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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2차 + 자캐

[혈계전선]신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악마 또한 망설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워치가 그 아르바이트 광고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때까지 일하던 카페가 아리귤라의 몬스터 트럭 파편에 의해 박살나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고, 만약을 위해 확보해두었던 몇 장의 아르바이트 공고도 모두 자리가 차거나 일자리가 파괴되어 채용할 수 없다는 상황. 가까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구인 잡지를 구해 몇 페이지를 넘기며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자리에 닥치는대로 전화를 걸어보아도 누가 작정하고 짠 것 마냥 신통찮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일단 모아놓은 돈이 있어 당장 생활이 곤란하지는 않지만 미셸라에게 송금해야 하는 몫을 생각한다면 무슨 일자리라도 빨리 손에 넣는 편이 좋다. 초조한 마음에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계인이 두고 간 다른 종류의 구인 잡지를 발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 페이지를 넘겼다.

[이계인 대상의 식당 재료 구함]...패스. 
[언제든지 출동가능한 배달원 구함. 각종 탈 것 면허증 소유자 우대. 특히 경찰에 신변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자 환영.] 위험하다. 넘기자. 
[사무소에서 성실히 일할 재원 구함. 적당한 살집과 잔병 없는 깨끗한 신체 환영!] 갔다간 틀림없이 죽는다. 
[혈액 공급 아르바이트 구함. 희귀 혈액 특히 환영. 사망보험금 지급.] 정말 멀쩡한 일자리가 없구나!
[맹인을 대신해 책 읽는 아르바이트 구함.] 정말이지 하나같이 수상하기 짝이…….

……잠깐.
레오나르도는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눈을 휘어잡은 한 광고를 찬찬히 읽었다.

[세부조건 : 발음 정확할 것. 목소리 뚜렷할 것. 이상의 사항은 고용측에서 판단하오니 지원희망자는 간단한 이력서와 책을 읽는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동봉하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거라면 괜찮으려나."

수상쩍어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면접 대신에 이력서와 테이프만 소포로 보내면 된다는 점이 불안감을 덜어준다. 물론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개인정보나 목소리를 빼돌릴 가능성도 없잖아 있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염두에 두고 까다롭게 굴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다. 레오나르도는 곧장 펜을 들어 해당 광고에 몇 번이고 동그라미를 쳐놓은 다음 잡지를 껴안고 가게를 나왔다.

=

[합격. 앞으로 이 주 안에 동봉된 도서를 읽고 녹음한 뒤 카세트 테이프와 도서를 동일한 주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음 시간은 30분. 보수는 한 권당 50달러로 계산됩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정말 이 정도의 일로 50달러를 주는 걸까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틈틈이 책을 읽어 카세트 테이프와 함께 소포를 보낸 레오나르도는 정확히 이틀 뒤 우편으로 전달된 짤막한 편지와 빳빳한 지폐를 받아들고 전율했다. 일일이 목소리를 녹음하는 수고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후한 보수를 이렇게 턱 내놓는걸 보면 이 고용주 -소포를 보내는 주소에는 거주자 귀하라고만 쓰여있을 뿐이다 - 는 틀림없이 호탕한 성격의 부자이리라. 거기다 동봉된 편지에는 근시일 내에 또 다른 책을 소포로 보내겠다고도 적혀있었다. 틈틈이 돈을 벌어 매달 미셸라에게 돈을 송금해야하는 처지의 레오나르도로서는 뜻밖의 행운이 굴러들어온 셈이다. 

두번째 소포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도착했다. 이번에 도착한 책 또한 이전과 비슷한 두께의 소설이었다. 조건 또한 이전과 동일했다. 최대 녹음시간 30분. 한 권당 보수 50 달러. 편지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레오나르도는 몇 번 목을 가다듬은 뒤 책의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이 책에 걸린 보수를 생각하니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와 돈의 교환은 그 뒤로도 몇 번이고 이어졌다. 무엇보다 보수에 힘이 들어간 레오나르도가 꾸준히 책을 읽은 탓이 컸다. 어찌 보면 노골적이기까지 한 행동이었지만 정체불명의 고용주가 거기에 대해 지적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레오나르도가 책을 다 읽어보내면 고용주 측에서 우편으로 돈을 부치고, 며칠 뒤에 새로운 책이 도착하면 그것을 읽어 보내는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우편으로 전달된 편지봉투를 열어본 레오나르도는 안에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인 편지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이전의 녹음에 뭔가 하자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고용주가 마음을 바꿔먹어 그와의 계약 -이라고 하기에도 민망스럽지만- 을 파기하려는 것일까. 혼란에 빠진 채 봉투에 담긴 편지를 열어봐도 거기에는 이전까지와 똑같이 그의 노력을 칭찬하는 문구와 함께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는 말이 적혀있을 뿐이다. 그저 50달러의 보수만이 감쪽같이 증발한 상황에서 황망히 정신을 팔고 있던 레오나르도는 이내 편지 봉투를 뒤집었다. 별다른 연락처가 없는 흰 봉투에는 레오나르도가 살고있는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고급주택가의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
혹은 다음 책이 왔지만 보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이 주소로 찾아가보자.
찾아가서, 실례지만 보수가 동봉되어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보자.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자기자신을 도닥였다.

