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지 않은 적은 없다. 따라서 겨울 준비도 매년 해야했다. 양털로 만들어진 포곤한 겨울 이불, 두툼한 재질의 옷과 부드러운 발깔개. 널직한 카펫으로는 거실 바닥을 장식하고, 먼지를 털어낸 난로 옆에는 못 쓰게 된 나무조각이나 장작을 차곡차곡 쌓아둔다. 소파에는 직물로 짠 등받이 장식, 의자에는 푹신한 쿠션을 깔아둔 뒤 창문마다 바람막이용 커튼을 쳐두고 허리를 피면 피부에 닿는 바람이 어느새 서늘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서는 뺨을 스치는 한기가 고향보다 더 하다. 헤마르는 두꺼운 옷 위로 둘둘 말아놓은 목도리에 턱을 푹 파묻곤 연신 숨을 들이내쉬었다. 코까지 뒤덮은 직물 사이에서 희미하게 바다 냄새가 흘러들었다. 거기서 몇 걸음을 더 옮겨보면, 고향의 것과 비슷한 박자로 파도치는 타지의 푸른 빛이 눈에 들어온다. 목도리를 조금 헤집어 얼굴을 드러내면 코끝에 익숙한 소금와 모래의 냄새가 닿았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도 바다는 얼어붙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본래 바다는 얼어붙지 않는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이유를 두고 바닷 속에서 수많은 물고기와 산호들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라며 미소지었고, 기초학교의 선생님은 바다의 성분에 포함된 소금(이보다 더 어려운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때문에 물이 얼지 않는 것이라며 설명해주었다. 시험에도 나왔다. 헤마르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답안지에 썼고, 시원스레 틀렸다.
그치만 그쪽이 더 좋은걸. 틀린 문제를 보고 미간을 좁히고 있던 누나는 그 대답을 듣고 한숨을 쉬며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상과 현실 정도는 구분하면서 살아.
그리고 여기, 이 발밑에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지하 건축물이 있다.
"이래서야 누나도 상상과 현실은 구분하라는 말은 못하겠네~!"
짐짓 큰 소리로 외쳐보자 입 안으로 차가운 소금기가 한 번에 몰려든다. 나중에 통신기 연결이 제대로 된다면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해볼까. 부모님과 할머니에게는 동굴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이야기해줘야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헤마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파도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녁 무렵의 바다는 밤하늘과 바다 끝의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까마득한 건너편에는 레피디움의 해변이 맞닿아 있을테고, 그곳에는 자신 없이 겨울 준비를 끝낸 가족들이 있겠지.
아아, 빨리 통신기를 쓰게 되야 나도 겨울 준비를 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텐데.
이 섬의 바다가 고향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도, 모두와 함께 밭을 만들거나 섬을 탐사했다는 것도….
중얼거림을 대신하듯 바닷바람을 탄 목도리 끝자락이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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