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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어떤 저주에 대해서

"네가 무슨 짐승이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무정희는 여덟 번째 탐정사무소에서 쫓겨났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여름날이었다.

=

잠깐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꾸미지 않은 모습과 침묵하는 태도. 초등학생들이 누군가를 따돌리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정희는 따돌림을 당했다. 우선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는 대신 몰래 손가락질하며 작은 목소리로 (혹은 꼭 들으라는 듯이) 정희를 비웃었다. 아이들이 비웃는 것은 그녀의 허름한 옷이나 너덜너덜한 머리방울이기도 했고 체육시간에 뜀박질을 한 정희가 숨을 거칠게 쉬는 모습이나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정희의 물건이 사라지거나 엉망으로 낙서가 되어있는 일은 그야말로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정희는 아무 반응 없이 찢겨진 교과서를 그대로 읽거나 매직으로 그려진 낙서를 지우개로 지워댔다. 

저 아이는 우리보다 아래에 있다.
 
초등학생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진 것은 어느 여자 아이 A의 지갑. 절친한 친구와 함께 산 지갑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울고 불고 소란을 피우던 A는 때마침 화장실을 갔다 돌아온 정희를 보곤 도끼눈을 뜨고 빽 소리질렀다.

"네가 내 지갑 훔쳐갔지? 내가 다 알아!"

정희는 지저분한데다 가난하니까 자신의 예쁘고 비싸보이는 지갑을 탐냈음에 틀림없다는게 A의 논리였다. 처음에는 얼떨떨하게 정희와 A를 번갈아보던 반 아이들도 서서히 그 논리에 감화되어 교실 안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를 비난하는 말로 가득 찼다. 우악스런 누군가에 의해 작은 가방이 뒤집혀 안에 있던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 뒤에도 지갑이 발견되지 않자 지갑이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리라는 추측이 낙엽처럼 쏟아졌다. 누군가는 무정희가 지갑을 담벼락 너머로 버리는 걸 자신이 직접 봤다며 복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A는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며 정희의 뺨을 때렸다. 

"당장 내 지갑 찾아와 이 거지야!!"

정희는 A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까이에 있던 의자를 꺼내 들어 예쁘장하게 묶인 머리를 후려쳤다. 빡,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울리던 A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아이들이 얼이 나가있는 동안 정희는 의자를 몇 번이고 휘둘러 쓰러진 A의 몸를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잠시 쉬고 세 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교무실로 뛰어갔고 구급차가 신속히 학교로 달려왔다. 왠 지저분한 아이가 사랑스런 딸아이에게 의자를 휘둘렀다는 소식을 들은 A의 부모는 당장 노발대발하여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의 부모를 데려오라고 난리를 피웠다. 전학은 물론이요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받아내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리하여 무정희의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 결과 A가 전학을 가게 되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자질구레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무정희의 아버지가 폭력을 통해 그를 찍어누를 생각이었던 A의 부모님을 도리어 협박하고, 완고하게 닫혀있던 교장실의 창문을 모조리 깨부수다시피하여 얻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 결과를 두고 무정희의 아버지는 "어설픈 폭력에는 감히 대꾸도 못할 정도로 더 큰 폭력을 휘두르면 되는 법"이라며 낄낄 웃었다. 소녀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