=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눈 앞에 우뚝 선 아치형 대문을 올려다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이 살고있는 단칸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감히 비교하려는 것 자체가 실례라고 느껴질 정도로 크고 우아한 저택은 붉은 벽돌담과 까만 철문을 두른 채 침묵하고 있었다. 감히 인터폰을 누르기가 황송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저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꿎은 벽돌담만 노려보며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피던 레오나르도는 이내 자기 자신에게 기합을 넣듯이 양뺨을 찰싹 치고는 힘차게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무기질적인 연결음이 몇 번인가 이어지다, 사라졌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레오나르도 워치라고 합니다!"
<누구시라구요?>
"레오나르도 워치요! 아, 물론 모르실 수도 있지만…."
<잡상인은 출입금지입니다.>

인터폰이 뚝 끊어졌다.
레오나르도는 침묵하는 인터폰을 응시하다 다시 한번 버튼을 눌렀다.
힘차게, 꾸욱.

<누구시죠?>
"여기 살고계신 분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까 그분이시군요.>
"네! 저기, 죄송한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좀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뭔가요?>
"그러니까…."

마른 입술이 거슬린다. 레오나르도는 재빨리 입술을 축이려했지만 이미 말라붙은 혓바닥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 보수 문제… 때문에 왔습니다."
<……….>
"지난번에 책을 읽은 보수가 오지 않은 채로 다음 책이 와서요. 중간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게 아닐까 싶어서…."
<잠깐 기다리세요.>

인터폰 너머의 소리가 두터운 천에 가려진 것처럼 멀어지고 그 틈새로 누군가가 대화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레오나르도는 괜시리 자신의 고글을 만지작거리며 지직거리는 소리 너머의 대화가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기도했다. 여기서 쫓겨나버려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되도록이면 자신의 상황을 찬찬히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다. 더불어 도착하지 않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과연 상황이 그렇게 형편좋게 돌아가 줄까?

<들어오시죠.>

……돌아가주었다. 철컹이는 기계음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여는 대문 앞에서, 레오나르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굳어있던 어깨를 풀었다. 펼쳐진 대문 안쪽에는 펼쳐진 갖가지 꽃과 푸른 초목이 가득한 정원에서는 여기가 헬사롬즈 롯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한 봄의 향기가 그득했다. 평소같았더라면 감탄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기분을 풀기가 영 어렵다. 그저 잰걸음으로 정원을 지나 저택의 앞으로 걸어간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딱 문 앞에 도착할 무렵에 안에서 걸어나온 메이드가 아무 말 없이 안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겠지만, 내부는 넓었다. 그리고 텅 비어있었다. 매끈하게 닦인 바닥을 걸을 때마다 레오나르도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질 정도였다. 그 흔한 조각상이나 그림, 심지어는 카펫 한 장 덮여있지 않은 휑한 저택을 가로지르고 계단을 올라 어느 고풍스런 문앞에 당도한 메이드는 한없이 절제된 동작으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뜻밖에도 젊다.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인을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척 보기에도 단단해보이는 체구의 여성은 짙은 남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동안, 레오나르드를 서재로 안내한 메이드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둥근 서재에 갈 곳 없는 침묵만이 한껏 부풀어올랐다.

"…저어, 저는-."
"레오나르도 워치. 맞죠?"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는 제3자의 평온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2층 언저리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레오나르도는 아찔할 정도로 높은 천장 아래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이쪽으로 내려오는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인을 보았다.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려 곡선을 그리는 청록빛 머리카락에, 걷는 모습으로 보아 다리가 불편한 것도 아닐텐데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닥을 짚는 검은 지팡이. 더불어 양쪽 눈을 감은 모습을 본다면 그녀가 구인광고에서 언급되었던 '맹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어서와요.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
"……."

