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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마비노기

[톨비+밀레]기초부터 시작하는 체스 강좌

-톨비밀레가 아니라 톨비+밀레입니다. 톨비+밀레입니다.

-이 글은 체스를 위키로 배운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주밀레 설정/주관적 해석 있음.


-토막 상식 : 체스에서 폰이 상대편 진영 끝까지 도달하면 다른 말로 '승격'하게 되는데, 이때 보통 퀸을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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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입니다."


빠르게 전장을 훑어보던 밀레시안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쳐지나간다. 어느새 숨통을 조여오는 퀸을 피해 킹을 움직이려해도룩이 퇴로를 막고있는 형국이었다. 다른 말로 퀸이나 룩을 잡아내려 해도 위치가 각기 어긋나 있어 이번 차례에 상황을 개선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밀레시안은 자신의 킹을 쓰러뜨려 패배를 인정했다. 이걸로 톨비쉬의 세 번째 승리였다.


"밀레시안님께선 룰이 있는 게임에 약하시군요."

"이런건 익숙하지 않아."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반 기사단의 오랜 관찰에 의하면 그녀는 뒤에서 전략을 꾸미기 보다 전장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살아온 타입이다. 이런 식으로 작은 판 위에서 정해진 목적을 위해 한 수 한 수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게임은 당연히 생소할 터다. 그걸 증명하듯 한 번 말을 옮길 때마다 십 분 이상은 걸리던 밀레시안의 모습을 잠깐 떠올려다보던 톨비쉬는 패인을 분석하려는 듯 게임판을 노려보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밀레시안님께선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밀레시안은 미간을 잠깐 찌푸리는가 싶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것."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만 실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이죠."


톨비쉬는 방금 전 밀레시안이 왕을 죽인 게임판을 살짝 돌려 수직으로 뻗은 전장을 수평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움직이던 검은 진영을 오른편, 톨비쉬가 움직이던 흰색 진영을 왼편에 마주하게 된 밀레시안이 게임판을 내려보다 설명해보라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체스판 위의 룰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각양각색이기에 말의 움직임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밀레시안님 같은 경우는 왕을 노리는데 집중하시느라 방어가 다소 허술하셨죠. 그래서 일부러 공격을 유도하는 식으로 진영을 조정했습니다."


톨비쉬의 손이 전장에서 흰 말을 연거푸 잡아낸 검은 나이트를 두드린다. 밀레시안은 눈을 가늘게 뜨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지."

"나쁘게 생각 말아 주세요. 혹시나 이게 밀레시안님의 치밀한 이중 전략이면 어쩌나 싶어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했습니다."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건너편에 앉아있는 밀레시안의 시선이 따갑다. 톨비쉬는 그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자, 룰을 알고 상대를 예측한다. 그럼 다음은 뭘까요?"

"왕을 사로잡는 것."

"저런. 아닙니다."

"……톨비쉬."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체스 선배로서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


네가 자네에게 이런 식으로 잘난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없다는건 잘 알지 않나.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이고, 그는 말을 이었다.


"상대를 예측한 뒤에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그걸로 상대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왕을 사로 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유동적이고 복잡합니다만 동시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지요."

"그래…. 딱 당신이 즐길만하네."

"음? 혹시 칭찬이신가요?"

"아니."


밀레시안은 짧게 대답하고는 체스판을 원래의 방향대로 되돌렸다. 흑백 전장 위의 체스말들을 거둬들여 차례차례 나열하는 것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한번 더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다. 톨비쉬는 느긋한 마음으로 백색 진영을 재정비한 뒤 그녀가 먼저 말을 움직이기를 기다렸지만, 밀레시안은 좀처럼 손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만약 여기에 체스의 룰을 무시하고 왕을 직접 잡을 수 있는 강력한 말이 있다면 어떨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상대의 패배 선언 이전에 왕을 잡는 것은 반칙패가 됩니다."

"룰이 없다면 실제로는 이기겠지."

"무의미하군요. 그건 이미 체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닌 편이 좋겠지. 자잘한 규칙들을 신경쓰지 않고 강한 자를 직접 쓸 수 있을테니까."


톨비쉬는 조금 늦게, 그녀의 말에 깔린 저의를 알아차렸다. 상대의 마음을 예측하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느닷없이 이런 식으로 응용할 줄이야. 아마 그만큼 마음 속에 묻혀있던 질문이라는 뜻이겠지만…. 그는 잠깐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이 있으면 승리에 집착하는 자는 기꺼이 그 말을 자기 진영에 집어넣겠죠. 하지만 밀레시안님. 저희는 그런 목적으로 당신을 알반 기사단 견습조의 조장으로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밀레시안은 말이 없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곤 각 진영에서 나이트와 비숍을 하나씩 집어들어 게임판 중앙에 마름모 꼴로 세웠다. 


"벨테인 견습조의 조장으로 당신을 추천할 때, 저를 비롯한 조장급의 기사들이 전원 동의한 것은 알고 계십니까?"

"얼추 들어서 알고 있어."

"사실 모두가 처음부터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피네는 처음부터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아벨린과 카즈윈 같은 경우는 꽤 난색을 표했죠. 아무튼 전투에서 힘을 빌리는 것을 넘어 후진 양성의 한 축을 아예 맡기는 셈이니까요. 아벨린은 기사단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했고… 카즈윈은 밀레시안이라는 개인의 힘이 기사단에 영원히 종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좀 더 정확한 발언은 "밀레시안에게 목줄을 채울 셈인가?"지만, 굳이 그 말을 그대로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여러모로 복잡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오롯이 저희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죠. 밀레시안님께서 저희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신 이 상태에서 외부 협력자라는 위치는 여러모로 애매합니다. 자칫하면 밀레시안님을 견제하는 시각이 생길 수도 있지요. 그걸 막기 위해선 당신과 기사단 사이에 공식적인 신뢰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힘들어하시는 밀레시안님을 마냥 혼자 두는 것도 좋지 않을테고요."

"어딜 봐서 힘들어하고 있다는 거야?"

"누군가를 잃은 이후 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거나 눈에 띄게 기력을 잃고, 술을 자주 마시기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자주 마시지는 않아."

"하지만 이전에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으셨지요. 담배도 그렇고요. 그건 이리아 대륙에서는 '영혼의 상처'를 입은 이에게 내려주는 처방이라고들 하지요."


밀레시안은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다 싶더니 한숨을 토하며 침묵해버렸다. 톨비쉬는 그녀의 눈가에 남은 상처를 잠시 바라보다 검은 비숍과 나이트를 흰 진영의 비숍과 나이트로 교체했다. 이제 중앙에는 하얀 기사와 비숍이 각각 한 쌍씩 놓여있었다. 


"뭐, 대략 이런 식으로 조장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때 한 말이 있으니 만약 제가 당신을 승리를 위한 도구처럼 대한다면 분명 다른 세 조장에게서 내통자로 의심받았을 때보다 심한 취급을 받게 될 겁니다."

"그걸 믿으라는거야?"

"음, 그렇게 말씀드릴 수 밖에 없군요, 저희는 당신을 믿고 있으며, 동시에 염려하고 있습니다."

"……."

"타인이 자신을 신뢰하고 걱정한다는 말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렵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보다 큰 대답이었다. 


"뭐, 괜찮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밀레시안씨와 함께할 작정이니까요. 다른 조장들의 마음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테고, 알터나 견습조의 조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믿어주시길."


검은 퀸이 하얀 말 사이에 놓인다. 적에게 사로잡혔다기보다 감싸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든 밀레시안의 시선 끝에서 톨비쉬가 빙긋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