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솔했군."
소파 위로 쓰러진 청년을 바라보며 문신의 남자가 웃는다. 난데없는 기습에 푹신하게 내던져진 그룬왈드는 혼란스런 기색조차 없이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고 있었다. 잠깐 개인적인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가 양아버지-일단은, 그런 입장이다-와 마주치고, 옷깃의 핏자국을 지적당해 단추를 풀던 와중에 습격당한 사람 치고는 무척이나 평온한 그 반응은 이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남자는 경솔함을 입에 담으며 즐거운 듯이 웃고있는 것이리라.
"아니면, 일부러인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
양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남자는 단추를 풀던 와중에 붙잡혀 흐트러진 옷깃 사이로 드러나있는 목덜미를 핥는다. 그제야 수려하기만 하던 청년의 얼굴에 약간의 파문이 퍼져나가, 코브는 뱀같은 미소를 지으며 유열이 번져나가기 직전의 뺨의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거리에서 처음 봤을 때에는 독기 서린 시선으로 쏘아볼 줄만 알던 눈동자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빛을 띄고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 묘한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보니 밑의 놈들이 좋은 와인을 하나 구해왔었지. 너도 한잔 해라."
와인을 잔에 따르고, 그룬왈드의 쓰러진 몸을 일으켜 먹여주는 대신 그대로 기울여 양자의 입술로 흘려보낸다.
붉은 와인은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듯 하다가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뺨과 소파에 짙은 얼룩을 남겼다.
2.
"실종된 훈련생은 아직인가?"
"네. 부대원들이 편대를 짜 부지 내부를 수색하고 있지만 눈발이 워낙 강해 난항을 겪고있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꼴사납네. 고작해야 눈내리는 날의 야외훈련일 뿐인데 거기서 실종이라니. 사고라면 그나마 동정을 금할 길이 없겠지만, 만약 탈주라면 레지멘트의 수치야."
"수색부대도 슬슬 체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슬슬 철수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실종된 부대원은 버리고 돌아가겠다는 건가?"
"그런 말이 아니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늘 아래 각자의 목소리가 튀어돌아다닌다. 야외훈련 도중의 훈련생 실종이라는 이례적인 상황에 다들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닌게 아니라 몇 번의 야외훈련을 거친 기수만을 골라 실행한 합동훈련에서 부대원이 실종되는건 흔치 않은 불상사다. 베른하드는 당황한, 혹은 분노한 훈련생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휘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처음 실종 연락이 들어온 지 벌써 네 시간. 굵어지는 눈발을 보아하니 슬슬 수색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다음에는 흉폭해진 눈보라가 수색대까지 삼켜버릴지도 몰랐다.
"알았다. 수색부대는 전부 철수. 정해진 경로를 통해 본부로 귀환해라."
"교관님!"
조금 전까지 부대원들과 논쟁을 벌이던 은발의 훈련생이 목소리를 높인다.
단호한 눈빛으로 그 이상의 항의를 잠재운 뒤, 베른하드는 연락용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프리드리히, 들리나?"
<들려. 무슨 일이야?>
"지금부터 수색부대를 철수시킨다. 일단 수색부대를 귀환시킨 뒤 너와 나 둘이서 부지 외곽을 다시 한번 둘러볼거야. 그런데도 보이지 않으면 포기한다."
<…알겠어. 여길 정리하는대로 바로 갈게.>
무전은 짧게 끊어졌다. 둘이서 수색 가능한 시간은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겠지.
그 안에 그룬왈드를 찾아내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베른하드는 손목에 찬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그룬왈드의 남은 시간을 카운트 하는 것처럼 들렸다.
3.
왕자라는 신분을 지닌 자가 한때마나 기거했다고는 빋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침침한 골방에는 사각의 틀이 가득했다. 램프의 불빛에 의지해 먼지냄새 나는 공기를 가로질러 캔버스 몇 개를 뒤적여보던 브레이즈는 이내 쓴 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림은 그리는 자의 심리상태를 반영한다고 하던가.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림 속 풍경은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한 그루의 나무, 죽어가는 시신의 실루엣, 바닥에 고인 피, 비틀린 선으로 묘사된 덩어리같은 것. 하기사 그룬왈드는 무언가를 섬세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섬세하게 파괴하는 쪽이 더 어울렸으니, 이건 이것대로 그룬왈드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한때는 전우였고,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그를 기리며 방을 죽 둘러보던 브레이즈는 문득 한쪽 구석에 교묘하게 가려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돌렸다. 두개의 크고 작은 캔버스 뒤쪽과 벽 사이에 끼이듯 놓인 사각형의 무언가가 천에 덮혀있었다. 무언가, 라고 해도 실루엣으로 보아선 분명 캔버스일 그것은 마치 스스로 천을 뒤집어 쓴 채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려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천을 벗겨낸다. 움직임을 최소화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물씬 피어오른 먼지는 브레이즈의 호흡기를 한바탕 뒤집어놓고는 키득거리며 가라앉았다. 그동안 장갑을 낀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밭은 기침을 토하던 브레이즈는 문제의 캔버스가 자신을 등지고 있음을 알고 반쯤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그 캔버스를 뒤집었다. 램프 불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춰지던 먼지가 다시 요란스럽게 뒤흔들렸다.
