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이과계열 학문에 대해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룬왈드는 로쏘의 방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방이라기보다 실험실의 일부분에 가까운 공간이 지닌 실험실 특유의 정적과 딱 알맞은 정도의 서늘함, 그리고 왠만해선 사람이 들어오지 않다는 약간의 폐쇄성은 쉽게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찾고있던 그룬왈드의 취향에 상당히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방의 주인 또한 그룬왈드가 자신의 방 한켠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말하지 않아, 로쏘의 연구실 한켠에 흑태자가 누워있는 풍경은 금새 두 사람 사이의 일상이 되었다.
이따금 로쏘가 그룬왈드에게 이런저런 실험을 시도하는 일도 있었다. 선택지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 가벼운 발길질이나 몸싸움으로 거부한다는 것과 호기심에 이끌려 실험에 응한다는 두 가지가 있었고, 어느 쪽을 택하든 나름의 유흥거리가 되는 그것은 그룬왈드에게 있어 나름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느 때처럼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앞에 생전 처음보는 도구를 들고 서있는 로쏘를 발견하고도 조금은 반가운 마음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실험이지?”
방금 전에 잠에서 깨어난 탓에 조금 나른한 의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로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룬왈드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실험 아닌데?”
“그럼?”
“그룬에게도 피어스 해줄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길게 혀를 내밀어보이는 로쏘. 확실히 그곳에는 작은 구체형의 금속이 두 개 박혀있었다. 매번 입을 맞출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이 싫어 몇 번인가 혀에서 뺄 것을 종용했지만 끝내는 그룬왈드 자신이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던 물건. 불빛을 받아 반사되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룬왈드는 문득 불길한 예상을 하나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설마 너와 똑같은 곳에 하라는건 아니겠지.”
“기왕이면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커플스러운 느낌도 나고.”
“거절한다.”
좀 전의 반가운 마음을 단숨에 폐기하며 로쏘를 밀어낸 순간 그대로 팔을 붙잡혀 강제적으로 쓰러진다. 졸지에 한쪽 팔을 구속당한 상태로 드러눕는 자세가 된 그룬왈드가 언짢음을 숨기지 않으며 로쏘를 노려보자, 양 다리를 벌리며 그의 허리 위에 올라탄 로쏘가 고글을 밀어올리며 장난스레 어깨를 움츠렸다. 당연히, 비킬 마음 따위 없을 것이다.
“왜 거절하는거야?”
“싫으니까.”
“거짓말.”
웃음 섞인 말이 들린다 싶더니 그대로 혀가 섞인다. 갑작스런 키스에 저항할 사이도 없이 빨아올려지고 휘감기는 감각 속에서 돌기처럼 박혀있는 둥근 피어스의 감촉이 의식을 어질어질하게 뒤흔들어, 그룬왈드는 짧은 숨을 들이쉬며 몸을 뒤척였다. 옷자락이 서로 마찰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긴 듯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입술이 떨어지고, 로쏘는 사뭇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 좋아하잖아.”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혀에 피어싱을 놓겠다는 로쏘를 순순히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룬왈드는 자유로운 쪽의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손등으로 상기된 얼굴과 입술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해도 되지?”
“안돼.”
“억지 부리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네 쪽이겠지.
그룬왈드는 굳이 말할 필요 없는 감상을 떠올렸다.
“어쨌든 혀에는 안돼.”
“어째서?”
“키스하는데 방해된다.”
“난 전혀 방해되지 않는데?”
“내가 방해된다.”
“…….”
스윽, 하고 로쏘의 얼굴에 약간 그림자가 진다. 광원 아래로 이동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순히 로쏘의 얼굴에 띄고있던 웃음기가 보이지 않게 된 것 만으로도 분위기가 싸늘하게 돌변해, 그룬왈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룬왈드의 옆얼굴을 훑어내리던 손가락이 돌연 입 속의 혓바닥을 찍어누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
“그런 말을 들으면 상심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
심기가 불편해진 건가. 그룬왈드는 자신의 혀에 손톱을 세우고있는 로쏘를 냉정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적절하게 대웅하지 못하면 아마도 로쏘는 정말로 자신의 혀에 피어스를 박아버릴 것이다.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인 경계심을 품게 되는 그룬왈드에게는 실로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더더욱 난감한 일이 되어버린다.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고민에 빠졌던 그룬왈드는 결국 둘 중 덜 곤란한 쪽을 택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손가락 아래 갇혀있던 혀를 억지로 빼냈다. 강제적으로 해방된 혀에 얼얼한 감각이 맴돌았지만, 차분히 가라앉힐 시간은 없었다.
“혀의 피어스는… 네가 하고있는 걸 느끼는 걸로도 충분해. 이쪽에도 달려있으면 방해된다.”
정한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단숨에 내뱉는다. 그 말을 로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다면 다행이지만, 역으로 더 나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룬왈드가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하지 않고’ 나빠지는 것보다 ‘저지르고’ 나빠지는 방향이었으니까.
로쏘는 금방 반응하지 않았다.
손가락만이 느리게 그룬왈드의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
요즘 들어 퀘스트를 나갈 때의 선봉은 제드가 맡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로 정면에서 야귀와 마주치게 된 제드는 인과의 실로 상대의 행동에 혼란을 가하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로쏘가 눈에 익은 주사기를 장전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타이밍도 잘 잡았으니 잘하면 한번에 붙잡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 머리 뒤로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전투를 지켜보던 제드는 불현듯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위화감의 정체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태자님, 귀걸이 생겼네.”
꿈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반응은 의외로 적나라했다. 그렇다면 자기가 스스로 한 일은 아니란건가? (그룬왈드는 자기 의지로 행한 일에 대해선 언제나 당당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드는 성녀의 딸이 이끄는 전사들 사이에서 피어스를 하고있는 유일한 상대와, 그와 그룬왈드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고는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게 아니라 로쏘라면 능히 할 만한 일이었다.
"태자님도 고생이 많구나-."
그룬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귓가의 붉은 보석이 묵묵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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