검은 드레스 차림의 여성과 고글을 착용한 소년. 고개가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흐르다가, 여성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붙잡아."

방금 전까지의 밝은 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돌변한 목소리에 굳은 몸을 움직여 재빨리 문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 한 레오나르도였지만, 어느샌가 그의 뒤를 차지한 남색 정장의 여성은 그의 양팔을 족쇄처럼 꽉 붙잡은 채 그의 도피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수단을 가릴 여유는 없다. 굳게 붙들린 팔을 풀기 위해 그녀의 시야에 간섭해 안구를 마구 뒤흔들어버린 뒤, 자신을 붙잡은 팔의 힘이 아주 잠깐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치려던 레오나르도가 채 세 발짝을 떼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려퍼졌다.

"에트루리아식 혈투술. ㅡ무장 「레티아리」."

동시에 묵직한 피의 그물이 온몸을 휘감는다. 뒤늦게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벗어나려해도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피의 그물이 사지를 속박한 뒤였다. 초조한 마음에 검은 드레스의 여인을 향해 시야 셔플을 시도하는 레오나르도였지만, 감은 눈이 무색하게도 계단 중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녀는 <신들의 의안>에 의한 간섭에도 그리 괘념치 않는 모습이었다.

"헛수고에요. 레오나르도 워치… 아니, <신들의 의안> 보유자 분."

이제는 돌로 된 삼지창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검은 지팡이가 눈 앞에서 멈춰선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고개를 드는 레오나르도의 눈 앞에서,  검붉은 진흙처럼 부글거리는 오라를 눈꺼풀 안쪽에서부터 뚝뚝 흘리고 있는 금발의 맹인이 빙긋이 미소지었다.

"늦게나마 자기소개를 하죠. 저는 에반젤린 L. 스포르치아. 작은 신문사의 총 편집장을 맡고있는 몸이자… <악마의 사안>을 가진 사람이랍니다."

=

"헬사렘즈 롯에 <신들의 의안>이 흘러들어왔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습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인간사란 참 신비하군요."

티 세트와 다과가 놓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에반젤린의 즐거워보이는 어조와 달리, 레오나르도는 그저 굳건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풀 수 없는 그물에 포박당한 레오나르도의 몸을 솜씨 좋게 의자에 앉힌 남색 정장의 여성이 두 사람의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는 가만히 물러난다. 에반젤린은 맹인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잔을 들고는 가볍게 한 모금을 마셨다.

"덕분에 책은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러신가요."
"그러고보니, 여기에는 보수 문제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네에… 일전에 보수가 없이 편지만 들어있는 봉투가 와서, 그걸 말씀드리려고…."
"벨라,"

에반젤린이 손가락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남색 정장의 여성이 고개를 든다. 그대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던 에반젤린은, 이내 손가락을 내리고 한 모금 마셨던 찻잔을 다시 쥐었다. 

"거기서 잠시 대기하세요."
"네."
"……,"

얼핏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레오나르도의 몸을 묶은 구속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돌처럼 응고된 피에 묶인 몸을 꿈지럭거리며 기회를 노리던 레오나르도는 찻잔에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에반젤린의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물론 그녀는 눈을 뜨고있지 않다. 다만 그 너머로 보이는 무언가 -그녀는 <악마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씨."
"…네."
"저와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어요?"
"……거래?"
"네. 저는… 어떻게 해서든 꼭 알아내야 할 어느 인간에 대한 정보가 있거든요. 공교롭게도 이 <눈>은 무언가를 수색하는 데에는 알맞지 않아서 말이죠, 찾는데 좀 애를 먹고있어요. 당신이 도와준다면 수월하게 끝날 것 같네요."
"……누구를 찾으시려는 건데요?"

레오나르도가 조심조심 던진 질문에 에반젤린의 미소가 깊어졌다.

"스티븐 A. 스타페이즈."
"……."
"이 헬사롬즈 롯에 살고있는 남자이자… 제 가족을 몰살시킨 원수입니다." 

