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이라고 한다.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목욕하지 않았단 소리랑 똑같네."
말마따나 청소를 위해 선반에서 일제히 뽑혀나온 책의 무더기는 먼지투성이다. 선반 안쪽에도 미미하게 쌓인 먼지가 층을 이루고 있어 한번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될 성 싶었다. 당연히 수고로운 작업이 될 테지만, 기왕지사 돕는 일이라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걸 택해야 하는 법이다.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으로 가득할 학회(이름만 들어도 엄청나다)에 가봤자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돌아가는 물고기 꼴이 될테지. 그에 비하면 이쪽 작업은 바지런히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끝난다. 좋은 일이었다.
책을 청소하는 법은 연구소 직원이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일단 책 윗등과 배면에 쌓인 먼지를 살살 털어낸다. 그 다음으로 책등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표시된 번호 순서에 맞춰 선반에 다시 배열하면 끝. 물론 손상된 표지를 따로 체크하거나 뒤섞인 번호 순서를 맞추거나 선반 안쪽을 닦아내는 건 별도 작업이다. 이거 불타오르네~ 라며 주어진 청소도구를 손에 들고, 헤르마는 영광의 첫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재채기가 다섯 번 쯤 나온 뒤에야 마스크를 깜빡한걸 깨달았다.
*
마른 천과 깃털펜, 먼지제거용 약품과 책으로 즐비한 작업대(본래 용도는 독서를 위한 책걸상이겠지만 청소시즌에는 이렇게 되는 법이다)를 거쳐간 몇 번째인가의 책을 왼편에 옮기니 그제까지 잠잠하던 근육이 더 이상은 좀이 쑤신다고 아우성을 쳐댄다. 헤르마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해진 근육을 달래기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야 바다에 한 번 뛰어들면 좋겠지만, 일단은 일을 도우러 온 입장인데 일을 내팽개치고 바다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뭣보다 이곳은 그가 나고 자란 섬이 아닌 것이다.
"...후우."
뻐근한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내친 김에 열어둔 창문가로 다가가니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학회는 저곳에서 열린다고 했던가. 어쩐지 안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창 아래로 시선을 내려보면 꽤나 높이 솟아오른 건물 벽이 보인다. 뛰어내리면 당연히 부상이겠지. 당연한 생각을 하는 이마에 살짝,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풍경은 멀다. 그제서야 자신이 섬을 떠나왔다는 감각이 바다 안개처럼 가만히 밀려들었다. 아마 앞으로 당분간 그 풍경을 다시 볼 일은 없겠지. 그리고 그만큼 새로운 풍경들이 눈 앞에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그 시작이 먼지를 털어주길 기다리는 책무더기라는건... 흠, 역시.
"썩 나쁘지 않은데!"
뜬금없이 울려퍼진 목소리에 아래를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든다. 헤마르는 그들을 향해 씩 웃어주고 (분명 그들에겐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잠시 내팽개쳤던 작업대 앞으로 되돌아왔다. 먼지는 풀풀 날리고 책들은 끝이 없고 선반을 닦은 천은 지저분하지만, 안에 고인 공기는 조금쯤 할머니의 방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흔쾌히 손을 놀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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