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개 스포일러 있습니다.
-npc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개인적인 주밀레 설정 있습니다.
-내용 어둡습니다.
-특정 글과 슬그머니 연결되어있습니다.
-사실 분기점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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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리 낙담하고 있어?"
공간은 새까맣다. 서로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만 떨어진 테이블과 의자에는 각각 한 여자와 남자가 앉아있었다.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고있는 남자는 척 보기에도 무거운 고뇌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대답없는 그를 쳐다보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후후, 꼴사납긴."
그 말과 웃음소리에 남자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청록색이다. 여자는 빛 한 줄기 없는 공간에서 정확하게 자신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시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당신이군요."
"응, 나야."
낮은 한숨. 그녀는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아스라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나를 책망하려고 온 겁니까?"
"그건 이미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충분히 하고 있잖아? 난 그냥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왔을 뿐이야."
"이야기…. 이야기라."
남자는 여자의 단어를 입으로 굴려보다 메마른 웃음을 토해냈다. 갈수록 거의 오열에 가까워지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 웃음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자신의 테이블에 놓인 차를 익숙하게 따랐다.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라 그녀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이 닿는 자리에는 잘 구워진 과자도 있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박힌 쿠키가 그녀의 입 안에서 세 개째 부숴졌을 무렵 웃음의 탈을 쓴 오열이 멈췄다.
"…좋습니다. 말해드리죠. 우리의, 아니 저의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 마음 툭 터놓고 말해봐."
조리있게 잘 말하면 상으로 마나 허브를 줄게. 다분히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남자가 깍지 낀 손을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주름지고 늙은 손등 위로 투박한 초승달 자국이 새겨졌다.
"우선 이 세계를 농락하는 신들과 에린의 연결고리를 끊는다. 그리고 이 낙원에 축적된 증오와 분노를 씻어낸다…. 그것이 이 세계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한 최중요사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반의 목표를 달성했지요. 신과 이 세계의 연결점. 소울 스트림을 파괴하고 완전히 독립된 에린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온전히 다난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훌륭해. 하지만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을테지."
"그렇습니다. 소울 스트림을 거의 부수기 직전 그 힘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여신 마하가 강림했으니까요. 루에리가 검은 악령의 힘을 최대한 끌어모아 싸워준 덕분에 어떻게든 그녀를 되돌려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만… 그 결과, 루에리는 아주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물리적인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였지요. 하지만 이 세계에서 저 지긋지긋한 신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이 정도야 버틸 수 있다며 루에리는 소울 스트림을 마저 부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소울 스트림을 파괴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죠."
남자의 목소리가 어두워진다. 여자는 손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탁탁 털어내고는 찻잔에 담긴 차의 향기를 한껏 음미했다. 잘 우러난 홍차는 맛도 아주 좋았다.
"희생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루에리를 잃게 된 것은 너무나 뼈아픈 손실이었지요. 그래도 멈춰설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루에리의 시신을 수습한 뒤 신과 에린의 연결이 끊어진 걸 확인하고 이 세계를 정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맨몸으로?"
"제게는 신과 다름없는 힘을 지닌 성물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고정장치였던 소울 스트림이 파괴된 이상 이 세계의 흐름이 낙원을 향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죠. 중요한 것은… 증오와 분노의 정화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지? 이곳은 사실 현세가 아닌 낙원 티르 나 노이다. 밀레시안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던 신의 존재를 없앴으니 우리들은 이곳에서 낙원의 일원으로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의 원수를 친구처럼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라. 그렇게 연설이라도 하고 다녔나?"
"그런 말을 하기엔 아직 일렀습니다. 우선은 에린의 대륙 곳곳에 좋지 않은 기운이 필요 이상으로 뭉친 곳을 정화할 필요가 있었지요. 때로는 봉인도 해야했습니다. 크리스텔에게는… 그때 정말로 많은 신세를 졌지요. 그리고…."
여태껏 말을 쏟아내던 모습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남자는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자는 텅 빈 찻잔에 새로운 차를 부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빛깔의 레몬티였다. 꿀에 절인 레몬의 맛을 오랫동안 즐기던 그녀가 맞은편을 향해 물었다.
"낙원은 강림했어?"
"…그래요. 낙원은 강림했습니다. 정말로 완벽한 낙원이었죠. 누구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 단 하루의 낙원."
남자의 목소리에서 떨어진 비참함이 어둠을 적셨다. 그는 지금도 낙원에서 호흡하는 이들이 나누던 대화와 웃음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어 아침이 되면 깨어나고, 어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농담과 대화를 반복하며 온화하게 웃는 사람들. 어제 베였던 나무는 오늘 다시 베여 땔감이 되고, 어제 꽃을 선물받은 처녀가 오늘도 같은 꽃을 선물받고 얼굴을 붉히는 풍경. 아이들은 같은 장소 같은 자리에서 몇 천번이고 똑같은 순서로 똑같은 놀이를 하고 모든 어머니들은 어제와 같은 식사를 준비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것뿐이었다면 이 따스하게 밀폐된 낙원을 나름대로 긍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노인은 카드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죽은 지 대체 며칠이나 지났는지 사방천지에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냄새 따위 아무렴 어떠냐는 듯 떠들썩하게 웃고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즐겼다. 남자들의 오랜 우정이란 죽은 이의 시취마저 아랑곳하지 않으니, 우정이란 이토록 숭고한 것이던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 쯤은 타르라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낙원에서 '죽음'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소울 스트림이 부숴지고 신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투아하 데 다난들은 영원히 행복해야 했다. 하지만 노인이 죽어버렸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끝장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는 이는 늘어만 갔다. 대부분은 노인이었으나 때로는 젊은이나 아이들이 죽기도 했다. 크리스텔과 타르라크가 틈틈이 시신을 찾아 매장하고 기도해주었지만 이 거대한 에린을 단 둘이서 장례지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낙원은 점차 죽은 물고기가 가득한 어항처럼 탁해져갔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들은 짝을 잃은 배우마냥 거리를 우스꽝스럽게 돌아다녔다. 아니야.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결코 이런게 아니었어. 절망하는 타르라크의 곁에서 크리스텔이 속삭였다.
