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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제왕의 별 3기(2017)

[16세]병들어 아파도 웃을 수 있다면


병원 입구에서 우비를 벗으니 한데 모인 물방울이 단숨에 흘러내리며 둥근 웅덩이를 만든다.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몇 번인가 바깥을 향해 우비를 털어내어 빗물을 와르르 떨구고 안으로 들어간 헤마르가 이름을 밝히자, 다소 피곤해 보이는 안색의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하얀 가운의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나이 지긋한 여인의 눈이 우비를 옆에 낀 헤마르를 한 차례 훑었다가 떨어져나갔다. 

"일손을 거들러 와주다니 고맙군. 요 며칠 날씨가 궂어진 탓에 환자들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 자네에게는 자잘한 일들을 맡기게 될테지만, 진료소의 일은 크든 작든 모두 환자들의 몸상태와 직관되네. 부디 실수 없이 일해주게."
"응, 열심히 할게! 몸을 움직이는 일은 잘하는걸."
"대답은 좋군. 그럼 엘가. 이 아이에게 수습용 앞치마를 주고 세탁실로 안내해주게."

의사는 그 말만 남기고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유행병이 돌고 있다고 하니 돌봐야 할 환자도 분명 여럿이겠지. 아니나다를까 앞치마를 걸치고 도착한 세탁실에는 옷과 시트가 여기저기 둥글게 쌓여있어, 언뜻 보면 누가 탑 쌓기 놀이라도 제안했나? 싶을 정도였다. 한창 세탁기를 돌리고 있던 일꾼이 누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다 어깨를 으쓱였다.

"환자들이 입는 환자복에 땀이나 음식물을 흘린 배갯잇, 침대 시트, 더럽혀진 이불 등은 전부 다시 빨아야하거든. 세균이 남지 않게 삶아야 하니 세탁하는 것도 일이고 말야. 일단 세탁과 건조는 기계에 맡기면 되니까, 너는 저쪽에서 말린 세탁물을 다림질하고 개어서 정리하는걸 도와줘."

가리키는 방향에는 방금 건조기에서 꺼낸 듯한 하얀 시트와 환자복이 넓은 작업대 위에 쌓여있다. 듣자하니 건조기가 고장난데다 요 며칠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세탁물이 이래저래 쌓여있었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헤마르는 실컷 옷을 다림질하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자, 다시 갑니다!'라는 말과 함께 눈 앞으로 쏟아지는 세탁물 폭포를 2번이나 목격하고 말았다. 방금 세탁을 마친 덕에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 점과, 다른 편에서 같이 열심히 일하는 일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게 다행이었다.

"어차피 이건 환자들이 입고 덮는거지? 이걸로 건조가 됐으니까 다림질하지 않고 그대로 올려도 괜찮지 않아?"
"안돼. 옷을 새로 갈아입거나 침대를 가는데 천이 구깃구깃해져있으면 사람 마음에도 주름이 져서, 나을 병도 잘 안 낫게 되는걸."
"그런거야? 차라리 식사를 잘 하는 편이 빨리 나을 것 같았는데."
"식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나을 수 있다고 믿는 마음도 중요해. 그러려면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이 깨끗하고 말끔해야지."
"병원도 큰일이구나~"

그런 식의 이야기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세탁기와 건조기가 겨우 가동을 멈추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세탁물이 거짓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었을 땐 이른 오후를 가리키던 시계 바늘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죄다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하도 다리미를 쥐고 움직이느라 뻐근해진 팔을 주무르며 밖으로 빠져나온 헤마르는 비가 그친 하늘을 발견하고 창가에 멈춰섰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그쳤네~ 기왕이면 좀 더 맑으면 좋을텐데."
"날씨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세탁은 좀 어떻던가?"

뒤에서 말을 건 것은 오전에 그를 보았던 나이 든 의사다. 꽤나 바쁜 하루를 보냈을 텐데도 옷은 여전히 단정한 채였다. 헤마르는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곤 별 거 아니었다며 웃었다. 어깨가 좀 뻐근하고 허리가 쑤시긴 하지만, 보람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니까. 의사는 그 말을 듣곤 짧게 웃었다. 
 
"그래, 땡땡이라도 쳤으면 일당은 없었던 걸로 했는데 말이지."
"으와, 무셔."
"안 했다면 되었지.아무튼 수고많았네. 이거 받고 가서 쉬게나."

바스락 소리나는 종이봉투가 손에 들어와, 조심조심 내용을 살펴보면 안에는 잘 구워진 과자가 있다. 할로윈 호박 모양 쿠키 두 조각. 

"오늘이 축제인건 들었나? 기왕 들린 김에 마을에서 이것저것 즐기고 가게.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게 일이라 이 정도밖에 못하지만 말야."
"아하하, 괜찮아! 엄청 맛있어 보이는걸! 여기서 만든거야?"
"인근 마을 빵집에서 여럿 만들어 보내줬지. 소소한 이벤트를 챙기는 것도, 기운을 차리는데 도움이 되거든."

그럼, 살펴가게. 그렇게 말하고 의사는 또 어딘가로 사라진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진료소는 여기저기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발소리나 작은 속삭임, 짧은 기침소리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엷게나마 웃음소리가 섞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헤마르는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우비에는 작은 물방울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