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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마비노기

[카즈밀레카오]하늘에서는 별이 빛나고 빛나고 빛나고

"어이, 카오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냅다 등을 후려칠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덕분에 짐을 정리하던 손에서 떨어진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뒤늦게 흘러나온 한숨이 흐릿한 먼지를 뒤흔들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뭐 하는 짓이야, 이 멍청이가."
"헤헹, 그 정도 기습에 흐트러져서야 앞으로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
"괜한 시비 걸지 마. 분하면 실력을 더 쌓아보던가."

책등으로 떨어진 두어권은 무사하다. 문제는 책배부분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가운데 페이지가 벌어져 버린 몇 권인데… 책장이 찢어지거나 구겨지진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던 카오르는 대량의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디이는 자기가 든 작은 책의 오른쪽 페이지 전체를 뒤로 꺽어버린 채 내용을 읽어보고 있었다. 카오르는 디이가 보이는 위대한 용기에 감복했다는 의미로 무방비한 명치에 힘껏 주먹을 날렸다. 

"크헉!"
"남의 책 구겨먹을 시간 있으면 수련이나 하시지."
"아, 치사한 자식! 나중에 임무 중에 만나면 밤길 조심해라!"
"그러던가."

휘어진 책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굽혀보느라 여념없는 자신의 대답이 불만인지 쳇쳇거리며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린다. 악우라는 관계만 아니었어도 콜로서스를 휘둘러 내쫓아버렸을텐데. 카오르는 지식과 활자의 힘이 디이의 만행을 수습해주길 바라며 두꺼운 양장본 사이에 휘어진 책을 끼워넣고 몇 권의 책을 더 쌓았다. 그동안 왠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디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야, 카오르."
"왜."
"나 너 한테 물어보려는 게 있었는데 말이다."
"근데?"
"까먹었어."
"그럼 나가."
"아 이 매정한 놈아! 좀 기다려 봐! 지금 생각할테니까!"

디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어디서 검이라도 휘두르면서 생각을 정리할 셈인가.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던 카오르는 자기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말없이 문을 등졌다.

"어이, 카오르!"

아무리 그래도 두 번 같은 일을 당할 정도로 얼빠지진 않았다. 카오르는  자신의 등을 후려치기 위해 다가오는 디이의 팔을 제압하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뜨렸다. 청소를 했다고는 하지만 나무바닥에 넘어지는 것은 그리 좋은 경험이 아니다. 당연히 바닥에 짓눌린 디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야, 뭐하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뭐하는 거냐?"
"아니, 아까 여기 들어올때까지는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났으니까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생각나지 않을까 하고…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처박아놓을건데!"
"멍청한 짓 말고 얌전히 있겠다고 하면 풀어주지."

약간의 저항과 발버둥 끝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속박에서 풀리지 마자 구겨진 옷을 털어낸 디이는 카오르에게 얼마간의 볼멘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카오르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매번 단순하게 움직이고 한 가지 생각에 길게 얽매이는 일이 없는 디이가 이렇게까지 뭔가에 구애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카오르는 무관심을 잠깐 거두고 나무의자 하나를 잡아당겨 침대 근처에 앉았다. 방 한쪽에 켜진 촛불이 먼지를 태우며 바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보면, 여기를 경호한지도 얼마나 되었더라. 

깊은 호수에 잠겨들듯 의식이 아랫쪽으로 가라앉으려는 찰나, 디이의 큼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박살냈다.

"아- 모르겠다! 생각 안 나! 포기!"
"남에게 온갖 민폐를 끼쳐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시끄러워! 생각 안나니까 어쩔 수가 없잖아!"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나간 디이였으나, 카오르는 내일이면 이 아발론 게이트를 나간다. 저 녀석은 대체 언제쯤 똑똑해질런지. 저토록 쉽게 잊어버린 걸로 보아하니 그리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을 것이다.

정적 속에서 자잘한 물건들을 챙기던 카오르는 서랍 구석에서 검고 작은 주머니를 발견하고 별 생각없이 끈으로 조인 입구를 풀어보았다. 안에서 톡 튀어나온 것은 뜻밖에도 푸른 표면 위에 하얀 빛줄기가 빛나는 스타 사파이어였다.

