자신의 컵을 기울인 그룬왈드는 이내 "써."라는 한 마디를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 아이같군. 늘상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처럼 입 안에서 가라앉았다.
8.
론즈브라우국의 지원군을 이끌고 전장을 찾아온 지휘관을 처음 본 에이다가 느낀 것은 놀라움이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군대를 이끄는 자가 여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자신과 같은 오로루 부대 동기인 플로렌스나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게 된 알렉산드리아나 여왕을 볼 면목이 없다. 에이다가 론즈브라우의 지휘관을 보고 놀란 이유는 단 하나,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루비오나 연합왕국은 말 그대로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여 살고있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다. 당연히 동맹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에이다도 장갑병 부대의 일원이 된 이래 몇 번이고 알현식의 호위로 참가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자의 방문을 지켜봐온 에이다로써도 알현실을 똑바로 걸어들어오는 론즈브라우국 제 1왕녀의 모습은 몹시 생소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왕국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예법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녀의 걸음걸이나 말투, 태도는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장으로 나선 왕족의 모습을 기대한 자들이 만족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왕국을 대표하여 찾아온 자들이 으레 보이기 마련인 늠름함이나 자신감, 혹은 오랜 세월로 쌓인 노련함 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텅 빈 껍데기같은 공허함이 느껴질 뿐.
그것은 에이다처럼 손에 피를 묻히고 적의 몸을 분쇄하며 싸워온 전사들이 이따금 사무치도록 느끼는 허무함과는 달랐다. 에이다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지만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는 쉬이 알아낼 수 없었다. 거기까지 알아내기에 알현식은 너무 짧았고, 전쟁은 급박했으며, 어쩌다 얼굴을 마주할 정도의 우연조차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로 론즈브라우국의 왕녀가 연이은 승전보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그마저도 세상 풍문에 밝은 플로렌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론즈브라우군이 제국군과 또 한번의 일전을 치르고 승리를 거둔 넓은 평야에 도착한 에이다는 시체 냄새가 진동하는 공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거무스름하게 탄 지면을 밟았다. 찾고있던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생체기 투성이가 된 갑주를 걸친 채 검은 옷과 망토를 두르고 있는 론즈브라우국의 검은 왕녀.
"그룬왈드 왕녀님.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처음 궁전에서 알현하던 날 보았던 긴 잿빛 머리칼은 전장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짧게 잘려나가 있었다. 거친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 목덜미를 바라보던 에이다는 고개를 돌린 그룬왈드의 붉은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너는 누구지?"
"루비오나 연합왕국 소속 에이다라고 합니다. 내일 있을 겔리온 함락 작전에서 왕녀님과 협동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은 왕녀님에게 한 가지 묻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왕녀님은... 어째서 이 전쟁에 참여하셨습니까?"
"동맹국간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건 명분이지요. 저는 왕녀님 본인의 의지를 묻고싶은 겁니다."
"...들어서 어쩌겠단 거지?"
"아시겠지만 내일 있을 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이쪽으로 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작전이니만큼, 서로간의 신뢰를 구축해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군."
"!!"
"전장에서의 작전에 신뢰는 필요없어. 중요한건 얼마나 효율적으로 죽이고 승리하느냐... 너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이군."
들킨건가. 에이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난 돌려말하는건 질색이야. 날 찾은 목적이 뭐지?"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내일 작전에서 살아돌아와 주십시오]."
"...무슨 엉뚱한 소리지?"
"처음 왕녀님을 보았을 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과는 달리 왕녀님은 수많은 승리를 거두셨죠. 제가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한걸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최근들어 왕녀님의 지휘가 자기 자신을 사지 속으로 더욱 깊숙이 집어넣는 식으로 이루어젺다는걸 알았습니다. 아무리 용맹한 자라 해도 그 정도로 사선을 넘으려하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왕녀님 당신은..."
"거기까지."
검은 왕녀는 담담하게 에이다의 말을 가로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리서 시체냄새를 맡은 까마귀떼가 요란스레 울었다.
"듣자하니 이야기를 점점 꼬아가는군. 네 목적은 그것뿐이냐?"
"기분을 상해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어째서지?"
"네?"
