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뮤니티 로그/탐정의 속삭임(2014)

전갈의 독백03.

피아노를 누르는 손을 본다. 하얗고 까만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부드러운 살구색이다. 그 네번째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느다란 반지가 있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것, 바람이 불 때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에서 은은히 빛나는 것. 약혼반지야, 하고 당신은 웃는다.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저런 것을 가지고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건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른다. 얼마 되지도 않아보이는 건반은 이상할 정도로 넓어서 자주 길을 잃는다. 내 손가락 아래에서 엉망진창이 된 음악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당신이 말한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박자에 맞춰서. 조금씩 해보자. 피아노 위에 올려진 메트로놈이 천천히 흔들린다. 조금 숨을 들이쉬고, 건반을 누른다.

툭.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건반을 한 번 더 누른다.

툭.

메트로놈이 혼자 딸깍거렸다. 규칙적인 소음이 귀를 파고든다. 피아노 건반을 꾹 누르고 있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당신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안다. 어떤 상태인지도 안다. 잊을 수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
당신이.

....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꿈인걸 알고 있었다. 손을 더듬어 안경을 찾으려다 그만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입술에 찢어진 자국이 있어 물로 대충 씻고 빈 속으로 오랫동안 토했다.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커뮤니티 로그 > 탐정의 속삭임(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에 대해서.  (0) 2017.12.11
전갈의 독백04  (0) 2017.12.11
(빽빽해서숨이쉬어지지않는다)  (0) 2017.12.11
전갈의 독백02.  (0) 2017.12.11
전갈의 독백01  (0) 2017.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