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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언라이트

[베른그룬]전멸의 날

트친 펜님의 그림에 꽂혀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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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냄새는, 익숙하고, 친근하고, 때론 반갑기까지 했다. 빈사의 상처, 죽음에 절어 떨리는 숨결, 흥건히 고여 흘러내리는 피와 이따금 덩어리져 흘러내리는 고깃덩이도 그러했다. 이제까지도, 여태껏, 분명 앞으로도.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축을 뒤지더라도 그가 죽어가는 것에게 연민, 혹은 동정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건- 뭐지. 의문부호를 붙일 여유조차 없이, 가빠진 고동을 배경음 삼아 호흡을 토해낸다. 시야에는 약간 비스듬하게, 자신을 정면으로 안고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그가 아니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스킨쉽이라며 뿌리쳤을 그것은, 지금에 와선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귓가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호흡, 코끝에 머무는 것은 매캐한 탄내와, 거기에 진득하게 섞여있는 피비린내.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해메이던 두 손은 그의 옷자락을 가볍게 스친 것만으로도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분명, 빈사의 상처. 죽음은 그리 머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 있겠지. 평소에는 숨을 쉬는 것 만큼이나 당연하게 떠올렸을 생각에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간다. 비단 등골 뿐만 아니라 모든 사지가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분명, 저 멀리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해서, 확인해버린 그 순간부터.


목덜미를 걸쳐, 등으로, 오른팔을 비스듬히 지나, 등으로 이어진, 그의 양팔은, 언제 끊어질까 알 수 없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억지로 작은 상자에 쑤셔진 동물마냥 가쁜 호흡이 언제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다가, 그것이 자신의 호흡인걸 알고는 숨을 죽이고, 그 숨을 죽인 간극에 아무런 호흡도 느껴지지 않을 때의 절망과, 미칠 것 같은 애잔함, 안타까움이, 정말이지, 살아오면서, 심지어 동료가 눈 앞에서 죽은 날에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온몸을 마구 난도질한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 놀라는 이는 없다. 놀랄만한 사람은 지금 여기, 자신의 품 안에서, 혹은, 자신을 안고.


죽어간다.
죽어가고있다.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 순간 내장이 찢기고, 혈액이 독이 되고, 모든 호흡이 칼날이 되다가, 마침내 심장이 스스로 뛸 이유를 잃는다. 온기를 잃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아, 평온을 되찾았다. 그렇다,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왜 잊어버리고 있었던가. 자신이 여태껏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왔든, 어떻게 생각해나가든, 자신도 그도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그가 먼저 죽어버린다는 것을, 이렇게나, 이다지도. 두려워하고 말았다니. 웃음이 터진다. 터져나온다기보다, 목구멍 안쪽으로 잠겨들어가는 웃음. 그 웃음과 함께 붉게 물든 손으로 그를 껴안으려 한 순간.


-은, -다.


귓가에, 낮게,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 그것만으로도 나름의 온기를 되찾는 듯하던 세계는 다시 얼어붙고, 전신을 물어뜯기는 듯 하던 통증이 이빨을 드러내며 언뜻 뺨을 어루만져주던 그의 왼팔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한다. 그와 비례하여, 조금 전보다 더욱 무겁게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는 그는, 아마도 더 이상 눈을 떠주지 않겠지. 바로 조금 전의 자신이었다면,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시체를 가지런히 두고 망설임 없이 곁에서 목숨을 끊었을테지만, 그 지점에서부터 아주 약간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룬왈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숨결은 여전히 거칠다. 눈물은, 이제 막 상대의 옷에 두번째 자국을 남기고, 떨어져서, 뺨을.


"어째서."


간신히 튀어나온 물음이, 비명과 절규와 비문과 작별을 대신한다.  

 

"어째서… 어째서."


-죽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그 말에 따르고 싶어지지 않으면 안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서 죽어서, 당신과 같은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변해서, 그걸로 전부 끝내버리고 싶은데, 당신이 한 그 말 때문에 여기를 떠나서 다른 어딘가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따위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곳에, 여기에, 당신과, 당신의 죽음을 놔두고.


그런 말 따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아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듣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죽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 괴로울 일도, 슬플 일도, 미쳐버릴 일도 없다. 이, 뺨을 만져주던 손과, 마지막 말과, 온몸을 감싸듯 안겨있는 그의 무게를, 식어가는 체온을 무시하고, 무시하고, 무시하고, 무시, 해서.


호흡이 엉망으로 이지러진다.
그룬왈드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