"어째서 나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하러 온거지? 작전은 작전이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작전이 성공하면 전쟁의 흐름은 바뀌겠지. 그걸 위한 희생이라는걸 이해 못할 위치도 아닐텐데?"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막혀버린 말은 좀처럼 이어지려 하지 않았다. 전쟁, 희생, 피와 죽음, 돌이킬 수 없는 것, 희생해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은 이 전쟁을 거치며 에이다의 마음 속에 확고한 자국을 남겼을 터다. 그런데도 왜 굳이 그녀를 찾고,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려 하고, 삶에 대한 이야기와 첫 인상까지 들먹거리고 만 것인가. 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하는 에이다를 쳐다보던 검은 왕녀는 그녀의 대답을 포기한 듯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검은 왕녀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여전히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에이다는 반쯤 충동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꽃은 좋아하시나요?"
"..."
"이제 곧, 왕실 정원에 꽃이 피어날 겁니다. 여왕님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으실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왕녀님께서도..."
"꽃은 좋아하지 않아."
대답은 간결했다.
"금방 시들어버릴 뿐인걸."
"...그렇습니까."
"이만 가겠어. 그럼."
이번에야말로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자신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어쩌지도 못한 채 쭉 서있던 에이다는 이내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9.
\불에 달궈진 상처는 자상이나 창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흔적을 남긴다. 고작 붕대따위로 가려질 리 없는 고통을 부여안은 채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는 그룬왈드의 이마를 닦아주며, 리즈는 지시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구에게 당한거지?
당신.
뭐?
당신이었어. 인정사정 없더라. 하긴 여기서는 연인이라해도, 그쪽에게는 단순한 적일 뿐이니까 말야.
......
뭐, 어떤 상처라도 낫는게 이 세계의 섭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니면, 간호라도 해줄래? 당신에겐 좀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지시자는, 묘하게 웃고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 엉겨붙은 무력감을 눈치챈 것일까. 애초에 전략상의 이유를 들어 그룬왈드를 그에게서 떼어놓고 듀얼에 데려간 것은 그녀였다. 그렇다면 그룬왈드가 다치지 않도록 좀 더 세심한 지시를 내렸어야 하지 않나...아니, 이건 치졸한 덧붙임이다. 지금 이 상황이 일어난 이유는 자신이 그룬왈드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십의 전사를 이끄는 지시자는 그 점을 냉정하도록 잘 이해하고 있었다. 리즈 또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그룬왈드가 상처입을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
평소보다 더욱 창백한 입술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력감. 그보다 큰 분노가 머리를 점령하려는 것을 강제로 짓누르며, 리즈는 흰 붕대에 감긴 그룬왈드의 손을 붙잡았다.
"그룬왈드, 괜찮아. 난 여기에 있어."
"......"
신음은 투정처럼 이어진다. 방금 닦아냈는데도 금새 흥건히 젖어버린 이마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낸 뒤, 리즈는 그나마 무사한 그룬왈드의 뺨을 쓸어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
...
.......
"어서와. 무슨 용건이지?"
지시자는 느닷없는 방문에도 태연했다. 그의 행동쯤은 이미 다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수상쩍은 태도도, 그의 목적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아무 상관없었다. 간신히 상태가 진정되어 조용히 잠든 그룬왈드와 그 몸에 감긴 흰 붕대의 잔상을 떠올리며, 리즈는 지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의 기억을 되찾고 싶다. 협조해주겠지?"
"그 말을 기다렸어. 에이스님."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뭘까?"
"나는 너를 위해 기억을 찾으려는게 아냐... 기억 속의 힘을 되살려, 소중한 이를 지키려는 거다."
"어머나."
지시자는 웃었다. 리즈는 주먹을 꽉 쥔 채 그 웃음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10.
"너 아까 통화중이더라?"
내뱉은 말과 동시에 벽을 쥐고있던 손을 그러쥔다. 이 공격적인 말투는 대체 뭐냐, 시간이 몇 신지는 알고있냐. 지금 당장 끊어버리고 내일 정중하게 사과해라. 마음 속에서 웅웅대는 목소리는 질투심과 초조함이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려 먹혀버렸다.