그녀의 눈꺼풀 너머에 가득한 진흙이 까맣고 붉게 부글거린다. <신들의 의안>의 힘에 의해 순간적으로 그 <사안>의 구조를 파악한 레오나르도는 순식간에 치솟는 토기를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반적인 안구와 달리 곤충의 겹눈과 같은 구조를 가진 사안은 각각의 동공이 개별적인 시야를 가지고 붉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썩은 살점 속에서 버글거리는 구더기 같은 것. 눈꺼풀을 사이에 두고 그런 것이 꽉 들어찬 <눈>으로 레오나르도를 응시하며, 그녀는 말을 잇는다.

"물론 그냥 해달라고는 하지 않아요. 보수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단 하나뿐인 스포르치아의 명예를 걸고 오늘 이렇게 서로를 만나게 된 기념비적인 50달러는 물론,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드리지요. 당신은 그저, 스티븐 A. 스타페이즈에 대한 수색을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거절한다면요?"

에반젤린은 아무 말 없이 석화된 단검을 내리 꽂았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티 테이블에 새카만 균열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그 눈을 산 채로 뽑아 제가 쓰겠습니다."
"……."
"당신은 딱히 몸을 보호할 수단도 없는 일반인.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편이 좋을거에요." 

분하지만, 정확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신들의 의안>이 지닌 힘을 제외한다면 레오나르도 워치라는 한 개인이 지닌 힘은 이곳 헬사롬즈 롯에서는 극히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도 한달에 절반은 병원 신세를 지면서 보내고 있는 실정인데다, 몸을 묶은 피 그물 하나 제대로 부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의 이 여자 -에반젤린에게 협조한다는 것도 위험하다. 그녀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는 일단 둘째치더라도 협조할 경우 자신이 알고있는 스티븐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기는 꼴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녀에게 <라이브라>의 정보를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헬사렘즈 롯의 균형을 지키지 위한 조직 <라이브라>는 멤버와 관련된 정보라면 무엇이든지 터무니 없이 높은 값에 거래될 정도로 여기저기서 많은 원한을 산 상태다. 그녀를 도와준답시고 덥썩 제안을 받아들였다간 레오나르도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될 것이다. 다행히 레오나르도와 <라이브라>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해야하지!!)

편집왕 아리귤라 때에는 소닉 덕분에 외부와 내부의 연결이 가능했지만 지금 소닉은 자신과 함께 피그물에 묶여있고 (꼼꼼하기도 하다) 애시당초 부족한 보수의 이야기를 하러 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일도 대강 정리해두었다. 당장 무언가 큰 사고라도 하나 터지지 않는 이상에야, <라이브라> 측에서 급하게 레오를 찾을 일은 없으리라.

(일단 시간을 좀 끌어보자…)

"저기,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어려운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다란 삼지창이 레오나르도의 목을 겨눈다. 싸늘한 돌의 한기는 덤이었다. 레오나르도가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꿈틀거리는 눈꺼풀을 연 에반젤린의 겹눈이 빼곡하게 드러났다. 검고 붉고 한없이 불길한 시선에 레오나르도가 흠칫할 겨를도 없이 가볍게 휘둘러진 창이 그의 뺨을 스치고 의자 등받이를 박살냈다. 언뜻 어깨로 느껴진 창의 무게는 결코 가볍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애매한 말은 집어치워, 레오나르도 워치. 네가 말할 수 있는 답은 두 가지야. 예. 혹은 아니오. 그 이외의 발언은 전부 적대행위로 간주하겠어."

싸늘한 땀이 목을 타고 흐른다. 
레오나르도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어요."
"……그래?"

그럼 죽던가.

투명한 목소리와 동시에 거대한 삼지창이 심장을 향해 똑바로 휘둘러진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반쯤 부서진 의자 채로 몸을 뒤로 튕겨낸 뒤, 레오나르도는 의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부스러지기 시작한 피의 그물을 반쯤 몸에 매단 채 필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기어갔다. 허공을 가른 에반젤린은 벌레처럼 기어가기 시작한 레오나르도를 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 서있는 남색 정장의 여인도 딱히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자신이 움직일 것까지도 없다는 거겠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지.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나?"
"……없습니다."

반쯤 파괴되었을 뿐인 피의 그물은 여전히 건재하게 사지를 조여온다. 저주받은 사안의 여인은 그닥 아쉬운 기색도 없이 다가와 레오나르도의 심장을 향해 삼지창을 겨누고.

그대로 박아넣었다.

…….
………….
……………….

(어라?)

나름대로의 고통을 각오하고 악문 이가 무색하게도 통증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심조심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몸이 아닌 바닥에 삼지창을 비스듬하게 꽂아넣고 이쪽을 응시하는 에반젤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안구가 자신을 응시하다 이내 눈꺼풀 아래로 가라앉아 슬그머니 모습을 숨겼다.

