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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어떤 역겨움에 대해서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거라."

쑥 내밀어진 직사각형의 포장지에는 잘 읽을 수 없는 영어가 가득 써져 있다. 손으로 받아든 소녀가 한참을 더듬어도 뜯는 부분을 찾지 못하고 바닥에 포장지를 내리치려는 찰나 가위날이 포장지의 가장 윗 부분을 자르고 지나갔다. 빠끔히 열린 포장지 사이로 꽤 진한 단내가 흘러나온다. 소녀는 포장지 사이로 드러난 갈색 판 초콜릿의 귀퉁이를 조금씩 베어물었다.

"하여간 누굴 닮았는지..."

소녀가 자주 듣는 푸념이었다. 신경쓰지 않고 입 안에 있는 초콜릿을 녹여 먹는 동안 중년의 여성이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녀의 아들이 맨 가방도 둥그스름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소녀는 두툼한 옷을 껴입고 둥근 가방을 맨 소년을 바라보며 발로 뻥 차는 상상을 했다. 소년은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갈 것이다. 소년은 소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잠깐 그녀를 쳐다보다 도로 고개를 숙였다. 딱딱하던 초콜릿은 어느새 입 안에서 거의 녹아있었다. 소녀는 한번 더 귀퉁이를 깨물었다. 옷을 두툼하게 입은 여인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 우왕좌왕하는 소년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초콜릿은 꽤 단단하게 굳어있어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루 만에 다 먹지 마라. 이 썩으니까."

그런가. 소녀는 멍하니 생각하며 초콜릿을 이로 깨물었다. 뿌득, 하고 뭔가가 금이 가며 혀 위로 떨어졌다. 집 잘 지키고 있으면, 다음에는 네가 가고싶은데도 한 번 갈거다. 소년의 손을 꽉 붙잡은 여성은 소녀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웅얼거렸다. 그 와중에 뒤를 돌아본 소년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다가 끝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갔다올게."
"다녀오세요."

철문은 철컹이며 닫혔고 소녀는 초콜릿을 입에 문 채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드러누웠다. 입 안은 달다. 집은 비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약이 다 떨어졌는지 초침이 같은 위치에서 덜걱거렸다. 놀이동산이란건 대체 뭘까. 소녀는 들어도 아무 흥미도 일지 않았던 장소의 이름을 입으로 몇 번 중얼거려보다 잘게 덩어리진 초콜릿을 삼켰다. 

초콜릿은 이틀째 되던 아침에 동이 났다. 집안을 뒤져 동전 몇 개를 찾았다. 그걸로 작은 초콜릿을 두 개 정도 사서 반나절을 버텼다. 그 이후로는 오로지 수돗물만 마시는 나날이었다. 차가운 물로 목과 위장을 적신 채 바닥에 드러누운 소녀는 그들이 간 거기가 이렇게나 먼 곳이어서 그렇게나 많은 짐을 가져간걸까 생각했다. 현기증은 몸 전체에서 울렁거렸다. 집안은 차갑다. 고장난 시계는 언제까지고 똑같은 시간을 가리켰다. 이따금 햇빛이 소녀의 발치에 닿기도 했다. 소녀는 오로지 눈을 감고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포장지는 소녀의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일주일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소리가 들렸다.

찬바람을 몰고 들어온 남자는 죽은 것처럼 웅크린 소녀를 신발도 벗지 않은 발로 홱 뒤집어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잠결에 몸이 뒤집힌 소녀는 심한 어지럼증에 구역질을 느끼며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부부가 쓰는 방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안을 몇 번 휘휘 돌아보더니 욕지거리를 토하며 묘하게 구석구석이 비어있는 집안 여기저기를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불안한 소리가 집안을 메웠다. 마침내 원래 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혀를 찼다. 이 년이 아주 작정을 하고 쏙쏙 빼갔구만.

"근데 이건 왜 남아있는거야?"
 
소녀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간 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몸은 무거운 듯 가벼워 어지러웠다. 찬 바람을 휘감은 남자는 그제사 제 발치에 떨어진 편지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었다. 저기에 뭐가 적혀있길래 저러시는 걸까. 소녀가 생각하는 사이 소녀에게로 다가온 남자가 편지를 그녀의 얼굴로 떨어뜨렸다. 

"너 글 읽을 줄 알지?"

물론 올해로 열 두살이 되는 소녀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았고 뜻을 이해할 줄 알았다. 그래서 노트를 찢어쓴 그 편지에 어떤 말이 쓰여져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요] 
[어쩌면 아이가 먼저 죽어버릴지도 모르죠]
[부디 우릴 찾지 말아주세요.] 
[이 아이는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그 아이는 차라리 당신과 있는 편이 낫겠죠]
[당신들은 서로 닮았으니까요]
[그럼 잘있어요. 내 사랑하는 사람]

소녀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입 안에서 문득 진득한 단내가 되살아났다. 남자가 그런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버리고 가는 줄도 모르고 먹어댄걸 보면, 어지간히도 맛있었나보지?"

주위의 포장지가 남자의 발에 밟힌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텅 빈 등이 신발에 툭 걷어차였다. 소녀는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듯이 집을 나갔다. 시야는 어지럽고 현관문 너머 마당은 넓고 휑했다. 한때 그곳에 서있던 여성과, 그녀와 단단히 손을 잡고 철문을 나가던 소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찬 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토했다. 아무것도 녹지 않은 위액이 혀를 타고 점점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