그룬왈드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은 그룬왈드의 자유의지이며 애인인 자신은 그것을 존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단 그룬왈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하는 리즈의 기본 모토였으나, 요즘 들어 그런 사고방식이 삐걱이며 불협화음을 내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벽에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을 추궁한 것도 결코 처음이 아니다. 이제껏 그가 타인을 대하는 데 취했던 태도가 스스로도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최근의 그는 그룬왈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받았다?"
감정은 과하면 흘러넘치고, 흘러넘친 감정은 반드시 보기 흉한 얼룩을 남긴다. 그룬왈드가 그렇게까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란건 이미 알고 있는데도, 고작 타인의 전화에 자신의 통화가 무기한 유보되었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이빨에 실리는 힘을 막을 수 없다. 악물린 입안에서 흘러넘치는 가시 돋힌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이런게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게 아니라...
"잠깐만."
"옆에 누구야?"
"들렸어. 웃음소리."
"....."
"지금 갈거니까 꼼짝말고 있어."
내동댕이치듯 전화를 끊고 자리를 박찬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죄책감은 같은 무게의 분노로 변해 타오르고 있었다.
-
"..."
끊어진 전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옆을 돌아본다.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그룬왈드의 얼굴을 들어다보고 있던 프리드리히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추고는 전화기를 빼앗아갔다.
"들켰어요."
"진짜? 리즈는 무서운데."
"무서운 걸 알면서, 왜 웃었습니까?"
"그룬왈드가 귀여워서. 너, 아까 곤란하다는 듯이 얼굴 찌푸렸잖아."
봐, 지금도.
천연덕스레 그룬왈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머리를 헝크러뜨린다. 불만스레 머리를 정리하던 그룬왈드는 소파에 걸쳐져있던 재킷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향하는 프리드리히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는겁니까?"
"정면승부는 무서우니까."
"의외로 치사하네요."
"어른의 지혜라고 해줘."
긴 부츠를 단숨에 신은 프리드리히가 뒤를 돌아본다. 행여나 그가 깜빡한 물건은 없나 주변을 돌아보던 그룬왈드는 현관에 서 있던 그가 팔을 벌리고 재촉하는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그의 품에 안겼다. 다시 한번, 포옹과 키스.
"팜므파탈이네. 아니, 옴므파탈인가?"
"또 뭡니까, 그건."
"비밀. 알고싶으면 직접 알아와."
프리드리히는 그 말 만을 남기고 이번에야말로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대로 리즈와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싶었지만, 한참을 지나도 조용한걸 보니 그와는 마주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꺼져있던 텔레비전을 키고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마지막으로 몸 여기저기에 남은 프리드리히의 감각을 머릿 속에서 지운 뒤, 그룬왈드는 느릿하게 소파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의 몸을 지탱하던 소파는 언제 그랬냐는듯 시치미를 뚝 떼고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채널을 몇 번인가 바꾸다 전원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머잖아 자신의 감정을 극한까지 내리누른 자의 손가락이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상상하던 그룬왈드는 허리께의 화상이 조금씩 욱신거리는걸 느끼며 몸을 비틀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11.
그룬왈드는 성에 돌아와 있었다. 자신이 레지멘트에 간 사이 장남과 차남이 모두 목숨을 잃어버린 성은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기를 대폭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형님들은 얼굴이 어땠더라. 느지막히 떠올린 생각은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같은 추상적인 형태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룬왈드의 취미를 지적하는 것 말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한 적도 없었던 사이다. 추방된 이래로 한번도 떠올리지 않은 얼굴이 이제와 기적처럼 생각날리도 없었다.
대신 떠오른 것은 엉뚱한 얼굴이었다. 툭하면 서로의 실력을 가늠해보자고 으름장이던 금발의 검사. 어딘가 다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치료와 안정이 중요하다면서 시끄럽게 굴던 스톰 라이더의 후손. 툭하면 이론수업을 실기로 바꾸는가 하면 자신의 것도 아닌 고양이 얘기를 꺼내서 귀찮게 하던 활발한 교관과, 그와 쌍둥이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로 대원들을 지휘하던 냉정한 교관...
왜 그들이 생각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그래도 흐릿하던 친형들의 얼굴은 그들의 이미지에 짓눌려 완전히 묻혀버렸다. 잠시동안 그들을 떠올리던 그룬왈드는, 이내 조용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 빠져들기 직전, 언젠가 그들이 멀리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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