기억에 없는 물건이다. 무엇보다 아발론 게이트나 기사단 임무지는 우연으로라도 이런 새끼 손톱만한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석대로라면 슈안에게 수상한 물건이 나왔다며 보고하고 잊어버려야할 테지만, 카오르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푸르게 빛나는 보석을 응시하다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

조장과의 대면식은 빠르게 끝났다. 대면식이라기보다 간략한 통성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알맞을 정도였다.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 임무 하나를 건네받고, 임무가 끝났을 때 어디로 이동할지를 지시해준 조장은 카오르가 무슨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사라졌다. 몸에 걸친 헤루인조의 정식 갑옷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아직 견습조 소속인가 싶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알반 기사단은 기본적으로 비밀주의이긴 하지만 결국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여기저기서 소문이 떠돌아다닌다. 특히 기사단의 전투를 도맡는 4개조의 조장에 이르면 없는 소문까지 만들어지는 형편이었다. 거기서 신빙성 없는 소문을 걸러내보면 헤루인 조의 조장인 카즈윈에게는 방임과 개인주의, 그리고 사상 최악의 사도를 처치한 자라는 단어가 남았다. 

사상 최악의 사도.

첫 임무를 다소 빠듯하게 해결하고 합류지점으로 이동하는 동안, 카오르는 자신이 본 적도 없는 "최악의 사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날 돌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 사도는 강력한 힘으로 온 에린을 거진 파괴시키려 하다 조장급 기사들의 맹공을 받고 겨우 퇴치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조원급 기사 몇몇이 큰 부상을 입었고, 그만 목숨을 잃은 경우도 적지 않다. 아발론 게이트 경비를 담당하던 카오르가 가장 먼저 정식 배속된 것도 헤루인 조의 정식 조원 한 명이 전투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발론 게이트에 남아있는 다른 특별조원들도 시간이 지나면 각자 결원이 생긴 전투조에 투입될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도 하나가 알반 기사단의 정예 전투조 구성원의 절반을 전투불능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나운 사도가 "알반 기사단 최강의 기사"라 불리우는 톨비쉬가 아닌 헤루인 조의 조장에게 처단되었다는 것은 꽤 성대한 입소문이 되었다. 카즈윈이 공적을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수법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그와 얼굴을 마주한 카오르는 카즈윈 본인이 최악의 사도를 쓰러뜨렸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다시 생각을 다듬으려 했을 때는 이미 합류지점이 코 앞이었다. 카오르와 마찬가지로 헤루인조의 갑옷을 입은 다른 조원이 다가오는 그를 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선배를 향해 걸어가며, 카오르는 다소 잡스러운 생각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선배 조원은 카오르가 이미 카즈윈을 만났다는 것을 알고 퍽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입이 임무를 수행하고 이쪽으로 온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설마 조장이 직접 나서서 임무를 지정해줄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드문 일인가요, 카오르의 질문에 선배는 자기 위로는 다들 입단한 지 한 달은 지난 뒤에야 조장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도를 해치운 뒤로 뭔가 심경이 바뀌신건가? 그럼 그 사도도 참 큰일을 해낸 셈이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야. 앞으로 잘해보자고."

믿고 따를 수 있는 분. 
속으로 되뇌여보는 카오르의 혀끝에서 단어가 헛돌았다.

*

아이르리스는 아르후안 조로 배속되었다. 카나와 엘시는 에일레르, 디이는 로간과 함께 엘베인 조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창 인원이 부족한 와중에 정식조로 올라가게 되어 당분간은 바쁘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다들 종종 연락하라는 내용이 묘하게 모범적이라 뒷면을 살펴보니 아니나다를까 사심 가득한 추신이 있었다. 후일 간부급으로 올라가면 후임 양성에 예산을 투자하길 아끼지 말아달라는 건 자신들보다 조장급 기사에게 강조해야 할 말이 아닐까. 

하긴 지금쯤 새로운 인원을 데리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고군분투하고 있을 슈안에게는 상대가 누구든 자기의 애환을 푸는게 중요할 것이다. 카오르는 편지를 접어 보관함에 넣었다. 그 옆쪽에 자신이 놓아둔 검은 주머니가 보였다.