또 다시 기침이 터져나오지는 않았다.
브레이즈가 숨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탓이었다.
캔버스에는 언뜻언뜻 가늘어지다가도 다시 이어지며,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호소하듯 살짝 떨리는 선으로 그려진 붉은 갑주. 붉은 망토. 붉은 장갑을 낀 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누군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라는 말은 기만에 불과하다. 그 실루엣을 본 순간부터, 브레이즈는 그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램프 불빛이 기름 부족을 호소하며 바직거리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턱턱 끊기는 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매만지던 브레이즈는 문득 자신의 뺨에 해당하는 부분에 하얀 물감으로 덧칠된 부분이 있다는걸 깨닫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하얀 빛 너머로 붉은 점이 찍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림을 그리던 중에 실수를 한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하얀 점은 얼굴의 외곽을 이루는 선을 약간 덮고있었다.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도 않으니, 아마도 이 점은, 그림이 전부 그려진 뒤에 남겨졌겠지. 하지만 대체 왜 일부러 그림을 수정하는 짓을 했을까. 이 정도의 오점따위, 설령 남더라도 그룬왈드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텐데….
그걸 깨닫는 것과 동시에, 브레이즈는 서둘러 몸을 뒤를 물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앙상한 나무, 죽어 스러져가는 시신, 마닥에 고여 굳어가는 핏줄기, 비틀린 선으로 묘사된 죽음이 가득 찬 방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를 응시했다. 그려낸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듯 살풍경하게 그려져, 한없이 메마른 시선으로 한순간의 감정이 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듯이 응시해오는 그림들.
"…그룬왈드."
이렇게나 메마른 풍경 속에서, 이다지도 필사적으로 그려내고는,
그림 속의 브레이즈에게 손을 뻗다가 손끝의 물감이 흔적을 남겨 당황하며 도로 손을 거둔다.
그러고는 자신이 남긴 오점이 최대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흰색을 덧칠하는 그룬왈드를 상상하고, 브레이즈는 상당히 우울한 기분이 되고말았다.
4.
시곗바늘이 날카로운 예각을 이룬 채 잠들지 않는 이를 째깍째깍 책망하는 시각. 뒤척임에 지쳐 헐거워진 시트와 묽은 어둠으로 가득 찬 방을 빠져나와 건물 뒷편을 거닐던 베른하드는 그 중턱에서 서성이고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룬왈드."
"…교관님."
"취침시간에는 잠을 자는 편이 좋다고, 몇 번이나 충고했을텐데."
"알고있습니다."
"내가 준 수면제는?"
"다 떨어졌습니다."
"복용은 하루에 한 번이라고 했을텐데?"
"어젯 밤, 먹어도 먹어도 몇 번이고 깨어버리는 바람에."
"그렇다고 하루만에 다 먹으면 어쩌겠다는거냐."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진심어린 사과의 빛은 없었다. 어쩌면 먹었다는 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서랍 한 구석에 밀어넣었거나 세면대 틈새로 흘려보냈을지도 모르지. 언젠가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베른하드는 달빛에 창백하게 드러난 그룬왈드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난번 불면증으로 뒤척이다 건물 바깥으로 나온 베른하드에게 처음으로 목격당했을 때도, 그룬왈드는 마치 한낮의 복도에서 그를 만난 것 마냥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었다. 그때는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냈고, 두번째 만났을 때에는 신경 문제인가 싶어 수면제를 한 알 쥐어주고 돌려보냈다. 세번째에는 아예 약을 얻으러 왔다기에 복용량에 맞춰 먹을 것을 당부하며 약을 주었는데 이틀만에 이 꼴이라니.
"…손에 숨기고 있는건 뭐지?"
"보시겠습니까?"
불시의 지적에 분명 몸이 움찔 떨렸는데도, 그룬왈드의 목소리는 묘하게 기대에 차있었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 프리드리히가 무언가 신기한 것을 찾아냈을 때 저런 표정을 했었지. 그 연쇄작용으로 신기하게 생긴 돌멩이나 요란한 색깔의 벌레, 선명한 빛을 띈 새의 깃털 따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 베른하드는 그룬왈드의 펼쳐진 손바닥 안쪽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을 굳혔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손바닥 안에는 작은 동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흙투성이 두개골이 있었다.
"다람쥐의 뼈입니다. 보는건 처음이라, 기념으로 가져왔습니다."