-쉬어요, 타르라크. 한숨 자고 일어나면 조금 기분이 나을 거에요.
크리스텔. 알고 있어? 당신은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말을 했어.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 해요. 걱정 말아요. 나도 있잖아요.
그리고 내일이 되면 오늘과 같은 말을 하겠지.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기 위해 저는 많은 시간을 연구에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제 이론에 헛점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다른 행동을 취했어야 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낙원의 모든 이가 죽어버리고 말았으니.
여자는 남자의 등 뒤에 쌓인 수많은 시체 더미를 보았다. 그 사이로 익숙한 분홍 머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당신의 행동을 후회해?"
"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자는 자세를 고쳐잡더니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을 희생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
"당신의 희생 덕분에 이 세계에 낙원을 강림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연구가 부족했기에 불완전한 낙원으로 끝나고 말았지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자는 레몬 티를 한 모금 마신 뒤 빙긋이 웃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당신들이 죽인 밀레시안도 아니니까."
"…그녀가 아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죠? 여기는 신의 접근이 완전히 거부된 세계입니다."
"그래, 덕분에 무지막지하게 힘들었어. 폐쇄된 문을 억지로 비틀고 들어오느라 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니까?"
"억지로…? 설마, 당신은…."
"머리 쓰지 마.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걸로도 힘들텐데."
"나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가벼운 말투에 돌아온 대답은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웃음이었다.
"네 뒤에 있는 것을 봐, 타르라크. 그들은 대체 뭘까?"
"당신이… 당신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 누구도 여기가 낙원이라는걸 알지 못했어! 모리안 여신이 억지로 만들어 낸 소울 스트림의 속박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니까 당신의 희생만큼은 반드시 필요했어! 그래서 나는…."
"별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소울 스트림을 파괴했지. 그리고 유통기한 하루뿐인 낙원에 모든 이들을 가둬 천천히 썩어가게 했고. 가엾은 드루이드.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두려운 거지?"
여자는 맑은 얼굴로 웃는다. 수많은 시체를 짊어진 남자는 그제사 공포를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의자 다리는 누군가의 경직된 팔에 걸려 더 이상 뒤로 빠지지 않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알잖아. 나는 밀레시안이야. 별에서부터 찾아온 이방인."
그리고 당신을 죽였지.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친우를 죽였어.
당신의 친우를 죽인 뒤엔 당신이 모르는 어떤 기사들을 죽였지.
그리고 당신이 되살리려한 에린의 모든 것을 파괴했어.
모든 죽음과 파괴에 나의 축복 있으라.
"아니야…. 당신은 이미 이방인이 아닌 이계異界 그 자체다. 게다가 폐쇄된 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왔다는 건…. 역시 당신을 죽인 것은 나의 실수가 아니었어!"
"하하. 아직도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거야? 하긴 그런 점이 당신답지. 지나가버린 일에 얽매여 육체와 정신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자! 그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남자는 밀레시안이 던진 말에 턱 하니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아까 의자 다리에 걸렸던 것은 누구의 팔이지? 그 대답을 실수로라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남자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떠밀린 찻주전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났다.
"…당신은… 대체 왜 이곳으로 온 겁니까."
밀레시안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긴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주러 왔어."
"…축하?"
"그래. 당신도 나처럼 를계세 ?아잖었집뒤"
밀레시안의 말이 이상하게 뒤틀린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군, 당신도 나와 같은 일을 한거야. 같은 일을 하는데 성공했어. 그리고 동시에 실패했겠지. 실패? 실패란 무엇을 말하는 거지? 우리들은 실패따윈 하지 않았어. 우리들의 행위는 성공했어.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기에 비로소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야. 어둠과 시체와 적막으로 가득하며, 캄캄하고 찬란하기 그지없는 이 자리.
"정작 당신 자신이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게 유감이야. 세계의 중심이 된 걸 축하하고 좀 더 재밌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텐데."
밀레시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죽어… 그럼, 여기 있는 나는…?"
"너는 타르라크의 사념이야. 본인의 감정이 제법 살아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그래도 이야기는 잘 들었어. 고마워. 수고했어. 잘 가. 바이바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파도에 닿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형체를 잃어가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여자는 사념 뒷편에 쓰러져있는 진짜 타르라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웃음과 울음을 한꺼번에 짜넣고 뒤섞은 표정으로 죽어있는 그의 파리한 입술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거기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봤지만 딱히 들리는 소리는 없었기에 그녀는 다시 허리를 피고 일어났다. 타르라크의 사념은 이미 사라져 사방에는 암흑과 시체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 절망적인 공기를 깊이 들이마쉰 뒤 천천히 자리에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낙원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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