풀어보자 작고 푸른 돌이 손바닥 위로 굴러나왔다. 교차하는 여섯개의 흰 선은 하늘에 떠있던 별 하나를 그대로 여기 담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보석의 빛을 보면 마음이 진정되건만, 정작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보면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카오르는 제 손에 올린 보석을 소중히 쥐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배경에 뚫린 수천수만의 바늘구멍이 건너편의 빛을 통과시키는 것 같아 몸 한쪽이 차가워졌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전?

보석을 쥐고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늘거리는 비단 한 겹이 머릿 속에서 살풋 흔들리다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방을 찾아왔던 디이가 무엇을 물으려다 까먹었다며 온갖 난리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건, 그건 이런 느낌이었나? 무언가 중요한 것이 일렁이는데 손을 뻗어 잡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영영 놓쳐버릴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안달하게 되는….

알반 기사단의 훈련소가 떠오른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동굴이 정말로 무엇을 깨닫게 해줄지는 한없이 불투명했다. 손바닥에 놓인 보석에선 투명한 빛줄기가 묵묵히 여섯 갈래로 빛났다. 카오르는 절제된 동작으로 작은 스타 사파이어를 주머니에 집어넣어 품에 갈무리하고는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훈련소에서는 온갖 적이 나타났다. 그것은 어릴 적의 악몽이기도 했고 어떤 배신이기도 했으며 낯익은 얼굴을 한 기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적을 쓰러뜨리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그가 인식하고 떠올릴 수 있는 걸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인식하고 떠올릴 수 없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이게 대채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격렬한 싸움 때문에 콜로서스의 갑옷은 흠집투성이였고 쉼없이 실을 조종한 손끝은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카오르는 뒤늦게 자신이 사도들의 술수에 걸려들었을 확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보석 자체를 내다버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카오르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움직여 품 속에 넣어두었던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안쪽에 들어있는 작은 보석의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멀리서 무언가가 일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선을 들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카오르가 부수고 파괴한 적들의 파편이 어지러이 널려있을 뿐이었다. 그는 끈적이는 피로를 느끼며 천천히 훈련소를 나왔다. 

그 앞에 카즈윈이 서있었다.

* * *

"밀레시안씨가 저를 부르시다니, 무슨 일이신가요?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거창하게 도와줄 필요는 없어.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사도는 이계신에게 몸을 바친 인간이 모습을 바꾼 형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카즈윈과 밀레시안님의 노력으로 피네라는 예외가 생겼지만, 그 전까지 사도는 다만 물리쳐야 하는 존재였죠."
"그리고 사도를 물리치는 건, 이전까지는 인간이었던 존재를 물리친다는 것과 같은 의미지."
"그렇습니다. 혹여 그걸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신다면…."
"이건 양심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톨비쉬."
"그럼 무엇과 상관있죠?"
"망각."

"예의 그 문이 열린 이후로 선지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사도가 되기 위해 몸을 바친 자들도 늘어났다고 했지. 그런데 왜 이계신을 믿다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이가 없을까?"
"이계신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물 밑에서 활동하니까요. 그 테두리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는 어렵죠." 
"사람들은 소문을 좋아해, 톨비쉬. 신세 한탄도 마찬가지지.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소재가 있다면 스스로 만들어내서라도 떠드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고있을 거야."
"하하, 이계신에 대한 신빙성을 길거리 괴담 수준으로 떨어뜨리느라 기사단에서 얼마나 애쓰는지 모르시나 보군요."
"굳이 떨굴 필요도 없을텐데."

"사도화된 인물은 기사단에 의해 처리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라도 이계신이니 뭐니 수상쩍은 걸 믿던 사람이 어느 날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것 정도는 눈치채겠지. 그렇다면 이계신을 믿다 사라진 이들에 대해 좀 더 대대적인 입소문이 돌거야. 사라진 가족, 친구, 애인을 찾는 이들이 서로 뭉쳐 독자적인 수사단을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어."
"저희가 비밀리에 그런 집단을 마크하여 알반 기사단의 일원으로 키우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나요?"
"그래? 신성력이라는 것도 꽤나 흔해빠졌군."