"…네가 죽였나?"
"아뇨. 여우가 죽여서 먹고있었습니다."
분명 그 여우는 그룬왈드의 손에 죽었으리라. 베른하드는 눈 앞의 이 소년이 여우를 죽이고, 죽어 먹히던 다람쥐의 너절한 머리를 집어올려 남은 살을 발라내는 모습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론즈브라우의 왕자가 그 태생만이 아닌 이유로 훈련생 사이에서 기피되는 이유는 이것이었나.
"…가지시겠습니까?"
그룬왈드의 목소리는 간절하게까지 느껴졌다.
대체 그 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까지 간절했었던 걸까.
그 이유를, 베른하드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깨닫게 된다.
5.
"브레이즈"
"뭐냐."
"나에게 농구를 알려주는걸 허락한다."
"……."
"내 말을 무시하지마라, 브레이즈."
'(정말이지…)'
"그래서, 뭐가 문제지?"
"공이 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아."
"너무 근본적인데. 일단 한번 던져봐."
"좋아, 잘 봐라."
(휘익.)
"형편없군,"
"죽인다, 브레이즈."
"일단 전체적으로 자세가 뻣뻣해. 리리 선생님이 자세 설명하는거 안 들었어?"
"모른다. 잤다."
"쓸데없는 부분까지 당당하게 말하긴…. 아무튼 자세에, 그 다음은… 그 안대를 벗는게 어떨까."
"브레이즈… 저주받은 사안을 무방비하게 드러내라고 하다니, 농담이 심하군."
"심한 것은 네 머리야."
"애초에 다래끼도 아니고 눈병도 아니면서 그런건 왜 하고 있는거냐. 벗어!"
"크윽, 그만둬라! 함부로 벗겼다간 저주받은 오오라가 너의 정신을…."
"시끄러워!" (타악) "후우…. 이것 봐, 아무렇지도 않지."
"…후후, 브레이즈, 역시 너의 정신력은 높이 살만하군"
"그만해. 제발.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
"사안의 힘이란 본래 펑범한 이에겐 독과 같은 것이지"
'(때리고싶다)'
"아무튼, 안대도 벗었겠다. 다시 던져봐. 자, 공을 잡고, 다리를 구부리고, 팔을 당기면서… 더, 더 당겨야지. 옳지. 그리고 튕긴다는 느낌으로…."
(파악)
"바닥에 메다꽂으면 안돼지. 바보야."
"하호라고 하히하하(바보라고 하지마라)"
'(재밌다)'
"후히하, 후히하라!!(웃지마, 웃지마라!)"
"뭐, 안된다면 될 때까지 해보는 수 밖에. 자세는 방금 알려줬으니까 이번에는 스스로 해봐."
"흥, 이 몸이 능력을 보고 놀라는게 좋다."
"흐음."
"필살의 태세!"
"?!"
"배쉬!" (휘익) "후, 나의 강렬한 일격을 피하다니 제법이로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필살의 태세, EX!"
"공던지는데 일일이 기술명 외치지마. 그리고 뭣보다 뛰어들어가면서 넣으면 감점이다."
"흥, 이 몸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한 놈 같으니."
"나 간다."
"여기에 사안의 기운을 잔뜩 남겨 재액을 초래하고싶다면 맘대로 해라."
"하아…. (정리안하고 가버릴거다 이거지…) 알았다."
(휘익… 철썩)
"!" "!!"
"봤냐, 브레이즈!"
"확실하게 봤다. 깨끗하게 들어갔네."
"이게 힘의 발동한 나의 진정한 능력이다!"
"그래그래. (3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발동됐지만 말이지.) …아무튼, 수고했다 그룬왈드."
"…멋대로 뺨 만지지마라."
"아, 이거 실례. (아, 얼굴 빨개졌다)"
"그나저나, 그룬왈드."
"뭐냐."
"배고프지 않아?"
"흥, 내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건 죽음이 가진 검은 기운 뿐…."
"그래? 만약 배가 비었다면 우리집에서 밥먹고가라고 말하려 했는데."
"(움찔)"
"하긴 사안의 소유자님에게 일반 가정식은 우습겠지. 실례했다. 잊어버ㄹ."
"간다."
"네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건 죽음의 기운 뿐이지 않았나?"
"가끔은 인간의 음식도 나쁘지 않아."
"그래그래."
[다음날]
"야! 리리 선생님이 오늘부터 축구로 종목 바꾼데!"
"!! …브레이즈!"
"그런 간절한 눈으로 보지마라. 이젠 나도 몰라!"
6.
그룬왈드가 갑자기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지만, 행동이나 울음소리가 완전히 고양이의 그것이 되어버렸으니 고양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 원인제공자는 (아니나다를까) 바인더의 제약 및 실험 담당자인 로쏘. 그날따라 불길한 예감이 들어 브레이즈가 실험실까지 쳐들어가봤더니 옷이 헐렁헐렁한 그룬왈드를 데리고 로쏘가 뭔가 -아마도 파렴치한 짓이겠지-를 하려들기에 그야말로 혈투를 벌여서 데리고 나왔다던가.