정희의 집에서는 빈 술병이나 파리채, 혹은 아버지의 맨손 맨발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전설의 무기처럼 태연하게 휘둘러졌다. 정희도 그 태도를 본받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발길질을 하기에 그녀는 너무 작고 약했다. 부친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은 자연스레 2살 어린 남동생에게 흘러들었고 어머니는 정희가 동생을 때리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기겁한 얼굴로 동생을 제 등 뒤로 숨겼다. 어머니의 등에 숨어본 기억이 없는 정희는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끝내 집을 나갔다. 정희를 남겨두고, 남동생만의 손을 잡은 채였다. 이윽고 다른 어머니가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떠나갔다. 또 다른 어머니가 집을 찾아왔다. 그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바뀐 횟수가 손 가락으로 셀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을 무렵, 정희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헤아리는 것을 포기했다. 어떤 어머니는 그녀를 몹시 귀찮아하며 썩은 빵을 던져주었다. 어떤 어머니는 그녀가 뜨거운 난로를 짚고도 아무 소리도 안 내는 것을 보자 몹시 신기해하며 정희의 목덜미를 몰래 담뱃불로 건드렸다. 소녀는 재떨이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며칠이 지난 뒤 그녀는 집안의 현금을 들고 도망쳤다. 말없이 집을 나서 삼일 뒤에야 돌아온 아버지의 몸에서는 묘한 쇳내가 났다. 그런 나날이었다.

무정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학교에는 희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소 특이한 성격의 음악선생이 있었다. 그녀는 정희의 이름이 자신과 대칭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모두가 슬금슬금 기피하던 소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겨우 그 정도 우연이었다면 평소처럼 무시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몰래 속삭인 어떤 단어는 무정희의 발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있지, 선생님은 사실 '탐정'이란다! 그러니까 '희정 탐정'이 되는 거지! 끝부분이 둘 다 '정'으로 끝나는거, 왠지 재밌지 않니?"

무정희의 아버지 또한 탐정이었다. 하지만 희정은 아버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약혼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거나 귀 뒤로 머리를 넘겼고 이따금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은 나무 바닥 위를 바쁘게 총총거리거나 금색 페달을 지긋이 밟을 때를 제외하면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머리채를 휘어잡는 손이나 배를 걷어차는 발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따금 희정이 음악에 맞춰 노래할 때면 정희는 까닭없이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몰래 심호흡을 했다. 감히 아름답다 말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희정은 추리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자살했다.

정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다. 있었으나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잘한 일...은 아니다. 결국 희정은 죽어버렸다. 스무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만약 그때 문을 부쉈더라며, 차라리 뼈를 부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자신이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온갖 가정에 시달리던 무정희는 사고의 방향을 바꿔 희정이 자살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유는 꽤나 명료했다. 그녀는 진범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살인사건이 있었다. 증거와 증인이 있었지만 피해자의 두 아들 중 누가 진범인지는 단정짓기 어려웠다. 희정은 오랜 생각 끝에 증언에 소극적이던 형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진짜 범인은 수사에 적극 협조했던 동생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나왔을 때 형은 이미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뒤였다. 동생은 재빠르게 도피하여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누명을 쓴 이의 가족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와 그녀의 약혼자를 습격했다. 약혼자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했으며, 희정은 그토록 사랑스럽던 약지를 잃고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자살했다.

탐정이 진실을 놓치고 만 결과였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무정희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

18살 여름 무렵의 일이다.

어느 살인사건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 사건을 맡았고, 범인을 찾아냈다. 여기까지는 평소대로의 사건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정희가 우연히 아버지의 탐정 수첩을 열어보았다는 것이다. 탐정의 사건 수첩에는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가 해결해 온 사건 파일과 인물 파일이 차례대로 정리되어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해결한 가장 최근의 사건을 읽어보던 정희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순되는 증언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증거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자국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지목된 자는 자신의 범행을 인정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소지품에서 흉기와 피묻은 손수건이 나왔다고 해도 이건 분명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마침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 사람이 범인이야? 아버지는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내가 범인이라고 결정했으니까. 그녀는 그럴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관자놀이에 빈 술병이 찍혔다. 탐정도 뭣도 아닌 네가 뭘 안다고 쫑알거려. 이때까지 누가 널 먹여주고 입혀줬는데. 돈을 벌어오면 감사하다고 절을 못할 망정 아버지를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 이 빌어먹을 년.