"서론이 길어졌지만,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이거야. 스스로 이계신에게 몸을 바쳐 사도가 된 이들, 그들은 사도로서 죽는 순간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거지?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도가 되어 사라져도 아무런 소동이 벌어지지 않는거야."
"하하, 이것 참…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밀레시안씨를 벨테인 특별조 조장으로 두길 잘했군요."
"무슨 뜻이야?"

"그건 조장급에게만 허락된 기밀사항일세."
 
"이 지식이 만인에게 알려질 경우 빚어질 수 있는 혼란을 고려하여 조장급 기밀사항으로 지정되었지. 원래라면 조장이 되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자네는 외부인이라 거기까지 알려줄 순 없었네.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 알아차려주니 자네를 추천한 한 사람으로서 몹시 뿌듯하군."
"거참 고맙네."
"축하의 뜻으로 충고를 하나 해주지."
"충고?"
"충고라기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장들이 서로에게서 듣는 부탁이지."

"부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말게."

* * *

"카오르."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눈부심을 피하느라 제 눈 앞에 손그늘을 만든 카오르는 오아시스의 귀퉁이에 발을 담그고 있는 짙은 피부의 여성을 발견하고 숨을 멈췄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오렌지색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 한쪽 눈에 남은 흉터가 선명했다.

"…조장님."

퍼즐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목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카오르는 제 목을 잠시 어루만졌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여전히 카오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장님."
"세 번 말하지 않아도 들려. 무슨 일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라. 시간에 깍여 풍화되고 잘게 흩어진 언어들은 오아시스의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떠올라 주위를 휘감았다. 그 간지러움에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마음이 속절없이 흘러내려 저 오아시스처럼 투명하게 고였지요.)
(나는 그곳에 당신을 밀어 빠뜨려 버리고 싶었어.)
(꿈이라 한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벨테인 특별조에서 조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 솔직히 당신을 그리 믿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장님이 아니셨더라면 겁쟁이인 저는 과거에 얽매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겠지요. 감사합니다. 제게 해주신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혀 끝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의 사슬이 바닷 속 깊은 곳에 잠겨있던 닻처럼 깊게 잠겨있던 감정을 끌어올린다. 카오르는 거의 무아지경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마지막 말을 완성했다.

"가능하다면, 저의 마지막 조장도 당신이었으면 좋겠네요."

순간 상처에 칼을 쑤셔박는 듯한 고통이 가슴을 찢었다. 낮은 흔들림과 함께 삽시간에 어둠에 잠식되어버린 하늘에선 라데카를 중심으로 한 별들이 섬뜩한 곡선을 그렸다. 주변이 너무 어두워 밀레시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녀 대신에 나타난 남자의 주위에서 차가운 오아시스 물이 일렁였다. 발치에서 흔들리는, 투명함과 뒤섞인 붉은 피.

"…조장님."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카오르는 비척거리며 조장을 향해 걸어갔다. 남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자신의 몸에 튄 피를 닦아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허망한 걸음 사이로 작은 무언가가 눈물처럼 툭 떨어진다. 그게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조장이 잊어버리고 가버린 뒤로, 하고 싶었던 말과 함께 되돌려 드리자고 생각했던 작은 주머니. 여섯 줄기의 빛을 품은 푸른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투명하게 빛나고 있으리라. 그와 동시에 남자의 벨트에 매달린 흰 부엉이 브로치가 별빛을 받아 번뜩였다. 장신구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닌 자신의 원래 조장님이 유일하게 자주 사용하던, 작고 동그란 브로치.

"사라졌군. 이 정도가 한계인가?"

덤덤한 말투는 갈갈이 찢긴 살점을 한데 그러모은 것처럼 처참했다. 남자의 발치에서 퍼져나간 핏물이 오아시스를 탐욕스럽게 집어삼켜갔다. 그 한가운데에서, 칼과 번개와 절망으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핏물이 호수를 파먹는 가운데 낮은 신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사상 최악의 사도는…
…헤루인의 조장이…

어디선가 투두둑 떨어진 조각이 비어있던 공간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메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던 카오르는 자리에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빈틈없이 깔린 논리의 길목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카오르는 무언가를 내지르려다, 문득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마 추스릴 수 없는 긴 오열이 후드득 쏟아지는 동안 카즈윈이 움직이는 기척은 없었다. 