문제는 그 이후였는데, 어쩌어찌 그룬왈드를 구해내고 지시자에게 상황을 알리려했던 브레이즈가 때마침 퀘스트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와 마주친 순간 그룬왈드가 그 덱에 있던 아인에게 한 눈에 반한 것 마냥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룬왈드가 고양이가 된 상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타당한 전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저건 너무 붙어다니는 것 아닐까?
일단 기본적으로 아인을 졸졸 따라다닌다. 행여나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룬왈드가 저런 목소리도 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애처롭게 울어댄다. 그나마 옷을 갈아입을 때라던가 볼일을 볼 때에는 문 앞에서 기다리도록 잘 타일렀다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다릴 때마다 문턱을 긁거나 가느다랗게 우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따금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아예 품에 안겨버릴 때도 있다. 사이즈가 줄었다고는 해도 어린 아이 한 명의 무게니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테지만 그 모습이 흡사 애정결핍증에 걸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꼴이라 굳이 떼어내기가 죄책감이 든다.
나도 딱히 그 녀석을 억지로 잡아떼고 싶은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상태에서 아인의 뺨을 핥는다거나 그릉그릉거린다거나 꼬리를 살랑거린다던가 하는건 너무하지 않냐. 일단 보기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무심코 넘기게 되지만, 실제 그룬왈드는 키가 180에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싸늘한 녀석이라는걸 상기하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복잡미묘해진단말이다. 지금이야 그냥 넘어간다쳐도 나중에 본래모습으로 돌아오면 대체 어쩔 셈인건지.
게다가 그 녀석, 아인에게만은 온갖 행동으로 관심을 끌고 좋아하는 티를 다 내는 주제에 다른 사람이 만지려고만 하면 털을 빳빳하게 세워댄다. 로쏘는 물론이고 브레이즈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지시자에게는 아무 반응없이 얌전하게 있는게 다행이었다. 이쯤되니 원래 그룬왈드가 아인을 좋아한게 아니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모르겠다. 나중 일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지금은 그 녀석이 나를 볼 때마다 하악질하는거나 그만해줬으면 싶다.
7.
순백의 옷으로 몸을 감싼 여자는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예전부터 그토록 바라던 무언가를 극적으로 손에 넣은 처녀가 지을 법한 만족스러운 웃음. 하지만 여타의 처녀들과는 달리 그녀의 웃음에는 활기넘치는 생기가 아닌 차갑게 정제되어 굳어가는 죽음의 냄새만이 점철되어 있었고, 그것이 브레이즈로 하여금 죽은 이의 시체에서 피어오르는 썩은 내로 인간의 거죽을 부풀린 것이 인간 행세를 하고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응당 불쾌감과 혐오스러움, 거북함이 잔뜩 밀려들어 그에게 구토감을 안겨줘야 했겠지만….
"사랑스럽지 않나요?"
그 말과, 그녀의 발치에서 마치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흑태자의 모습. 죽음의 군대를 다루며 상대를 무자비하게 학살해왔을 여자의 손이 창백한 뺨을 스치고는 턱을 요염하게 쓸어올려 마지막으로 보랏빛 입술을 어루만진다. 뭇 남자였다면 환희에 몸을 떨며 달아올랐을지도 모를 정도로 은근한 애무였지만, 결국 그녀의 손은 상대의 싸늘한 안색에 일말의 홍조도 띄우지 못했다. 다만 남자의 입술이 움직이며 탁한 혓바닥이 그녀의 손가락을 느리게 핥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흥분의 빛이 떠오르게 하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미쳤군."
"어머나, 제가 볼 땐 당신이 더 미친 것 같은걸요? 이런 사랑스런 모습을 보고도 겨우 그딴 반응이라니."
"이미 죽은 자를 억지로 불러일으킨 걸로도 모자라 자아를 빼앗아 자신만을 따르게 한 주제에, 사랑스럽다고?"
"후후, 질투하고 있나요? 원한다면 하룻밤 빌려드리지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답니다."
대답은 할 필요 조차 없었다. 브레이즈가 품 속의 검 손잡이를 잡는 것과 동시에, 생긋이 웃고있던 벨린다가 기습적으로 흑태자의 고개를 꺽어올리며 그 입술을 탐했다. 이미 죽은 혀와 붉은 혀가 뱀처럼 뒤엉키고 메마른 마찰음이 퍼지는 가운데, 동공이 풀린 눈이 무언가에 열중하듯 살짝 가늘어지는 것을 알아챈 브레이즈는 역겨움보다 극심한 분노를 느끼며 검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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