"둔하군."
"……."
"아무 기술도 없고."
"………."
"정말로 이런 애를 <라이브라>에 넣어도 괜찮겠어?"
"………엑."

방금 뭐라구요?

에반젤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단어에 레오나르도의 사고가 뒤엉킨다. 그리고 서재의 문을 열고 의외의 인물이 나타난 순간 뒤엉킨 사고는 그대로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스티븐 씨?"
"이야, 꽤 심한 꼴이로군. 소년."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라고 한 건 너잖아."

가볍게 허리를 숙인 채 레오나르도의 상태를 살펴보는 스티븐과 "벨라, 담배 좀 꺼내와" 라며 덤덤하게 창을 지팡이로 되돌리는 에반젤린. 머릿속에 가득한 물음표를 주체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던 레오나르도는 간신히 한 마디를 토해냈다.

"두 분 아는 사이…?"
"아는 사이고 뭐고, 같은 동문에, 같은 동료야."
"엑."
"그치만 하필 나를 가지고 가족을 몰살시킨 원수라고 하다니, 너무 스케일 크게 나간거 아냐? 에바."
"크라우스나 체인이 원수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적당히 질 나빠 보이는 네가 제일 적임이지."
"그것 참 난감하군."

그렇게 말하는 스티븐이었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난감한 기색이 없다.

"저기!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데 대체 뭔가요!?"
"뭐긴 뭐야. 네가 나한테 속은거지."
"어째서?!"
"네가 목숨과 라이브라의 기밀을 저울질 하게 됐을 때 후자를 택할 인간인지 테스트 해보려고."
"……."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 하지 마. 50달러 줄까?"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아니, 필요없다는건 아니지만!!"

아까까지 팽팽하게 이어지던 긴장감이 어이없게 끊어진 탓인지 생각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옆에 재떨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벨라에게 익숙한 동작으로 재를 떨어준 뒤, 충격의 여파로 피의 그물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있는 레오나르도에게 몸을 숙였다.

"충격받지마. 이번에 들어왔다는 신입 이야기를 들어보다 이거 나한테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이구나- 싶어서 한 번 시험해본 거니까."
"충분히 충격적이거든요!!"
"그래도 꽤 굳건히 버텼어, 소년. 사안의 에반젤린을 상대로 그 정도면 훌륭해. 칭찬해주지." 
"감사하긴 한데!! 감사하긴 한데요!!!"

이후, 레오나르도가 평정을 되찾는 데에는 한시간 30분 하고도 다시 한번 차려진 티타임 세트가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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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린 L. 스포르치아] : 그녀의 이름. 애칭은 에바. 아명(兒名)은 이브. 

[맹인] : 눈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른 감각이 비상하게 발전했다.

[H.T. 총편집장] : HL에 존재하는 굴지의 신문사 '헬사렘즈 타임'의 총편집장이자 실소유자.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총편집장이라는 직위는 그냥 장식에 가깝다. ...아마도?

[악마의 사안 보유자] : 악마의 사안은 보통의 인간의 눈과 달리 666개의 겹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정 대상과 모든 눈을 마주칠 경우 대상은 즉사한다. 보유자의 의지에 따라 최면과 기억 조작, 암시 및 세뇌가 가능하다. 다만 <신들의 의안>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하다. 

[에트루리아식 혈투술] : 석화의 특성을 지닌 피를 이용한 혈계술. 피를 무기로 만들어 싸우는 검투술에 가깝다. 매개물은 그녀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

[스포르치아 가문 최후 생존자] : 에트루리아식 혈투술을 계승하던 스포르치아 가문은 블러드 브리드의 습격에 의해 멸족했다. 에반젤린은 에트루리아식 혈투술을 계승한 최후의 생존자이다.

[라이브라의 후원자] : 에반젤린이 라이브라에 후원하는 것은 세 가지다. 하나는 스포르치아 가문의 '재력'. 또 다른 하나는 헬사렘즈 타임의 정보원들이 캐내는 '정보'. 남은 하나는 빛이 있는 장소에서는 차마 이야기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이다. 

[단명] : 피를 석화시키는 에트루리아식 혈투술은 사용자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대부분 30대를 넘기기 어렵고 40대까지 살면 장수로 친다. 때문에 대부분이 일찍 결혼해 자손을 남겼다.