그러나 정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사건을 끝낸 아버지가 들고 돌아왔던 거대한 가방에대해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는 서류 가방에 담겨, 기묘할 정도로 차곡차곡 정리된 돈다발이 들어있던 가방. 아버지는 그것이 이번의 '보수'라고 했지만.

"...알 게 뭐야."

허구헌날 술을 마시는 아버지 덕분에 빈 병 따위는 집안에 얼마든지 굴러다녔다. 정희는 아버지가 팔을 휘두르는 방향을 계산해 마구잡이로 병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맞닿은 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지고 흩날리는 파편이 그녀의 뺨을 할퀴며 붉은 선을 남겼다. 눈을 껌벅이던 아버지가 웃는다. 그녀는 박살난 병목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탐정인 주제에.
그 사람과 같은 탐정인 주제에.

"했으면, 네가 뭐 어쩔건데? 죽여보게? 어?"

아버지에게서는 술에 취한 냄새가 난다. 무정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기둥 아랫부분이 부서져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던 긴 옷걸이를 집어들었다.

휘두르고, 부러지고, 망가지는 소리가 하루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

"전신 복합골절입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의사는 차트를 끄적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무정희는 붕대가 감긴 팔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붕대는 팔 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감겨져있었고 깨진 병에 베인 상처와 앉은뱅이 식탁에 두들겨맞아 달라붙은 멍자국도 다 그 아래에 숨어있었다. 다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가 말을 이었다.

"술에 취한 성인 남성일수록 눈에 보이는게 없죠. 근데 도망치기는 커녕 사지를 다 부러뜨려놓다니."
"그렇게 해야했어. 안 그럼 말을 안했을거야."
"뭘요?"
"진실을."

하얀 가운을 걸친 어깨가 위아래로 으쓱인다. 진실이라, 좋은 말이긴 한데 일단 몸부터 챙기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 의사는 자리를 떠났다. 정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추장스런 링거를 매단 채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몸 전체에 붕대와 깁스를 휘감은 아버지가 그녀를 발견하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정희는 아무 말 않고 깁스된 아버지의 다리를 후려쳤다. 고통스런 신음이 터지나 싶더니 이내 탁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래, 이제 진실을 아니까 뿌듯하냐? 네가 좀 뭐가 된 것 같아? 어디서 어줍잖은 탐정 흉내나 내고..." "나는."
"나는, 당신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거야."

말허리를 툭 끊고 이어진 말에 아버지의 말이 멈춘다. 정희는 그의 눈을 쏘아보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는 절대로 당신같은 사람은 되지 않아. 아버지의 시선이 그녀의 녹색 눈을 마주했다.

"나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게 무슨 의미냐?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당신처럼 진실을 덮어버리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뜻이야."
"진실... 진실이라. 듣기에는 참 좋지. 근데 그거 아냐. 진상이니 진실이니 많이들 지껄이지만 결국 적당히 정보를 쳐내고 남이 이건 이렇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그대로 믿는 놈이 대부분이라는 거.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멍청한 소리야.   애초에 진실따위가 무슨 소용인데?"
"...당신이."

당신이 뭘 알아.

정희는 붕대가 감긴 아버지의 다리를 후려쳤다. 짧은 절규와 함께 딱딱한 석고붕대에 쩍하니 금이 갔다. 그대로 저 안의 다리도 부서지면 좋을텐데. 정희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욕을 쏟아내던 그녀의 아버지가 눈을 번득였다.

"설마해서 묻는거다만, 너 이걸로 네가 무슨 탐정이라도 된 것 마냥 생각하고 있냐?"

정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청한 계집애. 잘해봤자 나랑 비슷한 수준밖에 못할 주제에 어디서 바람만 들었구만. ...해보고 싶으면 한번 해봐. 하지만 스물 다섯쯤엔 죽어야 할거다. 그때쯤이면 너는 내가 되어있을테니까."

들을 가치도 없었다. 병실을 나오는 정희의 등 뒤에서 아버지의 탁한 웃음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