-밀레시안.

다만 몸을 잡아찢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이, 카오르!"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남의 등을 후려칠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카오르는 능숙한 동작으로 배후의 습격을 피하고 상대의 정강이를 공격했다. 어지간히도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자세가 쉽게도 무너졌다.

"형편없네. 기초수련부터 다시 해라."
"야! 오랫만에 본 친구끼리 이러기냐!"

저 성질머리는 한 군데도 변한 구석이 없다. 카오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는 근처에 서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오랫만입니다. 로간 씨."
"응, 카오르도 간만이네.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카나와 엘시, 아이르리스와도 인사했어?"
"방금 전에 마쳤습니다. 그쪽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응, 다행이지. 신기한 기분이야. 아발론 게이트를 경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다들 전투조에 들어가 있으니…."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추스르는 로간은 엘베드조의 갑옷이 퍽 어울리는 인상이 되어있다. 자길 무시하지 말라며 옆에서 방방 뛰는 디이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얼마간 아무래도 좋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던 카오르는 화제가 이리저리 뒤섞인 틈을 타 짧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아발론 게이트를 경비하는 동안 조장을 맡았던 사람이 있지 않았던가? 슈안 말고."
"아아, 그런 말은 있었는데 결국 지원이 오지 않았었죠."
"엥? 그랬었어? 난 완전 금시초문이었는데."

디이도 잊어버린건가. 별다른 무게 없이 흘러가는 화제 사이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카오르는 자신의 품에 있는 주머니를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작은 돌의 감촉과 함께 머릿 속에서 흐릿한 실루엣이 되살아났다.

"그나저나 카오르는 묘하게 카즈윈 조장님과 분위기가 닮아가네요."

저 같은 경우는 톨비쉬 조장님의 지시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 짓는 로간에게 악의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카오르는 잠깐 숨을 들이 쉰 다음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적어도 저 빨간 머리 바보보단 잘하고 계십니다."
"야! 지금 나 깔본거지!"

굳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카오르는 지금쯤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문 너머를 응시했다.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죽여버리겠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죽여야하는지도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다만 놓쳐서도 잊어서도 안될 누군가에 대한 것만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져야만 했다. 카오르가 흐느끼며 발버둥치는 동안 낮은 목소리가 침착하게 이어졌다. 

-짧게 말하지.

-그녀는.
-사라지기 전까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어.

-잊고 싶지 않은 거라면 협조해라.

"그나저나 회의는 언제 끝나려나. 벌써 하늘에 별이 보여."
"음, 옛날 생각나네요. 아발론 게이트도 무척 아름다운 별이 뜨는 곳이었지요."

그랬다. 그곳에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별이 있었다. 
감히 사랑하여 끌어내렸다간 허공에서 불타 사라질까봐 손을 뻗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 별이었다.

그리하여 온 하늘에 죽은 별의 묘비가 세워졌다.

카오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품 안의 보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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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밀레] 별이 아름답게 빛난다고 상투적으로 말하지 마 / 저 궁륭의 하늘이 별 하나로 빛나는 것은/세상을 통째로 다 잃어야만 하는 일이어서 그래/너를 잃고 그 세월을/다 지워야만 하는 일이어서 그래(임종_박배엽)

[카즈밀레]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연서를 꽂아 놓을 때까지, 네가 내 옆에 없음을 알고 전율할 때까지. /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허연_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당신을위한시 kr.shindanmaker.com/570317
 
사도가 된 밀레시안을 제 손으로 처형해버리지만 놓아버릴 수 없어서 있는 힘껏 그러쥐는 카즈윈이 보고 싶었습니다.

밀레시안을 짝사랑했지만 자기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말 그대로 실연해버린 카오르가 보고싶었습니다.


그것과 위의 시가 소재로 합쳐져서 탄생했습니다.

보고싶은 것만 쑤셔넣느라 쓸데없이 길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